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18화 (118/196)

# 118

어디서 꼼수를 부려? (3)

관중석에서 ‘우-’ 하는 야유가 쏟아졌다. 이미 8강전을 마치고 도핑테스트를 받았는데 또 받아야 하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만들어졌다. 게다가 사회자 역시 한상민에게 지시받은 사항이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에서 치러지는 경기이다 보니 모든 것이 한상민의 뜻대로 착착 맞아 돌아갔다.

사회자가 서유림에게 물었다.

“도핑테스트 응하시겠습니까?”

서유림이 슬쩍 한상민을 바라보았다.

한상민이 입꼬리를 깊게 말아서 웃고 있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웃음이었다.

‘후훗, 내가 전혀 눈치 못 채고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군.’

사실은 일부러 당해준 것이다.

한상민의 뒤통수를 후려쳐주기 위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상민이 다른 이상한 뒤통수를 꾸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건 또 무슨 말이냐고?

만약 서유림이 이번 뒤통수에 당해주지 않는다면 한상민이 ‘에이, 실패했네.’ 하고 그냥 포기할까?

저놈이 얼마나 악착같은 놈인데. 어떻게든 짓밟겠다는 마음에 제2 제3의 뒤통수를 준비하겠지.

물론 쉽게 당할 서유림은 아니지만, 열 포졸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자칫 당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설령 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하고.

하지만 이렇게 당하는 척해주면 굳이 다른 뒤통수를 준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그런 위험성은 크게 줄어든다고 볼 수 있지.

후훗, 저 웃음이 당혹스러움으로 변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은데.

그러자면 며칠은 기다려야 하겠지?

“물론이죠. 얼마든지 응하겠습니다.”

서유림이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의료진이 기다렸다는 듯 케이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먼저 서유림의 팔에서 피를 뽑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밀코 그로캅의 피까지 뽑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밀코 그로캅이 깜짝 놀라서 팔을 감추었다.

의료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했지만, 밀코 그로캅은 한사코 팔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관중들이 ‘우-’ 하는 야유소리로 밀크 그로캅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밀코 그로캅도 피를 뽑히고 말았다. 밀코 그로캅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유림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움직임이 영상에서 본 거하고 완전히 다르더라니.’

“오빠의 승리를 축하하며, 지화자!”

서미진의 선창에 가족 모두가 술잔을 높이 들며 부딪쳤다.

“지화자.”

“캬아, 술맛 조오타! 아들. 한잔 더 따라봐라.”

아버지가 서유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서유림이 복분자주를 가득 따랐다.

벌써 여섯 잔째다. 예전 같았으면 진즉에 어머니의 불호령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게 술을 즐겼다.

안주는 황송하게도 참치 회였다. 그것도 일인분에 5만원이나 되는 고급 참치 회였다. 다행히 무한리필이었다.

그래도 1인분에 2만 원 넘는 고급 음식을 먹어보다니.

게다가 그걸 서유림도 아닌 서미진이 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미진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비싼 음식을 쏘는 거냐? 너 우리 몰래 아르바이트라도 했냐?”

“나 취직했잖아. 몰랐어?”

서미진의 깜짝 발표에 부모님이 눈을 크게 떴다.

“미진이가 취직을 해? 졸업도 안 했는데?”

그러자 서미진이 깔깔 웃었다.

“호호, 사실은 내가 오빠 매니저야. 이번 토너먼트에서 홍보비만 1억 원을 넘게 받았거든. 그래서 수고비 아주 쬐금 챙겼어.”

와, 저 불여우. ‘아주 쬐금’이래 무려 1천만 원이 넘는데.

그래도 밉지는 않다. 서미진이 보기보다 씀씀이가 알뜰하거든. 남들 다 있다는 명품가방 한번 욕심낸 적 없고, 화장품도 늘 저렴한 가격대에서만 고른다.

그러면서도 가족들한테는 이렇게 아낌없이 쓸 줄도 알고.

“앞으로도 오빠 매니저는 나야. 알겠지?”

“하는 것 봐서. 일단 오늘은 합격이다. 하하.”

가족들도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서유림은 늘 그랬던 것처럼 채희라와 만났다. 일주일만의 만남이었다.

서유림도 채희라도 원하는 것은 같았다. 곧장 모텔로 들어갔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막힌 봇물 터뜨리듯 욕정을 쏟아냈다.

한차례 격한 움직임을 멈추고 나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 * *

“아직 자요?”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서유림은 못 들은 체했다. 정령계로 들어오면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거든.

잠이 들 때도 물론 행복하긴 하지만, 그땐 수면마법 때문에 겨우 1분 정도밖에 즐길 시간이 없다.

하지만 아침시간에는 이렇게 버티고만 있으면 얼마든지 아리아나의 느낌을 즐길 수 있거든.

아리아나가 서유림의 품안을 벗어나려는 듯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서유림이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잠버릇인 척하면서 아리아나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아리아나의 얼굴이 서유림의 코에 닿을 정도로.

“풋!”

아리아나의 웃음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이런! 눈치 챘군.’

“다 알아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5분만.”

“그럼 혼자 누워 계세요. 전 스트레칭 좀 할게요.”

아리아나가 다시 서유림의 품안을 벗어났다.

혼자서 무슨 재미로 누워있어?

서유림도 아리아나를 따라서 일어났다. 함께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다. 아리아나처럼 정령 아리안의 도움을 받아서 목욕도 깨끗이 했다.

