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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120화 (120/196)

# 120

이제 갑을관계가 확실히 정리되시나? (1)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거 얘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럼 내가 아리아나를 죽일 수도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말이 되잖아.

그런데 아리아나는 그런 말을 하면서 저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야?

“그러면 아리안을 독립시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냐?”

아리아나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리안도 저도 그깟 목숨에 연연하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정령계의 안정이죠. 그게 정령신의 후보 된 자의 마음가짐이에요.”

“그래도…….”

“제게 다 생각이 있어요. 모든 일이 순리대로 돌아갈 거예요. 그러니 그 얘기는 더는 하지 말아요. 저 믿으시죠?”

어라! 저건 내가 아리아나한테 수시로 물었던 질문인데.

물론 아리아나를 믿지. 그리고 믿어야겠지.

“알았어. 그 얘기는 더는 하지 않는 걸로. 그나저나 아리안도 고집이 세네. 내가 체력을 조금은 나눠줄 수 있는데.”

“아리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령왕이 되면 자연력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금방 체력을 회복할 거예요. 그보다는 빨리 마을을 둘러봐요. 요정들을 구해야죠.”

“그렇군.”

아리아나와 함께 마을 곳곳을 누볐다.

흩어져서 처리하면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함께 움직이는 게 나았다. 마귀는 모두 처리했지만 마계의 존재가 마귀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만약 마족이 하나라도 숨어있다면, 그리고 그런 존재와 홀로 맞서게 된다면 정말 위험할 테니까.

“어! 저기……!”

서유림이 요정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요정은 몰골이 처참했다.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상처가 무척 심했는데, 그런 꼴로 나무 같은 곳에 온몸이 묶여있었다.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이 그동안 봐오면서 ‘예쁘다.’라고 느꼈던 요정들은 하나같이 옷이 벗겨져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벌써 마귀들에게 겁탈을 당한 거겠지. 그런 요정이 서른 명도 넘었다.

그렇지 않은 요정들도 신세는 다르지 않았다. 다들 처참한 몰골로 나무에 묶여있었다. 마치 다음에 겁탈당할 차례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고 자살을 기도하거나 하는 요정은 없었다. 눈물을 흘리는 요정도 없었다.

마치 ‘이 정도는 이겨내야 요정이지.’라고 말하듯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그렇게 살아남은 요정들이 모두 마을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대략 100명쯤 되었다.

요정들의 연령대를 확인한 서유림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어린 요정과 늙은 요정은 모두 죽인 모양이군!’

한마디로 성적 매력이 있는 요정만 겁탈을 위해서 살려두었던 것이다.

마족이나 마귀가 어떤 종족인지를 뚜렷이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곳을 떠나야 해요.”

아리아나가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어떤 요정도 따지거나 되묻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아나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야죠. 정령신의 후보가 이곳에 있다는 게 알려진 이상 마족의 공격은 계속될 테니까요.”

“해가 뜨는 방향으로 한 달쯤 걸어가면 요정의 도시가 있어요. 그곳의 신성력이라면 정령신의 후보를 지킬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그곳으로 가요.”

단결력이 정말 좋군. 요정의 특징인가?

의견이 금방 모아졌다.

행동도 빨랐다. 다들 흩어져서 몇 벌의 옷과 배낭, 칼 같은 것만 챙기고 다시 모였다.

다들 정령의 힘을 사용했는지 요정들의 외모는 어느새 깔끔하게 변해있었다. 조금 전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럼 출발해요.”

함께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요정들은 아리아나를 에워싸듯 무리를 이루었다. 요정은 본능적으로 정령신의 후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 듯했다.

덕분에 서유림도 덩달아 요정들의 보호를 받는 식이 되었다.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사실 아리아나에게 묻고 싶은 게 무척 많았다.

정령계에서는 체력도 순발력도 매우 높기 때문에 이 정도 속도로 달리면서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했다.

