# 127
채희라의 스폰서 (2)
채희라의 스폰서?
사실 서유림도 궁금했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민들레’같은 엄청난 가게를 채희라에게 통째로 맡기는 것일까?
그것도 모자라서 고급 룸살롱을 여러 점포 운영했고, 곳곳에 고급스러운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서유림이 확인한 것만 이 정도였다. 확인하지 못한 재산은 더욱 엄청나겠지.
물론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꺼려지는 것은 꺼려지는 거였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50이라면 피하고 싶은 마음도 50이랄까?
이유는 간단했다.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충돌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야 할까?
누구에게나 신념이 있고 가치관이 있다.
서유림도 마찬가지다. 임채모를 만난 후로 가고자 하는 길을 정했다.
그런데 채희라의 스폰서 역시 나름대로 뚜렷한 신념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신념과 가치관이 우연히 일치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겠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분명히 다를 것이다.
서유림은 채희라가 지나가는 말처럼 ‘텐프로의 독립’이라는 사명감을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곧 스폰서의 사명감이겠지.
왠지 서유림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큰 줄기가 같다고 해도 사소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어찌 되었건 둘 중 하나가 한 발 물러서는 식으로 양보해야 하겠지.
과연 스폰서가 그렇게 할까?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렇지 못한 사람이 양보하고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러면 결국 충돌할 수밖에.
“싫어?”
서유림이 한동안 말이 없자 채희라가 조금은 불안한 표정을 했다.
“싫다기보다는 나를 왜 보자는 것인지 궁금해서.”
“오빠가 준 휴대폰 있잖아. 우리 스폰서가 패턴 풀고 내용 모두 확인했어.”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옥희경의 휴대폰.
하지만 채희라도 서유림도 ‘옥희경’이라는 이름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도상국이 비록 차량 안에 있다고는 하지만 자칫 이름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까.
어쨌건 그것 때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물론 다른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굳이 피할 이유도 없었다.
물러서도 될 부분은 물러서고, 물러서지 말아야 할 부분은 입장을 견지하면 되니까.
그러면 스폰서도 알아서 입장을 정하겠지.
“그럼 가서 만나보자.”
함께 승용차에 탔다. 도상국이 차량을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차량 안에서는 옥희경과 관련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도상국이 들으면 그냥 있지 않을 테니까.
대신 채희라가 스폰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김영자. 나이는 56세다.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라서 깜짝 놀랐다. 혹시 여자 이름을 가진 남자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 사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조영민이라고 남자던데.”
“호호, 찾아봤구나? 그런데 그분은 나처럼 바지사장이야. 민들레도 그렇고 마루도 그렇고 실제 사장님은 우리 스폰서야.”
그러면 말이 되는군.
그런데 김영자에게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그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란다 킴? 내가 알고 있는 그 미란다 킴 맞는 거야?”
“20년쯤 전에 한국을 들썩이게 했던 로비스트를 말하는 거라면 맞아.”
서유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서유림이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는데도 기억이 날 정도로 유명한 여자였다. 물론 그 후에도 종종 이름이 거론 돼서 기억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때 무기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정찰기, 전투기, 수송기, 전투헬기, 군함 등의 무기 구입에 관여했다.
그런 식으로 미란다 킴이 관여하여 도입한 무기의 금액만 10조 원이 넘었다고 들었다.
물론 그건 빙산의 일각이겠지. 미란다 킴 같은 로비스트가 무기 구입에만 관여했겠는가?
그 때문에 구속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출소 후에 다시 크게 성공을 거둔 모양이다. 아니면 그때 벌었던 돈을 잘 숨겨두었거나.
어쨌건 서유림의 머릿속에는 그리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채희라가 서유림의 표정을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풋,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잖아. 예전에 알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선입견 갖지 말고 지금의 모습만 봐줘.”
그게 쉽나?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쉽게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내게 박혀있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짧은 순간에 선입견을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알겠어. 아무튼 일단 한번 만나봐.”
채희라가 서유림의 팔짱을 끼고는 애교를 떨었다.
이거 왠지 분위기가 사이비 종교 전도사에게 홀려서 끌려가는 느낌인걸.
그러는 사이 차량이 빌딩 앞에 도착했다.
“상국씨는 그대로 퇴근하세요. 오늘 고마웠어요.”
“네, 사장님.”
도상국이 차량을 세워놓고 키를 채희라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퇴근했다.
서유림이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이런 차림으로 들어가도 되나?”
“괜찮아. 옷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하지?”
“그런가? 하긴 뭐. 면접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서유림이 등산할 때 입었던 운동복차림 그대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채희라도 그러더니 미란다 킴도 건물 옥상을 좋아했다. 채희라는 곧장 빌딩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채희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중년의 여성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서유림은 딱 보는 순간 ‘이 여자가 스폰서 김영자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딱 그랬다.
56세라고 했는데 직접 보니 4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겠다. 돈의 힘으로 엄청 가꾼 거겠지.
털이 하얗고 조그마한 강아지를 안고 있는데, 털이며 액세서리며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관리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반가워요.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전설적인 로비스트라서 영어발음이 조금 섞인 발음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옆집 아주머니처럼 편안한 말투다.
옥탑방을 슬쩍 둘러보니 채희라의 옥탑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기도 비슷했고, 인테리어도 화려함보다는 정갈함이 느껴졌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뭇결이 살아있는 원목을 많이 사용했다는 정도일까?
특히 옥탑방 한쪽에는 마치 작은 바처럼 만들어놓은 장소도 있었다.
