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어디서 꼼수를 부려? (2)
다음날, 장충체육관.
서유림이 대기실에서 경기를 기다렸다. 배복성, 강종범, 도상국 등 조력자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 배복성은 오늘따라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한마디 할까 하다가 관뒀다. 말해봤자 그때뿐이다. 5분도 안 돼서 다시 떨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서유림도 조금 긴장되었다. 아직 허벅지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치료되긴 했지만, 힘을 무리하게 쓰면 이따금 불균형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지. 오늘만 잘 넘기면 되는 거다.
서유림이 눈을 감고 명상하듯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대단하네. 정말로 결승까지 진출할 줄은 몰랐는걸.”
한상민 대표였다.
저 인간이 대기실까지 어쩐 일이지? 설마하니 꼭 우승하라고 응원 오지는 않았을 테고.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돈은 준비됐죠?”
“당연하지. 우승하기만 해. 그럼 바로 돈다발 위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덕분에 나도 수입이 짭짤해.”
하긴, 서유림 덕분에 MAN FC가 초대박을 치긴 했다. 토너먼트 전경기가 매진을 기록했고, 뿐만 대박이 났으니까.
서유림에게 10억 원 줘도 적자는 아닐 것이다.
설마 그것 때문에 기분 좋아서 온 건가?
왠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한상민은 시종일관 환한 웃음만 지었고, 좋은 말만 해주었다. 게다가 힘내라며 직접 이온음료수까지 주고 갔다.
“꼭 우승해. 그리고 그 기세로 다음 경기들까지 대박으로 이끄는 거야. 알겠지?”
서유림이 한상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지? 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정말 응원하러 온 거야?
문득 MAN FC와의 계약서가 생각났다. 한상민이 드디어 그 계약서를 확인한 모양이다.
그래서 서유림과의 재계약을 추진하기 위해서 미리 약을 푸는 거지.
하지만 약 치고는 너무 약소한 것 아냐?
서유림이 손이 쥐어진 이온음료를 바라보았다. 일반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래. 마셔주지 뭐.
서유림이 음료수 뚜껑을 따고 이온음료를 들이켰다.
한 모금 꿀꺽 마시는 순간 서유림이 멈칫했다.
‘뭐지? 맛이 조금 이상한데!’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다. 맛이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뭔가가 다른 느낌이 들긴 하는데 너무 희미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서유림이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상민이 뭔가 일을 꾸밀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거든.
게다가 한상민이 굳이 대기실까지 직접 찾아와서 준 음료수잖아. 그때부터 음료수가 조금 꺼림칙하긴 했었다.
꺼림칙할 땐 확인해보는 게 최선이지.
서유림에게는 그런 것쯤 확인하는 건 일도 아니다.
‘아리안. 지금 마신 음료수에 이상한 성분이 들어있진 않아?’
> 특별히 몸에 해가 되는 성분은 없습니다.
설마하니 정령이 이런 일에 실수를 했을까? 아리안이 이상없다면 이상없는 거겠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확실히 내가 너무 예민해져있었군.’
그래도 이온음료수를 다시 마시고 싶진 않았다.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마실 건 많이 있잖아.
서유림이 이온음료수를 옆으로 치웠다.
다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한상민은 서유림의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재빨리 보인실로 들어갔다.
“서유림의 대기실 확인해봐. 빨리.”
한상민의 재촉에 보안직원이 컴퓨터를 조작해서 서유림 대기실의 화면을 모니터 가득 띄워주었다.
한상민 눈을 크게 뜨고 대기실을 살폈다.
서유림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에 이온음료수가 보였다. 뚜껑이 따져있었다.
한상민이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후훗, 마셨군!’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음료수가 거의 줄지 않았다. 겨우 반 모금 정도 마신 것 같다.
어쩌면 마시려다가 그만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젠장,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건가?’
속이 탔다. 서유림이 저걸 꿀꺽꿀꺽 마셔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서 마셔라. 시원하게 마셔.’
드디어 서유림이 감았던 눈을 떴다. 목이 타는지 음료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한상민이 준 이온음료가 아닌 대기실에 비치된 평범한 생수를 집어 들었다.
