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19화 (119/196)

# 119

또 다른 정령신의 후보 (1)

형태는 순식간에 또렷해지고 견고해졌다.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완전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와!’

하마터면 아리아나 앞에서 감탄사를 터뜨릴 뻔했다.

아리아나보다 더 예쁜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아리아나가 더 예쁠 것이다.

다만 아리아나는 정령계에서 워낙 오랫동안 봐와서 익숙해져있다. 밤에 잘 때마다 끌어안았고 키스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런 익숙함이 아름다움을 흐리게 만드는 거겠지.

반면 아리안은 새로움이라는 신선함을 장착해서 더 예쁜 것처럼 보이는 것이고.

어쨌건 예쁘다는 단어를 백 번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외모다.

하지만 왠지 정은 가지 않는다. 얼음덩이 같다고 해야 할까?

아리아나는 보는 순간 따뜻함이 느껴진다. 정이 많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슬픈 드라마를 보면 금방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다.

그에 반해 아리안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유난히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 때문이 아니었다. 눈빛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도 지나칠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평생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말을 걸어도 ‘예’ 또는 ‘아니요’로만 짧게 대답하고 말 것만 같다.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아리안이야?”

“네, 유림씨. 제게 자유를 주어서 감사드립니다.”

말투는 곱네. 하지만 그런 말은 살짝 웃어주며 해야 어울리는 거라고. 고개나 무릎을 살짝 숙여주는 것도 좋고.

그렇게 로봇 같은 표정으로 말하니까 너무 어색하잖아.

“시간이 없어요. 이제 움직여야 해요.”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재촉했다.

그러게.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리자.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마족이나 마물, 요정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작전을 세우기 힘들어.”

아리안은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계획을 세우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신 아리아나가 나서주었다.

“각자의 장점을 살려요. 유림씨와 제가 기존처럼 공격하고, 아리안이 정령마법으로 우리를 지켜주는 식이에요.”

“아리안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지켜줄 수 있는데?”

“아리안이 정령마법으로 실드를 쳐주면 마족의 무리에게 공격을 받아도 안전할 거예요.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잠깐 동안은 의지해도 돼요.”

아리아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아. 그럼 가볼까?”

서유림이 앞장섰다. 아리아나가 그 뒤를 바짝 따랐고, 아리안이 맨 뒤에 섰다.

“먼저 촌장님 댁으로 가요.”

“그러지.”

요정마을에 들어선 서유림이 중앙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그런데 얼마 달리지 않아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자 요정들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갑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요정마을 주민들은 아리아나만 보면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다들 호감의 웃음을 보여주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인 남자 요정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있었다.

게다가 눈빛이······.

“눈이 왜 저렇게 빨간 거지?”

“마신에게 정신을 제압당했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요정이 아니라 마귀에요.”

마귀는 마물과 동급이었다. 다만 마령에게 혼을 잡아먹혀서 마계의 무리로 변한 요정을 마귀라고 부를 뿐이었다.

즉 마계는 마신 아래로 마왕, 마족이 있고, 그 아래로 마귀와 마물이 있는 셈이다.

정령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령신 아래로 정령왕과 요정이 있고, 그 아래로 요물과 요괴가 있다.

아리아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마귀로 변한 남자요정들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다섯 명이나 모였다.

오직 마귀로 변한 남자요정뿐이었다. 여자요정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건가?

아직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족이나 마귀가 요정을 잡거나 공격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뿐이니까.

겁탈.

물론 세력이 엇비슷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 그땐 여자요정이라고 해도 일단 죽이고 보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니다. 분명 집안 어딘가에 묶어두었겠지.

그러고 보니 지금도 다들 아리아나와 아리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저들의 아리아나와 아리안을 향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빤했다.

더 모일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이왕이면 각개격파 하는 게 이쪽에 유리할 테니까.

서유림이 워리를 비롯한 하위정령들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하위정령들과 함께 요정(이제는 마귀라고 불러야 하겠지)들을 향해 뛰었다.

“엄호해줘?”

아리아나가 정령을 소환하는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면서 마귀들의 발이 갯벌에 빠진 것처럼 땅속으로 쑥 들어갔다.

