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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121화 (121/196)

# 121

이제 갑을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시나? (2)

설마 헛것을 본 건가?

요즘 이것저것 신경도 많이 쓰서 그런지 눈이 가끔 침침하긴 했다.

한상민이 손으로 눈을 비벼서 시야를 맑게 하고는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테스트 결과지에는 여러 약물에 대한 검사결과가 적혀있는데 모든 항목에서 ‘음성’ 판정이 나왔다. 한상민이 이온음료에 첨가했던 스테로이드계열 약물에 대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한상민이 장성식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장성식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귀신이 곡할······.”

“시끄러워, 새끼야. 분명히 내가 직접 넣었어. 그리고 그 새끼가 마셨어. 내 눈으로 직접 봤다고. 그런데 어떻게 음성이 나와?”

게다가 생수까지 마셨다. 이건 있을 수 없는 결과였다.

“혹시 테스트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건 아냐?”

“저도 그 점이 의심되어서 거듭 확인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한상민은 눈앞이 갑자기 침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왔다.

현기증이었다.

요즘 들어서 이런 증상이 자주 나타났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많이 망가진 듯했다.

특히 서유림을 만나고 나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서유림 그놈이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라는 증거였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픽 쓰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여튼 나하고는 안 맞는 놈이라니까! 개새끼!’

하지만 마음 편히 쓰러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그룹의 비자금을 잔뜩 빼돌렸는데, 상금에 내기 금액까지 지급하고 나면 그 돈조차도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살아날 구멍이 있었다.

서유림이라는 탈출구였다.

이제 서유림은 MAN FC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흥행가드가 되었다. 밀코 그로캅의 인기를 가뿐히 뛰어넘을 것이다.

게다가 계약기간을 무려 3년으로 잡지 않았는가? 잘만 활용하면 그깟 25억 원 정도는 금방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괜찮아. MAN FC 흥행이 먼저야.”

한상민이 애써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장성식의 표정이 여전히 눈에 거슬렸다. 자세도 여전히 죄 지은 사람 같았다.

“왜 그러고 있어? 사람 불안하게.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봐.”

하지만 장성식은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입술을 다시 열었다.

“저기······ 서유림 선수 말입니다.”

“서유림이가 뭐?”

한상민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이미 아는 이야기를 또 꺼내서 스트레스 받게 한다면 제아무리 장성식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따끔하게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윗 사람을 모신다는 놈이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런데 장성식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계약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뭐?”

한상민이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계약기간을 분명히 3년으로 책정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성식이 그게 아니라는 듯 주춤주춤 서류를 보여주었다.

서유림과 MAN FC간의 계약서 사본이었다.

한상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계약서가 무려 일곱 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부분은 글씨가 깨알처럼 작아서 읽기도 힘들었다.

계약 상대자가 검토하기 힘들게 만들기 위한 일반적인 술책이었다. 그래야 곳곳에 숨어있는 독소조항을 못 보고 그냥 지나칠 테니까.

그러면 그 조항으로 선수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방식이다.

그런데 막상 한상민이 검토하려고 하니 그 또한 짜증이었다.

“씨발, 지금 나보고 이걸 다 읽으라는 거야?”

장성식이 얼른 계약서를 들추었다. 그러자 한상민이 꼭 읽어야 할 부분이 눈에 띄었다.

초록색 형광펜으로 강조된 부분이었다.

[······을은 경기 7회 이상 또는 3년의 약정기간을 모두 이행해야······]

“이게 뭐 어떻다고?”

얼핏 보니 한상민이 초안을 만들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장성식이 ‘또는’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부분이 원래는 ‘5회 이상과 3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유림이 계약 과정에서 ‘7회 또는 3년’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제야 한상민이 입을 떡 벌렸다.

“······아! 또는!”

그러면 굳이 3년을 채우지 않아도 7회의 경기만 치르면 계약기간이 자동으로 종료되게 된다.

그런데 서유림이 벌써 7경기를 치렀나?

한상민이 가만히 따져보았다.

11월에 열린 42대회 한 번, 토너먼트에서 64강전, 32강전, 16강전, 8강전, 준결승전, 그리고 결승전.

“이런 씨발! 예선전을 제외하고도 딱 일곱 번이네!”

“서유림이 인심 쓰는 척하면서 경기 수를 7회로 늘린 것에도 그런 계산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토너먼트를 우승으로 마치고 나면 일곱 번의 경기를 모두 치르게 될 테니까요.”

‘정말 그러네! 씨발!’

서유림에게 완전히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서유림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토너먼트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의 우승을 100%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만큼 자신의 실력을 자신했다는 말도 되고. 또 실제로 그런 실력을 갖춘 놈이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유림을 잡아야 한다. 무조건 잡아야 해. 그래야 MAN FC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다.’

“서유림이 어디 있어? 당장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장성식이 급히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한상민이 다급히 장성식에게 당부사항을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서유림을 여러 차례 호출했지만, 이런 당부사항을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롭게 계약서 써야 하니까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장성식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서유림이 기본 계약서를 살폈다.

한국어로 번역해놓은 것도 있지만, 서유림은 영어로 된 원본계약서를 살폈다. 설마하니 번역을 엉뚱하게 해놓지는 않았겠지만, 원본과 번역본은 사소한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서명은 어차피 원본계약서에 한다. 이제 영어도 한글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번역본을 볼 이유가 없었다.

그 모습에 알렉스 윌리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영어를 생각보다 잘하시는군요.”

통역이 함께 왔지만, 처음 몇 마디를 통역한 후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기만 했다. 서유림의 영어가 통역만큼이나 능숙했기 때문이다.

“시간 날 때마다 공부했습니다.”

서유림이 계약서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계약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총 4경기.

