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등산은 참 좋은 것이야. (2)
한상민의 호통소리에 장성식이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지금 출발하면 너무 늦을 겁니다.”
“수락산으로 바로 데리고 오면 되지, 병신새끼야!”
“아, 알겠습니다.”
장성식이 서둘러서 출발했다.
한상민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 새끼도 나사가 빠졌군. 이참에 비서부터 갈아야겠어.”
문득 권진아 얼굴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신선한 미모 때문에 눈이 갔고, 다음에는 서유림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갔다.
그런데 감찰실로 데려오고 쭉 지켜본 결과 일처리가 무척 스마트했다. 업무파악도 빠르고,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도 눈치가 빨랐다.
‘이참에 권진아를 비서로 키워볼까?’
가만 생각해보니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권진아의 능력이라면 조금만 경험을 쌓으면 장성식보다 일처리가 뛰어날 것이다.
게다가 옆에 데리고 다니면 다른 사람 보기에도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늘 함께 붙어 다니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정이 쌓일 일도 자연스럽게 많아지겠지.
한상민의 입술이 씰룩 말려 올라갔다.
휴우, 시원해라.
샤워를 마치고 나자 온몸의 물기가 몸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5초도 안 돼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정령 아리안의 힘이 강해지다 보니 이제 이 정도 컨트롤은 체력이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사실 옷을 입은 채로 샤워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벗고 하는 게 훨씬 시원했다.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께서 밥상을 그득하게 차려놓으셨다. 해산물, 고기, 나물 등등 반찬 종류면 열 가지는 되는 듯했다.
서미연도 서미진도 함께 모여 앉았다.
“와, 아침부터 상다리 부러지겠네. 이러다가 오빠가 번 돈 음식 값으로 다 거덜 나는 것 아냐?”
“아빠도 이젠 열심히 벌고 계시지 않니. 걱정하지 말고 먹어.”
“잘 먹겠습니다.”
부모님도 서유림도 수저를 들고 양껏 배를 채웠다.
그렇게 한참 식사하고 있는데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여?”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어머니께서 갑자기 거친 목소리를 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긴 뭐 하러 왔어? 얼른 나가?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가족들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평소에 화 한 번 안 내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왜 저러시지? 누가 왔기에?
다들 우르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머니는 화가 잔득 나셔서 손님을 향해 연신 삿대질을 했다.
상대가 누구이기에 저러시나 싶어서 봤더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한상민의 비서인 장성식 부장. 어머니도 지난날 아버지께서 어쩌다가 사고를 당해 엉덩뼈에 금이 갔는지 모두 전해 들었다. 그 원흉이 장성식 부장이라는 것까지도.
아버지도 장성식의 얼굴을 기억하고 계셨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정령의 힘 덕분에 기억력이 젊은이 못지않게 좋아지신 상태였다.
장성식을 향한 태도가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사람이 내 집에는 무슨 일이오?”
장성식은 무척 난처한 표정이었다. 서유림을 데려가야 한다는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초인종을 눌렀는데, 막상 부모님 얼굴을 보니 지난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저런 천한 사람들에게 비굴하게 굽실거릴 수도 없고.
그러다가 부모님 뒤에 서있는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아, 서 대리. 뭐 하고 있어? 얼른 나오지 않고. 회장님 기다리게 할 셈이야?”
뭐? 서 대리? 한상민이 나보고 ‘서 팀장’이라고 부르던 소리 못 들었나? 아니면 팀장으로 인정하기 싫다 그건가?
뭐, 호칭이야 그렇다 치고. 그보다는 하는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 드네.
장성식은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것일까?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하는 게 도리 아냐? 그런데 아버지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서유림한테만 이야기한다.
아무리 지난일 때문에 대면하기 껄끄럽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사람을 못 본 체하면 그건 상대방을 무시하는 꼴이잖아.
내가 그 꼴을 그냥 봐줄 것 같아?
“지금 밥 먹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어머니. 저 사람 상대할 필요 없어요. 들어오세요.”
“아니, 서 대리. 지금 회장님 기다리신다니까.”
“그럼 그냥 혼자 가시던가. 들어가세요.”
서유림이 장성식을 밖에 둔 채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즐거웠던 아침식사시간이 장성식 때문에 망쳐버렸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숨을 씩씩거렸다.
서유림이 환하게 웃으며 두 분을 달래주었다.
“제가 조만간 버르장머리 확실히 고쳐놓을게요. 그러니까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제야 부모님이 못 이기는 척 수저를 드셨다.
서유림은 식사를 느긋하게 마쳤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한 30분은 넘게 흐른 것 같다.
장성식이 빌라 밖 주차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발밑에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서유림을 발견하자마자 눈빛부터 날카롭게 했다.
“이봐요. 서 대리. 지금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요?”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이런! 눈치 채셨네. 티가 많이 났어요?”
장정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사람이 진짜······.”
“진짜 뭐요? 막말로 내가 장 부장님을 좋게 대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우리 아버지를 그 꼴로 만든 장본인한테?”
“그거야······.”
장성식이 뭔가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다. 아마 밖에서 30분 동안 기다리면서 그런 이야기에 대한 변명거리만 생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서유림은 듣고 싶지 않았다. 변명 듣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서유림이 얼른 손을 들어서 장정식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런데······.”
그러면서 장성식의 발밑에 널브러진 담배꽁초를 바라보았다.
“왜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는 겁니까? 다 주우세요?”
“뭐······ 뭐라고?”
“당신이 버린 쓰레기 당신 손으로 주우라고요. 쓰레기 다 줍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테니까.”