발목까지 붙잡혔으니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젠장, 아니군!’

마귀들이 끙끙대며 몇 번 힘을 쓰자 땅이 갈라지면서 발이 쑥쑥 빠졌다. 그리고는 아리아나와 아리안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기괴한 소리와 함께.

크르르.

그때마다 아리아나가 다시 정령을 소환해서 마귀의 발목을 잡아챘다.

서유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선두에 선 마귀를 향해 카리스의 정령검을 휘둘렀다.

마귀도 곱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까짓 상처는 감수한다는 식으로 수비는 완전히 포기한 채 서유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과연 ‘그깟 상처’에 머물까? 서유림의 실력은 요정 중에도 성취를 이룬 자가 거의 없다는 2차 성장판을 연 사람이라고.

게다가 이 검은 무려 카리스의 정령검이라고.

서유림이 믿기지 않은 순발력을 발휘하며 마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귀가 송곳 같은 손톱으로 할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대신 카리스의 정령검이 마귀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마귀의 목이 뎅강 잘려져 나갔다.

‘한 놈 해치우고!’

서유림에 의해 마귀 하나가 쓰러지자 다른 마귀들이 공격대상을 바꾸었다. 일단 서유림부터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서유림도 마귀 무리를 향해 뛰었다.

아직은 겨우 네 명이다. 하지만 곧 다른 마귀들도 몰려올 것이다. 요정마을에 촌장까지 포함해서 남자가 17명 있었으니, 마귀의 수도 딱 그쯤일 것이다.

카리스의 정령검이 서유림의 손에서 춤을 추었다. 수많은 마물을 사냥하며 갈고 닦은 검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카리스의 정령검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마귀들은 얼어붙었다.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졌다.

마귀는 마족과 달리 재생력이 없었다.

그러니 상대하기가 너무 쉬웠다. 이런 상대라면 굳이 아리아나의 도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용은 비명횡사의 지름길이겠지.

그러는 사이 다른 마귀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왔다.

순식간에 서유림을 에워싸고 송곳 같은 손톱으로 공격했다.

서유림이 빠르다고 하지만 사방에서 그어오는 손톱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따. 결국 마귀가 휘두른 손이 유림의 어깨를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서유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젠장! 벌써 부상을 당하면 안 되는······응?’

분명 어깨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은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통증도 전혀 없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아리안의 정령마법!’

아리안이 실드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 덕분인 듯했다.

그렇다면 아리안이 힘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다.

서유림의 움직임이 더욱 과감해졌다. 카리스의 정령검도 더욱 화려하게 춤을 췄다.

아리아나도 빛의 정령과 땅의 정령, 결속마법 등을 적절히 섞어가며 서유림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마귀들의 목이 뎅강뎅강 떨어졌다. 서유림도 방어를 포기한 채 공격했기 때문에 온몸을 공격받았지만, 아리안의 정령마법 덕분에 피해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마귀의 목이 뎅강 잘려나갔다.

그러자 아리안이 풀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서유림이 얼른 달려갔다.

“아리안,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다는 사람이 그렇게 온몸을 떨고 있어?

아무래도 힘만 강할 뿐 지속력은 많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정령마법을 무리하게 펼치면서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다.

겨우 몇 번이나 공격받았다고 이렇게 마력이 떨어져?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해도 되었다.

실드라는 것이 공격을 받을 때만 잠깐 만들었다가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언제 어떤 공격에 상처를 입을 줄 모르니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속해서 실드를 만든 채 유지해두고 있어야 하겠지.

그러니 설령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아리안은 계속해서 마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 막 정령왕이 되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아직 눈도 못 뜬 최하급 정령왕인 셈이지.

그러고 보니 고생 많이 했네.

문득 아리안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체력을 좀 나눠줄까?”

설마 이 말을 엉뚱한 의미로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아리안의 입술이 탐나서 그러는 것 아냐. 나 그렇게 변태 같은 놈은 아니라고.

“괜찮아요. 조금 쉬면 금방 회복될 거예요. 전 잠시······.”

