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등산은 참 좋은 것이야. (1)
비슷한 시각 고급 룸살롱에 네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사내들이었다.
룸살롱인데도 여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룸 안에는 짙은 양주냄새와 담배연기만 가득했다.
“우리나라 경찰 진짜 무능하네. 어떻게 손안에 들어온 새끼를 놓쳐? 쪽팔리지도 않냐?”
“캬아! 씨발, 인간이 아니더라고. 허벅지에 총알 두 개를 쑤셔 박았는데도 나보다 빨리 뛰는 걸 어쩌라고? 싸이카 탄 놈까지 몸으로 받고 도망치더라. 그런 놈 처음 본다.”
윤경식이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년 휴대폰은 아직도 못 찾고?”
휴대폰이라는 단어에 윤경식의 이맛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휴대폰의 정보가 연결고리가 되어서 꼬리가 잡힐 수도 있었다.
“그냥 그 새끼 깔끔하게 처리하자니까. 이러다가 꼬리 잡히면 네가 독박 쓸래?”
“씨발,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그러는 넌 그동안 한 게 뭐야? 그리고 그 새끼는 아직까지 조용하다니까. 이번에 걸린 놈은 다른 놈이라고.”
윤경식이 거칠게 쏘아붙였다. 막말로 사태 해결하려고 발바닥에 쉰내 나도록 뛰어다니는 건 이중에 윤경식 하나뿐이다. 그런데 왜 자신이 독박을 써야 한단 말인가?
그제야 사내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그러니까 더 불안한 거지. 눈에 보이면 뭐가 걱정이냐? 안 보이는 데서 이상한 짓 하는 게 걱정이지. 그냥 이참에 끝내버리자니까.”
“내 생각도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사내들도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보탰다. 의견이 갑자기 한 데로 모아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문제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해? 요즘 광명회인가 뭔가 하는 새끼들이 하도 판을 쳐서 일을 믿고 맡길만한 놈도 없어.”
“하노이파나 흑사파 이용하면 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윤경식이 다시 나섰다.
“그래. 그쪽은 네 전공이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 좀 해라. 그럼 얘기 다 끝난 건가? 이제 애들 좀 들이자. 시커먼 사내놈들만 있으니까 무슨 산적 소굴 같잖아.”
“그래. 애들 들이라고 해.”
그제야 밖에서 대기하던 아가씨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연예인 뺨칠 정도의 미인들이었다.
마담이 룸 안까지 들어와서 아가씨들에게 특별히 지시했다.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위에 계시는 귀족분들이셔. 최선을 다해서 모셔. 알겠지?”
“네, 언니.”
“이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애들이에요. 조금 실수해도 예쁘게 봐주세요.”
“그럼, 그럼. 능숙한 것들보다는 신선한 것들이 좋지.”
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놀자 판으로 변해버렸다.
* * *
서유림이 MAN FC 사무실로 향했다. 계약서 작성을 위해서였다.
한상민도 장성식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처음 보는 남직원이 서유림을 상대했다.
계약서는 서유림의 요구대로 간단하게 세 장으로만 작성되었다.
서유림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번 43 대회에서 권이슬과 챔피언벨트를 놓고 싸우는 것도 그랬다.
그 문구를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권이슬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권이슬은 43대회를 포기하고 토너먼트에 참여했었다. 토너먼트 우승상금이 무려 10억 원이나 되니까. 그리고 자신의 미들급 우승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다. 토너먼트가 시작되자마자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기권한 것이다.
이유는 발목부상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권이슬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UFC에서 넘어온 미들급 강자 댄스 핸더슨 때문이다. 토너먼트 신청기간이 끝날 무렵에 갑자기 댄스 핸더스가 나타난 것이다.
권이슬 입장으로서는 아무리 통박을 굴려 봐도 댄스 핸더슨을 이기고 우승할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43대회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 방어전을 한 번 더 성공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댄스 핸더슨이 타이틀전을 요청하면 부상을 핑계로 1년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나이 50살이 넘은 댄스 핸더슨은 빠르게 노쇠하고 있었다. 1년 후라면 권이슬이 댄스 핸더슨을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훌륭한 청사진이었다.
그런데 서유림이 그 청사진에 먹물을 뿌려버렸다. 토너먼트 헤비급 우승자의 자격으로 미들급 타이틀 도전권을 따낸 것이다.
권이슬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었겠지.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MAN FC에서 서유림을 잡기 위해 대결을 강요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댄스 핸더슨이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 서유림을 피하면 다음에는 반드시 댄스 핸드슨의 도전을 받아야 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댄스 핸더슨보다는 서유림이 편안한 상대로 여겨졌겠지. 그래서 이번에 타이틀을 지키고, 다음에 부상을 핑계로 대결을 피하겠다는 전략을 짰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나리오대로 돌아갈까?
서유림이 계약서에 힘차게 서명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목요일 저녁.
등산을 하루 앞두고 한유진 회장이 그룹 임직원들을 소집해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리 최악이었다. 한유진 회장이 경영실적부터 그룹 분위기까지 하나하나 문제가 크다며 지적했다.
끝나는 시점에는 호통까지 쳤다.
“그딴 식으로 해서 월급 받을 수 있겠어? 똑바로들 해.”
그리고는 몸을 거칠게 움직이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임직원들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님 기분이 왜 저렇게 최악이시지?”