장성식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서유림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말이 나 되는 일이던가? 괜히 시비 붙었다가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게다가 칼자루를 쥔 사람도 서유림이었다. 막말로 서유림이 안 가겠다고 버티면 입장 곤란해질 사람은 장성식이었다.
그렇다고 담배꽁초를 줍자니 그것도 자존심 상했다. 어떤 것은 괜히 침까지 뱉어놓아서 무척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싫으면 관두시던가. 나야 장 부장님 때문에 기분 나빠서 등산 참여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서유림이 몸을 돌려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슬쩍 보니 부모님도 베란다에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정령의 힘 덕분에 시력과 청력 모두 많이 발달하셨다. 서유림과 장성식 사이에 나누는 대화도 대부분 듣고 계시겠지.
장성식이 얼른 서유림을 붙잡았다.
“아, 알았어요. 치우면 될 것 아니에요?”
서유림이 걸음을 멈추고 장성식을 바라보았다.
장성식이 차마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줍지는 못했다. 대신 구둣발을 빗자루 삼아서 담배꽁초를 한 곳으로 모았다.
하지만 마지막 정리까지 구둣발로 할 수는 없었다.
서유림은 청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장성식은 결국 허리를 굽혀서 담배꽁초를 손으로 모두 주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 후가 더 문제였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버려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시간 많으신가 보네. 나 같으면 차에 버리겠네. 어차피 늦으면 내 책임 아니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장성식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담배꽁초를 차 안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차량 안에 비닐봉투가 있어서 쓰레기봉투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제 됐지? 갑시다.”
“그러시죠.”
서유림이 자연스럽게 승용차 뒷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나 탄다는 운전석 대각선 뒷자리였다.
장성식이 서유림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유림은 어느새 몸을 뒤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씨발.”
장성식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는 차량을 출발시켰다.
그런데.
부르릉-
오우! 조금 달리는데. 평소의 운전스타일 나온다. 아니, 평소보다 더욱 거칠게 차량을 모는 것 같다.
설마 나 겁주려고 그러는 거는 아니겠지?
후훗, 그러거나 말거나. 서유림은 뒷자리에서 일부러 들으라는 듯 코까지 골면서 잠을 자버렸다.
장성식은 시외로 빠져나가면서 더욱 속력을 높였다.
하긴, 빌라 앞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그걸 만회하려면 최대한 밟아야 할 것이다.
덕분에 순식간에 수락산 입구에 도착했다. 장성식이 주차장으로 차를 거칠게 몰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차량이 갑자기 빙판길 위에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주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어어, 이게 왜 이래?”
장성식이 당황해서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하지만 차량은 전혀 제어되지 않았다.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지더니 산비탈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아악!”
장성식의 가슴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다행히 안전벨트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서유림이 생각났다. 뒷좌석에 앉은 서유림은 안전벨트도 없이 잠들어있지 않았던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장성식이 얼른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서유림이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장성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장성식을 걱정하듯 손으로 어깨를 짚으며 안부를 물어주었다.
“괜찮아요?”
“······예.”
“조심하지 그랬어요. 하여튼 늘 출발하고 5분, 도착 직전에 5분이 가장 위험하다니까.”
서유림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멀쩡하다는 이야기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긴장이 일순간 풀어져서 그런 것일까?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일단 좀 내리죠.”
서유림이 먼저 내렸다.
장정식이 혼자 몸을 움직여보려다가 안 되자 서유림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 좀······.”
“가지가지 하시네. 실례 좀 할게요. 자세가 안 나와서······.”
서유림이 장성식의 멱살을 움켜쥐고 꺼내주었다. 덕분에 장정식이 차량 안에서 질질 끌려나왔다.
멱살 잡힌 건 좀 불쾌하지만, 장정식이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는 없어 보였다.
차량은 비탈 아래에 완전히 처박힌 상태였다. 견인차가 와서 끌어주지 않는다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회사 차인데 뭐 어때? 보험처리하면 되지.
문제는 회장님을 비롯한 임직원들이었다. 주차장에 회사차는 보이는데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등산을 시작한 모양이다.
“우리도 빨리 올라갑시다.”
장성식이 앞장섰다. 등산 코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겨우 100m도 안 올라갔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평소에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정도로 저질체력은 아니었는데.
서유림이 저만큼 앞서가다가 장성식을 기다려주었다.
“빨리 좀 와요.”
“지금 가고 있잖아요. 하악. 하악.”
대답하기도 힘들다. 폐가 입을 통해 빠져나올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르고 또 올랐다.
다행히 20분 정도 만에 회장님의 일행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50m쯤 앞에서 걷고 있는 임직원들의 보였다.
임직원들도 장성식과 서유림을 본 모양이다.
“어, 저기 장 부장 오는군요. 서유림씨도 오고.”
“그래?”
다들 걸음을 멈추고 장성식과 서유림을 기다려주었다. 한유진 회장조차도 걸음을 멈추었다.
장성식은 안절부절못했다. 자신 때문에 회장님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는가?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었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얼른 산을 올라갔다.
그런데 조금 가파른 비탈길을 오를 때였다. 장성식이 커다란 바위를 밟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어어······. 악!”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장성식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절벽이나 마찬가지인 산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다들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앗! 장 부장.”
“저······ 저······.”
대충 10m 정도는 굴러 떨어진 것 같다.
서유림이 수인을 풀고는 얼른 비탈을 내려갔다. 이번에도 장성식의 멱살을 움켜쥐고 등산길 위로 끌어올려주었다.
한상민이 그 모습을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휴, 저 병신새끼. 오늘 아주 작정을 했네!”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서유림의 입술에 아주 엷은 미소가 걸렸다.
‘조금만 기다려. 다음은 네 차례니까.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