덕분에 조금 남아있던 아침의 졸음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가요.”

“마물사냥 더 안 하고?”

서유림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마굴로 들어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긴 하지만, 아직 식량도 물도 충분했다.

게다가 서유림이 정령계로 들어온 지 사흘밖에 안 되었다.

보통은 닷새 꼬박 채우고 요정마을에서 인간계로 복귀하곤 했는데.

“마물의 향기가 갈수록 강해져요. 아무래도 촌장님께 알려드리는 게 좋겠어요.”

하긴, 서유림도 마물의 변화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전에는 마굴 7층의 마물도 어렵지 않게 사냥했었는데, 지금은 마굴 3층의 마물들조차도 벅찬 느낌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마굴 1층의 마물도 버거운 상대가 될 것이다. 그 다음은 지상의 마물들 차례겠지.

“가자.”

아리아나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갔다. 곧장 요정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요정마을을 약 50m쯤 남겨두고 아리아나가 갑자기 서유림의 옷깃을 잡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재빨리 자세를 낮추었다.

서유림도 덩달아서 몸을 웅크렸다.

아리아나가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닐 테고.

서유림의 목소리가 저절로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왜?”

“마을에서 마기가 강하게 느껴져요.”

모든 요정마을은 정령계에서도 가장 신선한 장소에 속한다. 촌장의 집에 세워진 정령신의 제단에서 신성력이 뿜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마기가 가득하다고 해도 요정마을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력이 유지된다.

그런 곳에서 마기가 느껴진다고?

그 말은 제단의 신성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요정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물의 소굴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을의 요정들은? 촌장님은?”

“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남자들은 모두 죽거나 마귀로 변했을 거예요. 여자들은 사로잡힌 채 마물이나 마귀의 노리개가 되었을 거고요. 아니면 되고 있거나.”

되고 있거나?

“그럼 이렇게 숨어있을 시간이 없잖아. 구해줘야 하지 않겠어?”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서요?”

그러고 보니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요정마을에 사는 요정이 200명에 가까웠다. 그 많은 요정이 모두 당했다.

그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뜻이지.

그런데 겨우 둘이서 그들을 상대한다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혹시 2차성장판은 아직도 그대로인가요?”

그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잠재력이 998에 멈추고는 거의 한 달이 넘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그대로겠지.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잠재스텟 창을 열어보았다.

[잠재레벨 158]

잠재력 : 999

지속력 : 151

회복력 : 33

맷집 : 374

항마력 : 223

“헙!”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서유림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터져 나오는 소리를 억눌렀다.

아리아나가 예쁜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성장판 열렸어요?”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언제 열렸지?”

아리아나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정령 정보를 확인해보세요.”

정령 정보는 또 뭐야?

서유림이 망막의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정보 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져있었다.

창을 열어보았다.

[아리안 : 정령왕 1단계]

워리 : 중급정령 174레벨

블루 : 중급정령 107레벨

그린 : 중급정령 102레벨

레드 : 하급정령 79레벨

······.

서유림의 눈이 다시 커졌다.

“아리안이······ 정령왕이 되었네!”

“역시 제 예상이 맞았어요. 계약자가 2차성장판을 열면 계약자의 정령은 자연스럽게 정령신의 후보가 될 자격을 갖추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정령신의 후보?”

“모든 정령왕은 그 자체로 정령신의 후보거든요. 하지만 계약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아직은 자격만 갖추었을 뿐이지 정령신의 후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아리안은 왜 아무 말도 없었지? 자신이 정령왕으로 진화했으면 바로바로 가르쳐줄 수 있잖아.”

“정령신의 이름으로 계약되어있으니까요. 그 계약을 풀어줄 수 있는 자는 오직 계약된 당사자와 정령신 뿐이에요.”

그랬군.

그러고 보니 아리안이 자신의 진화에 대해서 한 번도 스스로의 의지로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이거나 느닷없이 새로운 능력이 생겨서 서유림이 이유를 물어보면 그때 답을 주듯 가르쳐주곤 했었다.

“어쩌시겠어요. 이건 유림씨가 선택해야 할 일이에요.”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지. 아리아나가 조언 좀 해줘.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리안이 계약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되면 정령왕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요정마을을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나는 아리안과는 영원히 안녕이겠네.”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무려 정령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계약된 관계도 아닌데 나에게 붙어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아리아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에요. 유림씨에게 아리안이 필요한 존재이듯이 아리안에게도 유림씨는 필요한 존재에요. 그러니 서로가 원하면 언제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예요.”

“만약 내가 아리안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면?”

“그러면······ 아리안은 유림씨 곁을 떠나겠죠.”

역시 그렇군.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곧 암흑기가 찾아올 테니까요.”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나의 말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것을 떠나서 아리안을 독립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요정마을을 포기해야 할 테니까.

아직 궁금한 게 많았지만, 한가하게 문답이나 나눌 때도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도 요정들이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아리안. 널 독립시켜줄게. 넌 이제 나와의 계약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알겠습니다.’라네.

게다가 목소리도 어딘가 무미건조했다. 독립시켜주면 고마워서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인걸.

하지만 아리아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람을 닮은 요정도 저렇게 감정표현이 없는데, 정령은 오죽할까?

아리안은 독립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서유림은 온몸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서유림 주변으로 안개 같은 것들이 모여들더니 이내 사람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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