역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게 분명했다.
서유림이 생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러자 한상민이 다시 입꼬리를 깊이 말아 올렸다. 대기실에 비치된 생수 역시 한상민이 모두 작업해놓은 것들이었다.
물론 농도는 달랐다. 생수는 무색무취의 음료수라서 이상한 성분이 아주 조금만 들어가도 맛을 확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주 연하게 작업을 해놓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도핑테스트는 금지약물을 얼마만큼 많이 사용했느냐를 따지지는 않으니까. 아주 극소량이라고 해도 검출되기만 하면 규정 위반이다.
즉 한 모금이건 두 모금이건 마시기만 하면 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모니터 안의 서유림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물맛이 이상한 것을 느낀 모양이다.
한상민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봐야 소용없다. 마셨으면 그거로 끝이거든. 후후.’
서유림이 생수병을 들어서 확인해보았다.
‘물맛이 왜 이러지?’
이온음료도 그렇고 생수도 그렇고 평소의 맛과 아주 조금 달랐다.
기분 탓인가?
그래도 자꾸만 꺼려졌다. 다시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아리안. 지금 마신 물은 어때? 이상한 성분 없어?’
> 인체에 해가 되는 성분은 없습니다. 신체능력을 좋게 하는 성분만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어서 효과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있어도 아주 일시적일 것 같고요.
서유림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신체능력을 좋게 하는 성분? 일시적으로? 혹시 아까 이온음료에도 같은 성분이 있었나?’
> 네. 이온음료에는 농도가 조금 더 짙었습니다.
서유림은 순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속았다!’
한상민의 함정이었다. 이온음료와 생수에 스테로이드 같은 금지약물을 소량 첨가한 게 분명했다.
어쩐지. 한상민이 굳이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그런 걸 줄 놈이 아니라니까.
그런데 이온음료뿐만이 아니라 생수에까지 작업을 해놓았다니.
‘어쩌지?’
문득 정령 아리안이 생각났다. 정령의 능력이라면 이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을까?
‘아리안. 그 성분만 따로 모아서 제어해줄 수 있어? 혈관 속으로 흘러 다니지 않도록.’
> 가능합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휴우, 다행이군. 그렇게 해줘.’
서유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한상민이 괘씸하기도 했다. 이런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하다니.
이러면 MAN FC 흥행에도 타격이 크지 않나? 서유림은 앞으로 MAN FC의 흥행을 이끌 인기스타인데.
물론 토너먼트를 끝으로 떠날 계획이긴 하지만 그건 서유림 혼자만 아는 비밀이고.
어쨌건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그냥 있을 수야 없지.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겨줘야겠다.
어떻게 해야 속 시원한 복수가 될까?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사람 많은 곳에서 슬립다운 마법으로 자빠뜨리는 것도 좋겠고, 체력을 잔뜩 흡수해서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왠지 속이 시원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방식은 아무리 복수해도 서유림이 한 짓이라는 걸 한상민이 모를 테니까.
서유림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야 한다. 이왕이면 자기 꾀에 자신이 당했다는 식으로.
문득 서유림의 머릿속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후훗,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잠시 후.
선수 입장이 있었다.
서유림과 함께 등장하는 조력자들 모두 퓨전하회탈을 착용했다. 비록 YJY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퓨전하회탈을 착용하는 것 자체가 시청자와 관중들에게 YJY를 떠올리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서유림이 대기실을 출발하려다가 멈칫했다.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한상민이 선물로 주고 간 이온음료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대기실을 나와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한상민은 어느새 VIP석으로 돌아와 있었다. 서유림과 조력자들이 입장하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하회탈을 쓰고 있어서 누가 서유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상민은 구분할 수 있었다. 하회탈을 쓴 사람 중 한 명이 손에 이온음료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상민과 눈을 맞추고는 이온음료를 건배하듯 살짝 들어보였다.
마치 ‘잘 마시겠습니다.’ 하는 것처럼.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입장을 마치고 하회탈을 벗고는 한상민이 보는 앞에서 이온음료를 시원하게 들이키기까지 했다.
한상민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춤을 추었다.
