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22화 (122/196)

# 122

이제 갑을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시나? (3)

“이런 씨발!”

장성식의 보고에 한상민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팽개쳤다.

서유림의 의도가 눈에 빤히 보였다.

정말로 바빠서 그런 게 아니다. 계약기간 다 되었다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아쉬울 것 없다 그거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아쉬운 놈은 한상민이었다. MAN FC를 흥행시키기 위해서는 서유림을 반드시 잡아야 하니까.

“내일 오전 스케줄 취소하고, 서유림 그 개새끼하고 약속 잡아.”

다음날 정오 즈음.

“개새끼, 씹새끼, 호로새끼.”

한상민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총동원해서 서유림을 저주했다.

이른 오전에 잠깐 시간이 난다고 해서 그 때에 맞춰 스케줄을 비워놓았더니 갑자기 약속시간을 점심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지금 일식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한번 서유림과 권진아를 데려다놓고 식사했던 바로 그 식당이었다. 그때 이유도 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기억도 있었다.

“하여튼 계약만 끝내놓고 보자. 이 굴욕을 반드시 되갚아줄 테니까.”

한상민이 서유림을 입에 넣고 씹어 먹기라도 하듯 어금니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서유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상민이 활짝 웃어주었다.

“서유림 팀장. 벌써 와있었네! 하하.”

순간 서유림이 멍한 표정을 했다.

“팀장이라뇨?”

“토너먼트 무제한급에서 우승하면서 우리 유진그룹의 이름을 홍보해주었으니 특진은 당연한 것 아냐? 적어도 팀장 정도는 되어야 격식에 맞지. 하하.”

일단 선물로 마음부터 잡겠다는 수작이군

뭐, 기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물론 그 제안을 수용할지 여부는 나중 문제고.

“감사합니다.”

서유림이 한상민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한상민 옆에는 장성식 부장도 함께 있었다.

역시 시간의 힘은 위대하다.

사실 장성식을 다시 보게 되면 아버지의 일이 떠올라서 분노를 참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장성식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도 너끈히 웃어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수해주겠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충동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좀 더 지능적이고 확실한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조만간 기회가 오겠지.

물론 오늘도 기회이긴 하다. 하지만, 오늘의 복수는 아주 사소한 수준에서 머물 것이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그러시죠.”

서유림이 이야기를 서두를 이유는 없다. 조급증을 느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한상민일 테니까.

지난번에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다 보니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유림이 한상민의 눈치 따위는 전혀 보지 않고 마음껏 배를 채웠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무려 5인분이나 먹어치웠다.

1인분에 15만 원이나 하는 음식이었지만, 한상민에게 그깟 음식 값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서유림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사실 아직도 한상민이 자신을 보자고 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단지 도핑테스트 결과와 관련한 이야기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건지······?”

“그야 당연히 재계약 때문이지.”

한상민의 눈짓에 장성식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순간 서유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비로소 한상민이 서유림을 만나려 하는 이유도, 장성식이 저자세를 취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아! 드디어 내가 계약서 바꾼 내용을 본 거로구나.’

사실 너무 늦었다. 조금 더 일찍 눈치 챌 것으로 생각했는데.

서유림이 계약서를 받았다.

이번에도 계약서가 무려 일곱 장이나 되었다. 지난번처럼 작은 글씨도 무척 많았다.

“아휴, 눈 아파!”

서유림이 도저히 못 읽겠다는 듯 장성식에게 다시 내밀었다.

“제가 어제 무리했더니 눈을 제대로 못 뜨겠어요. 장 부장님께서 읽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순간 장성식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씨발, 이 긴 걸 나보고 읽으라고? 이 개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 모습에 서유림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장성식의 속마음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왜 계약서를 그렇게 복잡하고 길게 만들어? 그냥 기존 계약서에 추가되는 내용만 한 장 정도로 정리하면 되지.

서유림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계약서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핵심만 얘기하죠. 저는 이제 기간으로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저와 계약하려면 한 경기씩 계약서 따로 만드세요.”

“한 경기씩?”

너무 뜻밖의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한상민도 장성식도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거든.

“다음달에 MAN FC 43경기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권이슬 선수와 붙여주세요. 그러면 계약하고, 아니면 바로 다른 단체와 계약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한상민이 서유림을 설득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비굴한 웃음도 지어보고, 주제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협박도 해보았다.

하지만 서유림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럼 얘기 끝났군요.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하죠. 명진식품에도 조만간 사표 던지겠습니다.”

서유림이 할 말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한상민이 깜짝 놀라서 서유림의 손을 잡았다.

“사람이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

“그럼 제 조건대로 하시겠어요?”

한상민은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서유림이 콘크리트로 틀을 만들어버리고 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한상민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알았어. 그럼 일단 43경기부터 치르지. 그리고 다시 재계약 여부를 논의하도록 하자고. 계약서는 내일 사무실에서 작성하는 것으로 하고.”

그제야 서유림이 악수 한 번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역시 우리 한 실장님은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까.”

‘한 실장님? 좋아니까? 이 새끼가 이젠 말까지 잘라먹으려고 하네.’

하지만 한상민은 꾹 참았다. 지금은 MAN FC가 먼저였다. 게다가 이번 등산에 서유림도 데려가야 한다. 그래야 한유진 회장님의 기분을 더욱 좋게 해드릴 수 있을 테니까.

한상민이 나오지 않는 웃음을 만들기 위해서 얼굴 근육에 힘을 잔뜩 주었다.

“아하하. 그것 잠 기분 좋은 얘기로군. 아, 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에 회장님 모시고 수락산 등산이 잡혀있어. 서 팀장도 이 기회에 회장님께 인사 좀 드려야지?”