기본 대전료 8천 달러에 승리수당 8천 달러. 승리할 때마다 대전료와 승리수당이 2천 달러씩 인상된다.

UFC가 신인들과 계약할 때 내거는 일반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계약서 검토를 마치고 윌리스를 바라보았다.

“금액적인 요소는 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옵션을 걸고 싶군요.”

“어떤 옵션인가요?”

“나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많은 경기를 하고 싶습니다. 일단 이번 UFC 도쿄 경기에서 쿵리 선수의 부상으로 후꾸다 선수의 대결상대를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절 그 자리에 집어넣어주세요.”

순간 윌리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쿵리의 대체선수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몇 후보를 꼽아보긴 했지만, 너무 강하거나 혹은 너무 약했다.

그런데 서유림이라면 적당할 것 같았다. MAN FC 토너먼트 무제한급에서 우승한 사실이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크게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후꾸다보다는 서유림이 아시아 시장을 넓히는 데 더욱 매력적인 카드일 수도 있었다.

“화이트 회장님께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달라고 요청해보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가능한 한 모든 경기에 나서고 싶습니다. 1년에 다섯 경기라도 좋습니다. 제가 원하고 특별한 부상도 없다면 3개월 이내에 경기를 잡아준다는 항목도 넣어주세요.”

“그건 의료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희 UFC는 1년에 두세 경기 뛰도록 하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서유림 선수가 흥행성을 갖추고, 몸 관리도 잘 한다면 원하시는 대로 1년에 4경기도 뛸 수 있을 겁니다.”

서유림은 그 외에도 몇 가지를 추가로 제안했다.

구체적인 계약 시점까지도 언급했다.

“만약 계약조건이 맞는다면 6월 30일 쯤에 계약서에 도장 찍고 싶습니다.”

“UFC 도쿄대회 일주일 전이로군요. 그렇게 시간을 촉박하게 잡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유? 물론 있지. MAN FC 43경기가 6월 17일에 있거든.

그때 권이슬과 붙어서 MAN FC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딴 후에 UFC로 진출한다는 게 서유림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MAN FC 43경기가 있고 두 달도 안 돼서 UFC 도쿄대회가 열릴 테니까.

서유림이 UFC 도쿄대회 두 달 전에 경기를 갖는다고 하면 기를 쓰고 만류할 게 분명했다.

“한국 팬들을 생각해서입니다. 제가 UFC와 계약하면 MAN FC를 배신했다며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UFC와 계약하자마자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실망할 틈도 없이 응원부터 해줄 것입니다. 그게 사람 심리 아니겠습니까?”

“아! 거기까지 생각하시다니······. 정말 생각이 깊으시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조만간 메디컬테스트가 진행될 겁니다. 그 결과를 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그건 곤란하다. 메디컬테스트는 무조건 6월 17일 경기가 끝난 뒤에 받아야 한다.

“아뇨. 메디컬테스트도 6월 30일쯤에 진행하죠. 그 전까지는 UFC와 어떤 사전접촉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결과를 알려드리죠.”

윌리스가 통역 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유림도 다시 강성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강성체육관은 관원들로 가득했었다. 관장이 관원을 너무 많이 받아서 서유림이 운동할 공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달을 끝으로 체육관을 옮길 계획이니까.

배복성의 복성체육관이 확장이전을 마치고 드디어 개관하게 되었거든.

그러면 강종범, 도상국 등과 함께 복성체육관에서만 훈련하게 될 것이다.

서유림이 훈련을 위해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데,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한상민의 비서 장성식이었다.

서유림의 입꼬리가 씰룩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도핑테스트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

서유림이 모른 척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서유림입니다.”

- 오랜만입니다. 저 장성식입니다. 한상민 실장님께서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요.

순간 서유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딘가 모르게 사기꾼 냄새가 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지어지는 표정이었다.

‘장 부장이 갑자기 웬 존댓말이지? 무슨 꿍꿍이야?’

도핑테스트 결과 때문에?

아니다. 그것 때문에 장성식이 갑자기 존댓말을 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냥 ‘이상하네!’ 또는 ‘재수 없네!’ 하고 말 일이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슬쩍 성질을 건드려볼까? 그러면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꿍꿍이를 발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쿠야. 우리 장성식 부장님께서 어쩐 일로 저한테 그렇게 자세를 낮추세요? 겨우 토너먼트 우승 한 번 했다고 그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잖아요. 설마 지금 무릎 꿇고 전화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서유림의 도발에 장성식이 ‘끙’ 하는 소리를 살짝 흘렸다.

하지만 도발에 넘어오지는 않았다. 마치 기계음처럼 무미건조하게 자신의 할 말만 했다.

- 지금 본사 감찰실장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쁘신 일 없으면 곧장 와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는 못 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아쉬울 게 전혀 없거든.

그렇게 바쁘면 그쪽이 나한테 오시던가.

“어쩌죠? 제가 오늘은 시간이 안 나는데.”

장성식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하지만 잘 참아냈다. 역시 대기업 총수 후보의 비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 그럼 언제쯤 시간이 나시겠습니까?

“글쎄요. 내일 오전 일찍 정도라면 잠깐 시간을 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확실히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그때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제가 요즘 갑자기 바빠졌거든요.”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고 싶다면 자신의 시간에 맞춰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겠지. 당연히 상대방의 시간에 맞춰줘야 하는 거라고.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건 당연한 일 아냐?

물론 그렇게 하고도 못 만날 수도 있는 거고.

- 알겠습니다. 실장님께 그리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장성식의 목소리가 아주 가늘게 떨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서유림의 예리한 감각은 그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의 떨림이겠지.

서유림의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짙게 걸렸다.

‘후훗, 어때? 이제는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확실히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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