한상민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룹 경영상황은 최고였다. 사상 최고의 매출액을 기록했고, 순이익도 어마어마했다.
그룹 분위기도 좋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그런데 회장님 비서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한태민 팀장님과 함께 회장실로 오시랍니다.
순간 한상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와 태민이만?’
이번 임원진 회의에는 큰딸 한수영부터 막내아들 한태민까지 모든 형제가 참여했다. 이복형제까지.
그런데 둘만 호출했다고?
순간 머릿속에 기분 좋은 느낌이 전해왔다.
‘그룹 후계자와 관련한 언질을 주시려는 건가?’
하긴, 이젠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도 되었다. 한유진이 아직은 건강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70살이 넘은 노구가 아닌가?
저러다가 언제 픽 쓰러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열세 살이나 어린 친동생 한태민과 만나서 나란히 회장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유진이 먼저 한상민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MAN FC 분위기가 좋더구나.”
한상민은 됐다 싶었다. 회의장에서와 달리 한유진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래. 칭찬할 건 칭찬해줘야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비자금을 그렇게 많이 빼간 것이냐?”
순간 한상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알고 계셨구나!’
비로소 오늘 한유진의 기분이 왜 그렇게 최악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한상민의 비자금 전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상민만이 아니었다.
한유진이 이번에는 한태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태민이 너는 뭘 하는데 뭘 하는데 30억 원씩이나 가져다 쓴 거냐?”
한상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자식도 비자금을 건드렸어?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이번에 영화 하나 투자하려고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진짜 괜찮은 시나리오 있다고. 회장님께서 투자를 안 해주시니······.”
한태민은 그런 사실을 들키고도 당당했다.
하긴, 그런 일 가지고 한유진이 뭐라 할 사람은 아니지.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한유진이 ‘쯧쯧’ 혀를 차더니 깜짝 놀랄 이야기를 했다.
“태민이는 당분간 사업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마라. 그냥 기획팀장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 너한테는 그게 딱 어울려.”
“아버지!”
“시끄러 인마. 입도 뻥긋하지 마.”
한유진이 버럭 소리를 질러서 한태민의 입을 막았다.
한태민이 찍소리도 못했다. 한유진이 화를 내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는 한태민이 가장 잘 알 테니까.
한상민은 입술이 쭉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것으로 한 놈 떨어져 나갔군.’
“그리고 상민이는 올해 안에 비자금 전부 돌려놓도록 해.”
올해 안에?
일정이 조금은 빠듯하다. 필로폰이라도 쉽게 판매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광명회가 워낙 들쑤시고 다녀서 그조차도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반드시 돌려놓아야만 했다.
한유진이 폭탄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유진그룹을 이끌 능력도 없는 거겠지. 그만 돌아들 가봐.”
“예, 회장님.”
한상민이 회장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한유진이 다시 물었다.
“아, 참. 내일 등산에는 서유림인가 하는 그 친구도 참여하는 건가?”
“참여시키겠습니다.”
한상민의 말에 한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회장실을 나온 한상민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만들어졌다.
‘올해 안에 50억 원이라.’
생각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서유림이라는 카드를 확보했으니 MAN FC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의 대회를 조금 무리해서 많이 만들면 50억 원도 금방 만들어질 것이다.
그거로 부족하면 가을쯤에 필로폰을 풀면 될 것이다.
‘설마하니 그때까지도 광명회가 판을 치고 다니지는 않겠지.’
다음날 아침.
서유림은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나갔다.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택시 한 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 기사가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혹시 서유림씨 되세요?”
“그런데요?”
“맞으시구나. 한참 기다렸네. 얼른 타세요. 여덟 시까지 유진그룹 주차장으로 가야 합니다. 큰일 났네. 거기까지 30분 만에 어떻게 가지?”
서유림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택시를 보낸 장본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차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택시를 보내다니.
하긴, 택시도 차는 차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성의 없잖아?
게다가 유진그룹 주차장으로 나오라고? 내가 번거롭게 거길 왜 가야 하는데? 등산을 할 거면 그냥 수락산 입구에서 만나면 되는 것 아냐?
다른 사람은 회장 눈치 어쩌고 하겠지만, 서유림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저 씻고 옷 갈아입고 하려면 30분은 걸립니다. 그러니 그냥 혼자 가세요.”
“예? 하지만 꼭 데려오라고 했는데······.”
“제가 준비가 늦어서 참여 못 할 것 같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서유림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택시기사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택시를 출발시켰다.
한상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어? 서유림이가 안 왔다고?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장성식이 안절부절못했다.
“택시 보냈는데 준비가 늦어서 참여 못 할 것 같다며······ 윽!.”
한상민이 장성식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에라 이 병신새끼야! 뭐? 택시를 보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지 몰라서 그래? 오늘 일로 그룹 후계자의 얼굴이 바뀔 수도 있어, 새끼야.”
한상민은 진심이었다.
어제 한유진이 서유림의 이름까지 콕 찍으며 등산의 참여 여부를 물었다. 그런데 서유림이 불참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유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바로 그룹 장악력이었다.
서유림 같은 사람 하나 휘어잡지 못한다면 그런 부분에서 낙제 점수를 받을 게 분명했다.
“뭐 하고 있어, 새끼야. 네가 직접 가서 데리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