순간 서유림은 거절하려고 했다. 이제는 굳이 그런 곳을 따라다녀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꼭 참여해야 할 자리였다. 한상민과 장성식을 혼내주기에 산속보다 좋은 곳이 없을 듯했다.

‘가만, 그런데 금요일이라면 광명회 집회일인데.’

그것도 서유림이 정한 집회일이었다. 스스로 광명회도라고 생각한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참여하라고 선언해놓았다.

이제 와서 집회일을 바꿀 수도 없고.

다행히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등산을 마치고 뒤풀이 없이 그냥 간다면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오전에 등산 행사를 끝마치게 하거나.

‘그게 좋겠군. 오전에 끝마치도록 하자.’

그걸 어떻게 서유림 마음대로 하느냐고?

‘다 방법이 있지. 후훗.’

잠시 생각을 마친 서유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대신 당일 아침에 차 좀 보내주세요. 요즘 운전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말이죠.”

“아하하. 그······ 그러지.”

한상민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차까지 보내줘야 하다니.

‘일단 유진그룹 회장만 되고 보자. 그러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한상민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점심도 제법 배불리 먹었는데 뱃속도 어딘가 모르게 허한 느낌이었다.

요즘 들어서 몸이 이상하긴 했는데, 오늘따라 몸이 더욱 안 좋았다.

‘씨발, 보약 한 첩 지어먹어야겠군.’

식당을 나섰다.

그런데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상민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서유림 때문에 속이 꽉 막힌 것 같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우는 놈 뺨 때려준다고 식당 바닥이 분통 터뜨릴 구실을 만들어주는 것 겉았다.

“아오~~~ 씨발, 성질나! 왜 여기만 오면 이래? 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 식당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사장새끼 나오라고 해!”

한상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친 사람처럼.

식당 종업원들이 깜짝 놀라서 우르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손님.”

종업원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어서 한상민을 일으켜주려고 했다. 한상민이 그런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놔, 씨발. 내 몸에 손 대지마. 이 개새끼들아!”

대신 장성식이 한상민을 잡아서 일으켜주었다.

그런데 한상민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장성식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것도 한상민의 몸 위로.

“어이쿠! 죄송합니다, 실장님.”

서유림도 얼른 다가가서 장성식과 한상민의 팔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음식 잘 먹고 왜들 그러세요?”

“아, 씨발!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수가 없어? 아우, 허리야!”

자정 무렵. 마태수의 사무실.

“이렇게 평생 노예로 살 거요?”

마태수의 물음에 김석균, 백종인, 정일돈 등의 장로들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했다.

특히 정일돈의 고민이 컸다. 정일돈은 장로들 중에서 가장 조심성도 많고 겁도 많았다. 때문에 웬만한 일이 아니면 앞으로 나서는 일이 없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주군에게 빼앗긴 돈이 벌써 40억 원이 넘었기 때문이다.

전 재산이 60억 원도 안 되는데 70% 가량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두 달이면 빈털터리가 되어 가족 모두가 길바닥에 나앉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용기를 내야 했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지 않은가? 장로들이 힘을 모은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어찌 되겠지. 모두가 함께 한 짓이니까.

그래서 ‘대마불사’라는 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은 장로들 모두의 동참을 이끌어내야 할 때였다.

“그럴 수야 없죠.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거의 전 재산을 빼앗겼소.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나요. 죽을 때 죽더라도 꿈틀이라도 한번 해보고 죽고 싶소.”

“사실 나도 마찬가지요. 웬 돈을 그렇게 계속 가져오라는 건지.”

“다들 마찬가지였군요. 나도 벌써 10억 원 가까이 뜯겼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장로들이 속으로만 참았던 불만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뜻이 잘 맞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장로도 있었다.

“성공할 수 있겠소? 주군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분이오. 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작당모의하고 있는 것도 다 보고 계실 수도 있소.”

마태수가 입꼬리를 깊이 말아 올렸다.

“아니, 절대 몰라. 알고 있다면 벌써 고통을 주고 문자를 날렸겠지. 그런 경험 없소?”

김석균, 백종인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태수이 말대로 뭔가 나쁜 일만 하면 기가 막히게 알고 뼛속까지 얼어붙는 한기의 고통을 주곤 했다.

만약 안다면 절대 그냥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주군도 분명히 사람이오. 자기 입으로도 그랬어. 자신이 신이 아니라 단지 신의 사자일 뿐이라고. 그러면 그놈도 칼에 제대로 찔리면 죽어.”

마태수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장로들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자꾸 결심이 한쪽으로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리 능력도 이젠 인간의 수준을 넘었소. 혼자서야 당해낼 수 없겠지만, 우리 넷이 힘을 모으면 그깟 한 놈 어쩌지 못하겠소? 게다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장로들의 눈빛은 어느새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태수의 말대로였다.

상대는 겨우 한 명뿐이다. 물론 뒤에 다른 세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집회장소에는 늘 수행도 없이 단신으로 나타났다.

네 명의 장로에 각 조직에서 최고의 정예로만 20명 정도 뽑아서 기습한다면 실패할 수가 없었다.

“난 주군에게 빼앗긴 돈만 60억 원이 넘소. 다들 최소 30억 원 이상 빼앗긴 것으로 알고 있소. 그걸 다시 되찾는 거요. 조직도 되찾고. 목숨을 걸어볼만 한 일 아니오?”

“계획은 있소?”

마태수가 여유를 보여주듯 가볍게 웃어주었다.

“주군은 늘 집회장소 안쪽 문을 이용하지. 다들 알 거요. 그곳이 사람을 숨겨놓기 얼마나 좋은 장소인지. 그 정도면 이번 집회일을 주군의 제삿날로 만들 수 있지 않겠소?”

장로들이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좋소. 나는 하겠소.”

“나도 하겠소.”

“씨발, 해봅시다.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