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채희라의 스폰서 (1)
<< 네 죄는 네가 더 잘 알겠지? >>
서유림이 근엄하게 물었다. 그리 크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집회장이 워낙 조용하다보니 반대편 끝까지 그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태수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죽어야지. 살려달라는 건 뭐야?
물론 마태수가 다시는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된통 당하고도 또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그 무모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하겠지.
그리고 아까운 인재이기도 했다. 마태수에게 심어놓은 정령이 제법 성장한데다가 마태수도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능력이 다른 장로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까워서 마태수를 벌하지 않는다면 소탐대실이 될 것이다. 이런 때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야 제2 제3의 배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죽일 마음은 없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처벌은 충분하니까.
<< 나는 내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킨다. 누구든지 나를 배신하면 폐인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내가 비록 대장로를 아끼는 마음이 크지만, 스스로 한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그대들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 누구나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리고 너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다 썼다. 네게 남은 것은 처벌을 달게 받는 것뿐이다. >>
서유림이 마태수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태수에게 침투시켰던 하위정령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위정령을 회수하는 데는 굳이 스킨십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스킨십은커녕 거리의 제약 자체가 없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에서도 정령을 회수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도 굳이 가까이 불러서 이런 절차를 밟는 이유는 다른 회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보고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라는 거지.
일종의 쇼라고 해야 할까?
서유림이 마태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정령 회수’를 외쳤다.
그러자 마태수에게 침투했던 정령이 서유림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마태수의 체력을 힘껏 빨아들였다.
서유림의 마력과 체력흡수 능력은 이미 한계치에 근접한 900대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마태수의 체력을 한 톨도 남김없이 모조리 빨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하지만 체력흡수만 가지고는 만족할만한 징벌이라고 할 수 없다. 죽이지 않는 이상 소모된 체력은 다시 채워지기 마련이거든.
일주일 정도면 웬만큼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일상생활에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회복될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평생 저지른 죄의 값을 치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놈도 평생에 걸쳐서 갚도록 해야겠지.
방법? 후훗! 있지!
그렇지 않아도 익히기만 하고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한 마법이 있다. 장로들 중에서 누군가가 배신하면 그때 써먹으려고 벼르고 있던 마법이기도 하지.
포이즌 마법!
서유림은 다섯 가지의 포이즌을 사용할 수 있다.
포이즌마다 독성이 다르다. 시름시름 앓게만 하는 그레이 포이즌도 있고, 지속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고통을 주거나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레드나 블루 포이즌도 있고, 환각상태에 빠뜨리는 블랙 포이즌도 있다.
마태수 같은 놈에게는 그레이 포이즌이 적당하겠지.
서유림이 체력을 흡수하면서 마태수의 몸에 그레이 포이즌을 적당량 투입했다.
마태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요.”
벌써부터 목소리가 꺼져가는 느낌이다. 누가 보면 금방 죽기라도 할 것 같군.
하지만 전혀 불쌍하지 않다.
마태수 같은 놈은 건강한 몸을 줘봤자 어차피 세상에 해악밖에 안 될 놈이잖아. 물론 잠깐은 반성하는 척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본성을 드러낼 것이다.
갱생을 바라고 기회를 준다면 그로 인해 오히려 다른 선량한 누군가의 기회가 이놈에 의해 망가질 수 있겠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것을 판단하느냐고?
무슨 권리로 징벌을 내리느냐고?
그런 것은 법만이 심판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럼 그 잘난 법은 이놈이 지금껏 해온 악행을 왜 막지 못했는데? 이놈에게 피해 받은 선량한 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상할 건데?
법이 숭숭 뚫린 구멍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니 사회가 이 꼬라지가 된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대신 징벌하는 것이다. 물론 불법이지. 벌한다면 당연히 받아야겠지. 하지만 그 잘난 법이 과연 나의 죄를 증명하고 벌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서유림이 징벌을 마치고 손을 뗐다.
그러자 마태수가 식물인간처럼 힘을 잃고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순간 장내가 살짝 어수선해졌다. 마태수의 변화를 보고 두려운 마음에 흘린 신음소리였다.
서유림이 다시 광명회 회원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자신을 기습했던 마태수의 수하들에게서 시선이 멈추었다.
수하들이 소름이라도 느낀 듯 몸을 움츠렸다.
특히 다른 세 명의 장로들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 나머지 장로들은 고개를 들라. >>
장로들이 얼른 고개를 들어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 나는 너희가 며칠 전 자정 무렵에 대장로의 사무실에 모여서 이를 꾸밀 때부터 오늘의 일을 예단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대장로가 꾸몄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대장로를 대표로 처단한 것이다. >>
다들 깜짝 놀란다. 주군이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모임의 시각은 물론이고 장소까지 말이다.
‘주군께서 그런 것을 어떻게 알고 계시지? 설마 우리 안에 첩자라도 있는 건가?’