‘후훗, 멍청한 놈! 그래서 못 배운 놈들은 성공을 못 하는 거다.’
그러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서유림은 경기를 오래 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밀코 그로캅에게 배울 거라고는 불꽃같은 하이킥 하나뿐인데, 사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도상국이나 강종범의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 서유림이 챙길 것은 딱 하나뿐이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경기!
서유림이 평소와 달리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키가 2m에 가깝고 덩치도 훨씬 큰 밀코 그로캅이 오히려 뒤로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서유림이 오직 주먹만으로 승부한다는 스타일을 사전에 파악한 거겠지.
그러니 펀치 거리는 주지 않고 킥 거리만 유지하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서유림에게는 강종범에게 배운 화려하면서도 변칙적인 스텝이 있으니까.
확실히 효과가 있다. 서유림이 변칙적인 스텝을 밟자 밀코 그로캅이 거리 계산에 어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유림이 어느 시점에 앞으로 치고 나갈지 분간이 안 될 테니까.
‘바로 지금이란다!’
서유림이 느닷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밀코 그로캅이 깜짝 놀라서 얼른 뒤로 달아났다. 거리를 완전히 벌리기 위해서 아예 등까지 보이면서 달아났다.
저렇게 달아나면서도 창피하지 않은가?
그런데 밀코 그로캅의 움직임이 오늘따라 무척 가벼웠다. 영상으로 보았을 때는 이렇게까지 가볍지 않았는데.
이번 토너먼트를 위해서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한 모양이다.
하이킥도 전성기 때의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타이밍을 예측하기도 힘들었고, 킥에 실린 무게도 엄청났다.
물론 서유림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킥이 서유림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이킥이 날아오는 순간 슬쩍 고개를 숙이며 피했다가 스프링처럼 몸을 튕기며 밀코 그로캅의 얼굴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꽂아 넣었다.
밀코 그로캅이 깜짝 놀라서 피하려고 했지만, 하이킥의 큰 동작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유림의 펀치는 정확히 턱에 꽂혔고, 원투쓰리가 계속 이어지자 밀코 그로캅이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심판이 재빨리 다가와서 손을 흔들었다.
경기 종료 선언이었다.
서유림이 포효하듯 케이지 위로 올라가며 손을 뻗었다. 관중들이 그에 화답하듯 ‘와아!’ 하는 함성을 터뜨려주었다.
서유림은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권이슬이 보이자 손가락을 뻗어 가리키며 도발했고, VIP석에 앉아있는 한상민을 향해서도 주먹을 힘껏 쥐어보였다.
한상민도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물론 서유림의 승리를 기뻐하는 웃음은 아니리라. 자신이 몰래 꾸민 수작이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과연 그렇게 될까?
우승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서유림은 이번에도 마이크를 잡자마자 한상민을 바라보며 어제와 같은 요구를 했다.
“이제 시원하게 확답을 주시죠. 권이슬 선수와 타이틀전 일정 잡아주시는 겁니까?”
체육관에 붙어있는 모든 모니터가 한상민의 얼굴을 잡아주었다.
한상민이 책상에 놓여있는 마이크를 집었다. 그리고는 시원하게 대답해주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서유림 선수의 다음 경기는 미들급 챔피언 도전이 될 것입니다.”
관중들이 다시 한 번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면 권이슬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카메라가 얼굴을 잡자 억지로 웃기는 했지만, 태어나서 저렇게 어색하고 일그러진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권이슬에게도 마이크가 넘어갔다.
서유림의 도전에 대한 입장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리고 사실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서유림은 절대로 다음 경기에 타이틀전을 갖지 못할 테니까.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경기 전에 한상민 대표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거든. 지시받은 사항도 있고. 만약 오늘 서유림이 우승해서 타이틀을 도전해온다면 허락은 하되 대신 이 조건을 꼭 붙이라고 했었다.
“좋아. 그 도전 받아주지. 단 조건이 하나 있어.”
“그게 뭔가요?”
서유림이 되묻자 권이슬이 직설적으로 조건을 이야기했다.
“도핑테스트 한 번 더 받아봐. 이번에도 음성반응이 나온다면 그 실력, 내가 인정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