“아리아나. 그럼 난 이제 계약된 정령이 없는 건가?”

“그렇지 않아요. 커다란 하나를 잃은 대신 작은 여럿을 얻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작은 여럿?”

“아리안이 거느렸던 하위정령들이 모두 정식 정령이 되어 유림씨에 예속되었을 거예요. 정령 정보를 확인해보세요.”

서유림이 망막에 새겨진 정령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휘파람 : 최하급정령 27레벨, 교감 27%]

워리 : 중급정령 174레벨, 교감 5%

블루 : 중급정령 107레벨, 교감 5%

그린 : 중급정령 102레벨, 교감 5%

레드 : 하급정령 79레벨, 교감 5%

…….

조금 바뀌긴 바뀌었다.

“아리안은 사라지고 휘파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네. 교감이라는 수치도 새로 생기고.”

“기존까지는 아리안이 마스터가 되어 하위정령들과 교감을 나누었어요. 유림씨는 그 교감을 이용한 것뿐이고요. 하지만 이제는 아리안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교감을 이루게 된 거죠. 이제는 유림씨가 정령들의 마스터에요.”

정령들의 마스터라. 그럼 교감은 당연히 강해질 수밖에 없겠군.

게다가 교감이 가장 강한 정령이 아리안을 대체해서 서유림을 보좌한다.

그래서 레벨 높은 워리를 제쳐두고 최하급정령인 휘파람이 메인에 위치해있는 거로군.

그런데 이렇게 보니 작명센스가 정말 엉망이긴 엉망이다. 짓기 편하고 부르게 쉽게 한답시고 저 꼴로 이름을 지었다.

정령들에게 기분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정말 많이 원망했겠다.

“그런데 휘파람은 말을 못 하잖아.”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상급정령으로 성장시키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아리안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는 불가능할 거예요.”

갑자기 아리안이 그리워진다.

정령계에서는 아리아나가 옆에 있으니 못 느끼겠지만, 인간계로 돌아가면 아리안의 빈자리가 무척 크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아리아나의 말을 들으니 그 역시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리안과의 교감도 여전히 높을 거예요. 원하면 언제든지 교감을 이루고 도움을 청할 수 있어요. 그렇게 자주 교감을 나눠야 관계도 계속 유지될 거고요.”

“오, 그래? 그럼 인간계에서 자주 불러야 하겠군.”

“그럼 아리안도 유림씨를 자주 불러서 도움을 청하겠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저보다 아리안과 더 가까워질 수도 있고요.”

한마디로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거잖아. 내가 불러서 도움을 청하면 아리안도 그만큼 내게 뭔가를 원하게 될 거라는.

그런데 아리아나!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에이, 아니겠지. 질투는 아리아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니까.

그래도 마음이 조금 무겁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우리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야? 나한테는 아리아나 뿐이라는 거 알지?”

서유림의 말에 아리아나가 피식 웃었다.

왠지 모르게 안도의 웃음 같다. 그럼 살짝 질투했다는 얘긴데.

그거, 기분 나쁘지 않은걸. 후훗.

어쨌건 아리안과의 교감도 적당히 유지해야겠다. 그 어떤 정령도 정령왕씩이나 되는 아리안만큼 강력하진 못할 테니까.

아리아나는 그것 외에도 제법 많은 정보를 가르쳐주었다. 2차 성장판을 열게 됨으로서 새롭게 얻은 능력들이었다.

그중 가장 귀에 들어오는 것은 정령의 독립이었다.

“유림씨가 원한다면 어떤 정령이건 유림씨의 의지만으로 독립시킬 수 있어요.”

“정령의 독립? 정령을 독립시켜서 내게 득 될 게 있을까?”

“대신 새로운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요. 정령은 열 명까지만 거느릴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런 게 있었군.

한마디로 이런 것이다.

부모님이나 임채모와 계약된 정령은 서유림이 굳이 거느리고 컨트롤할 이유가 없다. 독립시켜도 각자의 계약자를 위해 제 역할을 할 테니까.