‘이건 말도 안 돼. 정말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보고 계신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믿기지가 않아.’
다들 두려움에 어깨를 떨었다. 감히 주군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불손한 생각조차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주군이 머릿속까지 모두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다.
<< 물론 너희도 두 마음을 품긴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 하여 너희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자 한다.
다시는 나를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다짐하겠느냐? >>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장로들이 앞 다투어 머리를 조아렸다.
서유림은 만족스러웠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오늘의 교훈을 잊고 다시 못된 일을 꾸밀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령의 힘이 더욱 강해져서 놈들의 계획을 훨씬 더 빠르게 자세히 알 수 있겠지.
한마디로 놈들은 서유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힘들게 얻은 놈들인데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이용해먹은 후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다. 그대들을 다시 믿어보지. >>
서유림이 이번에는 장로들을 도와서 기습에 동참한 정예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은 각 조직에서 나름대로 최고라고 인정받는 실력자들이었다. 게다가 흉악하기까지 해서 광명회를 떠난다면 다시 사회악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자들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 나는 지금껏 수많은 위협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장로들에게는 무려 두 번이나 되는 기회를 주었군.
하여 그대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스스로 결정하라.
나와 맞서고 싶은 자는 기회를 다시 노려도 좋다. 하지만 그때는 저 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맞서겠는가? >>
“아닙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정예의 수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대답했다. 공손한 태도가 마치 신을 대하는 듯했다.
당연히 맞서겠다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 그러면 장로들과 함께 내게 충성을 맹세하겠느냐? >>
“충성을 맹세합니다.”
“뭐든 시키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거두어만 주십시오.”
사실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다들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굽실거렸다.
<< 좋다. 그대들을 지금부터 광명회의 ‘참빛전사단’으로 명하겠다. 그대들이 가진 그 재능은 사회의 빛이 되는 데 쓰일 것이다.
알겠지? >>
“감사합니다, 주군!”
정예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나머지 회원들 차례였다.
널찍한 창고에는 200명에 가까운 조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원래는 7개 조직을 접수하면서 조직원이 300명 가까이 되었지만, 그중 100명가량이 다른 길을 찾아 떠났다.
서유림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남아서 문제의 씨앗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떠나는 게 훨씬 낫다.
일일이 다 붙잡아둘 능력도 없고.
나머지 회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
나를 따르는 길은 고행의 길이 될 것이니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자라면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한 명이 남아도 좋고 두 명이 남아도 좋다.
하지만 고행을 참고 나와 함께하는 자는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을 것이며, 먹고 살 만큼의 월급도 받을 것이며, 그 끝에는 틀림없이 광명을 보게 될 것이다. >>
과연 이들 중 몇 명이나 남게 될까?
서유림은 50명 정도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먹여 살릴 자신이 있었다.
일곱 개의 조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200억 원에 가까운 동산과 부동산을 확보했고, 조직이 직접 운영하던 룸살롱이나 클럽 같은 업소도 몇 개 확보했으니까.
불법적인 요소 없이 운영해도 50명 정도의 인건비는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서유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페인트 통 하나를 열고는 커다란 붓으로 페인트를 찍어가며 전면의 벽에 글자를 썼다.
잘 쓴 글자는 아니지만 못 알아볼 글자도 아니었다. 물론 한자를 모른다면 전혀 못 알아보겠지만.
[見利思義]
<< 견리사의. 이익을 취하기에 앞서 그것이 의로운지를 반드시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 광명회의 유일무이한 교리이다.
이 교리를 따르지 못하는 자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다음 집회까지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고 나와 같은 길을 가겠다는 자만 집회에 참여하라.
단, 다른 길을 가겠다고 떠나는 자는 다시는 조폭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랬다가 다시 내 손에 걸리는 날에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
서유림이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나머지는 이들의 몫이었다.
만약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후훗,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
그래도 몇 명은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정령에 의해 구속된 세 명의 장로들과 서유림을 공격했던 20명가량의 정예들 말이다.
그들이 서유림의 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폐인이 되는 것뿐이니까. 마태수처럼 말이다.
서유림이 창고를 나섰다.
창고 안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두고 서로의 생각을 묻는 거겠지.
일주일 후면 결과를 알겠군.
서유림이 서울 시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휴대폰이 울어댔다. 발신자를 보니 채희라였다.
- 오빠, 지금 만날 수 있어?
“무슨 일 있어?”
- 만나서 얘기해. 나쁜 일은 아니야.
“어디로 갈까?”
채희라와 만난 시각은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채희라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도상국이 있었다. 도상국은 차량 안에서 기다리고 채희라만 나와서 서유림 곁에 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채희라의 표정이 많이 상기되어있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무슨 일인데?”
“우리 스폰서가 오빠 보고 싶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