“무슨 차 좋아해요?”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 보이차 들어요. 내가 요즘에 보이차에 푹 빠졌거든.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김영자가 바의 분위기를 연출한 자리로 인도했다.
채희라는 이곳에 자주 와본 모양이다. 서유림의 팔짱을 끼고 자연스럽게 이끌어주었다.
김영자는 보이차 타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뭐가 저렇게 복잡해? 작은 다기 위에 뜨거운 물을 마구 붓고 어쩌고 하며 한참 공을 들인다.
그러면서 소소한 것들을 묻거나 이야기했다.
“보이차 좋아해요?”
“많이 마셔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나.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이거에 빠지면 집안 거덜 날 수도 있거든. 그런데 운동하고 오는 길인가 봐요.”
“죄송합니다. 옷을 갈아입고 왔어야 했는데.”
“오호호. 아니에요. 난 그런 거 전혀 상관하지 않아요. 자, 마셔 봐요. 보이차는 깨작깨작 마시는 게 아니니까 드시고 싶은 대로 들어요.”
서유림이 보이차를 마셔보았다.
“음! 확실히 구수한데요. 떫은맛이 거의 없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서유림은 감각이 일반 사람의 5배나 될 정도로 뛰어나다. 미각과 후각 역시 뛰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고급이냐 저급이냐를 판단할 지식은 없지만, 어떤 맛과 향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싸구려 차를 마시면 그 안에 섞여있는 떫은맛이나 신맛 때문에 인상이 종종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김영자가 준 보이차는 확실히 맛과 향이 좋았다.
“역시 보는 눈이 있네. 많이 들어요.”
사양하지 않고 보이차를 마셨다.
그런데 언제쯤 본론을 이야기하려나?
김영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보이차를 몇 모금 마시더니 옥희경의 휴대폰을 꺼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패턴을 풀었어요. 그런데 그 안에 아주 재미있는 정보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요? 어떤······?”
서유림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풀기 힘들었던 문제 하나가 풀리려나보다.
하지만 김영자는 곧장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황국회라고 알아요?”
생소한 단어였다. 전혀 들어본 기억도 없다.
“모릅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하긴, 모르는 게 당연하죠. 일반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단체니까. 그러면 프리메이슨은 들어봤어요?”
“들어는 봤습니다. 하지만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수준이라서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는 모릅니다.”
“사실 나도 프리메이슨은 잘 몰라요. 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인 것만큼은 분명해요. 그런 의미에서 황국회를 한국의 프리메이슨 정도로 비유하면 적절하려나? 아니다. 탄생의 배경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 비교할 수가 없겠군요.”
지루하군.
자꾸 모르는 것 묻지 말고, 엉뚱한 것 빙빙 둘러대지 말고 핵심만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김영자가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다.
갑자기 서유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황국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황국회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라면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한민국을 장악해온 막강한 세력의 친일파.”
친일파?
“원래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친일파 숙청부터 했어야 해요. 하지만 미국은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했죠. 친일파들이 통치경험이 있다고 해서 오히려 그들을 사회의 주요 요직에 앉혔어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잔뜩 움츠렸던 친일파는 다시 득세했죠. 그들이 가장 힘을 써서 했던 일이 무엇일 것 같아요?”
또 질문이군.
답을 알 것 같긴 한데 해줄까 말까? 한번 답해주면 계속 물을 것 같다.
그래도 이번 한 번만 답을 줘보자.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거겠죠.”
김영자가 조금은 놀라는 표정을 했다.
“역시! 그렇게 단번에 맞출 줄은 몰랐어요. 맞아요. 그들은 다들 친일행각을 했다는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역적으로 몰려서 처단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해했죠. 그러니 자신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럼 그 방법이 뭔지 알아요?”
“경쟁자를 없애는 거겠죠.”
“어머!”
김영자가 또 놀랐다.
저거 왠지 쇼인 것 같은데. 틀린 답을 해도 맞는 답인 것처럼 리액션 해주기. 아니면 내가 정말 잘 맞추고 있는 건가?
아니지. 그따위가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김영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 정신 팔리지 말자.
“정확히 봤어요.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열을 올렸죠. 자신들을 대체할 인재가 나오면 굳이 친일파라는 오물을 묻은 사람을 그 자리에 계속 앉혀둘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민중들은 친일파 숙청운동을 강력히 요구했죠. 직접 나서기도 하고요.”
김영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다행히 서유림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 혼자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때 만들어진 게 황국회죠.”
황국회. 한마디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친일파들이 모여 만든 자위단체다.
하지만 황국회는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늘 아래로 숨어들었다.
대신 자신들의 손발을 만들어서 정치, 경제, 문학, 연예 등 사회 전면에 내세웠다.
황국회의 가장 큰 무기는 역시 자금력이었다. 천문학적인 자금력은 사회 전면에 내세운 손발을 크게 성장시켰고, 그런 손발은 황국회에 더욱 큰 자금을 헌납하며 은혜에 보답했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황국회의 힘은 강해질 수밖에.
“고백하지만 저 역시 한때는 황국회의 그런 손발이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전설적인 로비스트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그런 배경이 꼭 필요할 테니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김영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보이차를 마시는 사이 슬쩍 물었다.
“그럼 지금은 아닌가요?”
김영자가 갑자기 풋! 하고 웃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내가 아직도 황국회의 손발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실 그건 다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진짜로 궁금한 것은 이번 질문이었다.
“그럼 황국회를 등진 이유는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