그러면 세 명의 정령을 다시 소환하여 활용할 수 있겠지.

그건 제법 매력적인 일이었다.

‘2차성장판을 열고나니 좋은 게 많긴 하군. 후훗.’

* * *

“회장님께서? 그래, 알겠어.”

한상민이 흡족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행복한 고민을 하듯 손으로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께서 등산을 위해 귀국하신다고?’

시기가 너무 좋았다. MAN FC 토너먼트가 연일 대박 행진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이었다.

물론 돈은 조금 많이 들었지만, 사업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큰 걸 얻으려면 그만큼 투자도 과감하게 해야 한다.

게다가 이건 유진그룹 후계자 자리가 걸린 싸움이 아닌가?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들이부어야 한다.

‘이참이 회장님 눈도장을 좀 더 확실하게 받아놓아야 하는데.’

문득 서유림이 생각났다.

이번 등산에 서유림을 데리고 가면 회장님 기분도 더욱 좋아질 것이다.

도핑테스트 결과는 그 후에 발표해야 하겠지?

‘후훗,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고 있군.’

한상민의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장성식 부장이 감찰실장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얇은 서유봉투 하나가 들려있었다.

“실장님 도핑테스트 결과 나왔습니다.”

“아, 그래? 어서 줘봐.”

한상민이 반색하며 서둘러 손을 뻗었다.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소식이었따.

그런데 장성식의 표정이 눈에 거슬린다.

한상민이 도핑테스트라는 말에 반색하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러면 이 즐거운 기분을 한상민과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장성식이 우물쭈물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도핑테스트 결과가…….”

순간 한상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결과가 뭐? 왜? 설마 둘 다 깨끗하게 나온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만…….”

한상민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서유림의 도핑테스트 검사결과가 깨끗하게 나올 수가 없다. 이온음료수 마시는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런데 장성식의 저 표정은 대체 뭐야?

“왜? 설마 밀코 그로캅도 뭐가 걸린 거야?”

장성식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순간 뒷골이 뻐근해왔다.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큰 타격이었다.

밀코 그로캅이 UFC 등의 메이저 단체와 다시 계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참에 MAN FC에 완전히 눌러 앉힐 계획이었다.

그러면 최소한 3~4년 정도는 오이르꺼러, 최흥만, 마이티 무어 등과 황금의 흥행카드를 구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약물검사 양성반응이라니.

어쩐지 지난 경기에서 몸놀림이 지나치게 경쾌하다 싶었다. 마치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한 느낌이었다.

‘이 일을 어쩌지?’

밀코 그로캅을 버려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밀코 그로캅은 여전히 슈퍼스타니까.

게다가 격투계에서 약물 사용은 흔한 일이었다. 다만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이다.

팬들도 그런 사실을 대충은 알고 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발각되면 타격은 크겠지.

하지만 깊이 반성하며 팬들 앞에서 머리 숙여 사죄하고, 봉사활동 좀 하고, MAN FC측에서도 도핑테스트를 강화하는 등의 대책을 꼼꼼하게 세운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이러면 서유림도 밀코 그로캅도 모두 실격처리다. 토너먼트 우승자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러면 우승상금 15억 원도 세이브 되겠지.

가뜩이나 자금이 쪼들려 죽겠는데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게다가 서유림에게서 10억 원도 받아낼 수 있다.

그 돈 중 일부를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으로 기탁하면 이번 약물사태는 깔끔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상민이 심각해졌던 표정을 풀고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대책 잘 세워서 수습해야지.”

그런데 장성식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두 손을 모으고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양심고백하고 있는 듯했다.

한상민이 피식 웃으며 장성식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열 포졸이 도둑 한 명 막을 수 없다고 했어. 밀코 그로캅이 약물 한 게 장 부장 잘못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서류봉투를 열었다.

맨 위에 서유림의 검사결과가 있었다.

순간 한상민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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