아리안의 모습이 다시 안개처럼 흐려졌다. 아리안의 안개는 마귀들의 시체 위를 훑고 지나다녔다. 그러자 마귀들의 시체가 순식간에 미라처럼 말라버렸다.

그런데 그 위로 작은 양피지 같은 것들이 하나씩 남겨져 있었다.

“저것들은 뭐지?”

“아리안이 유림씨를 위해 남겨주었네요. 가서 취하세요.”

마력의 서였다.

고맙기도 해라.

서유림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력의 서를 취했다. 열일곱 명으로부터 마력의 서를 취하니 무려 199나 되는 마력이 순식간에 상승했다.

덕분에 마력은 613이 되었다.

“어라! 그런데 이건 뭐지?”

마지막 마귀로부터 마력의 서를 취하려고 하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마력의 서는 낡은 양피지 같은 가죽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잔뜩 새겨져있다. 무늬가 크고 촘촘하고 복잡할수록 마력이 높았다.

그런데 이 마력의 서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없었다. 대신 색깔이 알록달록했다. 게다가 이리저리 시선을 옮길 때마다 색깔도 달라졌다. 꼭 살아있는 카멜레온의 피부가죽 같았다.

“아리아나. 이게 뭔지 알아?”

“어떤 것 말씀이세요?”

아리아나가 가까이 다가와서 보았다. 이상한 마력의 서를 보고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어머 포이즌 마법서네요.”

“그게 뭔데? 좋은 거야?”

“포이즌 계열의 마법서에요. 마력 500을 넘으면 익힐 수 있어요. 익히면 네 가지 계열의 포이즌 마법을 익힐 수 있어요. 그래서 레인보우 마법서라고도 불러요.”

오! 그럼 좋은 거잖아.

게다가 이젠 마력도 600을 훨씬 넘었다. 서유림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익힐 수 있다.

아리안이 준 선물인데 거절하면 안 되겠지.

“이것도 마력의 서처럼 익히면 되는 거야?”

“네.”

서유림이 손을 뻗어서 포이즌 마법서도 흡수했다.

마법서가 흡수되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마법 사용법과 포이즌의 종류가 배워졌다. 마법서 자체에 사용설명서와 카탈로그 같은 것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레이 포이즌은 대상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는 독이다. 때문에 그레이 포이즌에 중독되면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게 한다.

레드 포이즌과 블루 포이즌은 대상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다만 하나는 고통이 쉬지 않고 지속되고, 다른 하나는 1시간마다 한 번씩 또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하는 식의 간헐적은 고통을 준다는 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블랙 포이즌은 대상을 환각상태에 빠뜨린다. 블랙 포이즌에 약하게 중독되면 몽롱한 상태가 되고, 강하게 중독되면 기억을 잃기도 한다.

모든 마법은 사용자의 의지로 강약을 조절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어떤 계열의 포이즌이건 한번 중독되었다가 해독이 되면 그 계열의 포이즌은 물론이고 다른 계열의 포이즌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상자의 몸이 더욱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 마치 보약을 먹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효과는 아주 미미하지만.

“오, 이거 좋은걸! 고마워 아리안.”

아리안이 서유림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나타날 때처럼 다시 흐릿한 안개로 변하여 사라졌다.

이제 다 정리되었군.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아리안을 독립시키자마자 ‘아차!’ 하며 생각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안이 듣는 곳에서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던 질문이었다.

“아리아나. 아리안도 이제 정령신의 후보가 된 게 맞지?”

“맞아요.”

“그럼 정말 이상하네. 아리아나도 정령신의 후보고, 아리안도 정령신의 후보고. 정령신은 오직 한 명만이 될 수 있는 것 아냐?”

아리아나가 고개를 돌려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아리아나의 눈빛이 무척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아요.”

순간 서유림은 가슴이 뜨끔했다.

아주 오래전에 아리아나로부터 정령신의 결정 과정을 전해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젠가는······?”

서유림은 거기까지만 하고 말을 멈추었다.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리아나가 대신 뒷말을 이어주었다.

“둘 중 하나는 죽겠죠.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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