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어디서 꼼수를 부려? (1)
옥희경의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놈에게 다시 그곳으로 가서 찾으라고 할 수도 없다. 사건현장은 이제 경찰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윤경식 경감이 어제 사건 직후 직접 현장에 가보았다. 정말이지 구석구석 빠짐없이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옥희경의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놈이 가지고 간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큰일이다. 생각만으로도 골치 지끈지끈하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다시 가서 찾아보는 수밖에.
윤경식이 옥희경의 빌라로 향했다.
사건 현장에는 수많은 경찰들이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 놈과 격전을 벌였던 도로에서 혈흔 같은 단서 찾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윤경식이 보이자 하던 일을 멈추고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오셨습니까, 경감님!”
“그래요. 수고들 많아요. 뭐 좀 나온 것 없어요?”
“아직까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혈흔을 아직도 못 찾았어요? 저쯤에서 맞은 것 같은데.”
“저희도 그곳 인근을 집중적으로 수색해보았지만,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분명히 피가 튀었을 텐데. 옷 때문에 안 튀었나?”
윤경식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피해자 휴대폰은 발견이 됐나요?”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아했다. 그토록 많은 경찰이 동원되어 찾고 있는데도 발견을 못했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의 증거물이 되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찾아서 없애는 게 났다.
물론 증거물이 된다고 해도 얼마든지 빼돌릴 방법은 있지만.
“알겠어요. 계속 수고하세요.”
윤경식이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 번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여기에서 몸싸움 벌일 때까지만 해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옥희경이 죽고 나서 찾아보니 없었다고 했다.
‘그럼 여기에서 어디론가 던져졌다는 뜻인데.’
윤경식이 사건 현장에서 마치 스스로 옥희경이 된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문득 서랍장이 보였다. 아래가 살짝 떠있어서 뭔가가 그곳으로 들어가면 눈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왠지 휴대폰이 그 아래쪽에 있을 것만 같았다.
윤경식이 몸을 납작 숙여서 손전등도 비춰보고 손을 깊이 넣어서 휘저어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도 휴대폰은 없었다.
‘씨발,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무래도 놈이 가져간 것만 같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갑자기 담배도 고프고 술도 고팠다.
이런 때는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술 한 잔 찐하게 발라줘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머릿속을 정리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지.
물론 술에 여자가 빠질 수는 없는 일.
‘그래. 스트레스는 그때그때 확실하게 풀어줘야 해.’
윤경식이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형님, 오늘 바쁘세요? 술이나 한잔하시죠.”
- 다음에 하자. 요즘 시간 내기 힘들다.
“에이, 그래도 즐길 건 즐기면서 살아야죠. 아니면 태민이하고 마셔야 하잖아요. 저도 태민이보다는 형님하고 마시고 싶거든요.”
- 그 새끼. 알았어, 인마. 그래도 오늘은 그렇고, 내일모레 토요일에 마시자. 토너먼트 계체행사 끝나면 시간 많이 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윤경식이 통화를 마쳤다. 공짜 술에 공짜 여자를 품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이고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역시 재벌 아들과 친해놓으면 써먹을 데가 많다니까.
* * *
> 조금 더 깊이. 왼쪽. 네 그거입니다.
“우욱!”
서유림이 수건을 꼭 깨물며 비명을 삼켰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핀셋을 허벅지살 속에 넣고는 정령 아리안의 지시에 따라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총알이 핀셋 끝에 걸리는 건 느껴지는데 쉽게 잡히지는 않았다.
‘잡혀라. 잡혀라!’
자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계속 시도했다.
그러다가 핀셋에 총알이 딱 물리는 게 느껴졌다.
꽉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총알 뽑힐 때의 고통은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였다. 정령 아리안이 통증을 억제해주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래도 총알이 피부 밖으로 나오는 순간만큼은 앓는 이가 빠지는 것처럼 시원했다.
땡그랑-
“휴우우.”
서유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허벅지에 박힌 총알을 모두 뽑아냈다.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통증은 억제가 쉽지 않지만, 정체된 상처의 통증은 깔끔하게 지울 수 있다.
출혈은 전혀 없었다. 그저 허벅지에 총알 나온 구멍만 뽕뽕 뚫려있을 뿐이었다.
유리 위에 떨어진 총알에도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피가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서유림이 의도한다면 아리안이 출혈의 통제를 잠시 멈출 수는 있겠지만.
서유림이 허벅이제 크게 만들어진 총알구멍을 살펴보았다.
이 상태로 경찰이 다시 보자고 한다면 그보다 큰일도 없겠지.
그래서 모텔에 투숙하면서 휴대폰을 아예 꺼버렸다.
물론 경찰이 다시 찾을 수도 있다. 왜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핑계거리는 확실하게 준비되어있다.
토너먼트 결승전이 내일모레잖아. 그거 준비하려고 모든 연락을 단절했다고 둘러대면 끝이다.
상처도 내일 정도면 대충 아물겠지.
모레쯤 되면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상처의 영향을 조금 받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승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니, 반드시 우승해야 했다. 무려 25억 원이 걸린 게임이니까.
만약 우승하지 못한다면 5억 원 이상의 적자였다. 준우승 상금은 5억 원에 불과하니까.
‘에이, 설마 평범한 인간에게 지겠어?’
서유림이 이번에는 옥희경의 휴대폰을 만져보았다.
이 안에 분명히 진범의 단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패턴으로 잠겨있어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다.
게다가 틀림없이 경찰에서도 휴대폰을 찾고 있을 것이다. 휴대폰 전원을 켜면 놈들이 요상한 수를 써서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다.
근데 통화를 하지 않아도 위치추적이 되나?
해봤어야 알지.
어쨌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전원을 꺼놓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경찰이 포기할 때쯤 되면 그때 휴대폰의 내용을 확인해볼 계획이었다.
‘일단 지금은 좀 쉬면서 경기 생각만 하자.’
서유림이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장충체육관.
토너먼트 결승전을 앞두고 계체행사가 진행되었다.
밀코 그로캅은 조용한 선수였다. 말수가 너무 적어서 사회자가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서유림도 쓸데없는 자극은 피했다. 매너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매너로 대해줘야지.
대신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의 흥미를 유도했다. 지난번부터 줄기차게 밀어붙였던 것이었다.
마침 한상민 대표가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답을 얻을 수 있겠지? 서유림이 한상민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토너먼트 우승하면 미들급 챔피언전 곧바로 성사시켜주는 겁니까?”
하지만 한상민은 애매한 표정을 했다. 분명 웃고 있는데, 그 웃음이 너무도 어색했다. 울고 싶은데 웃고 있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관중들은 물론 서유림 편이었다.
서유림에게 힘을 실어주듯 힘껏 응원해주었다.
“붙여라!”
“승낙해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사람들은 원래가 반전의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서유림의 지금까지 행보가 딱 그런 반전드라마였다.
처음에 무제한급에 도전할 때만 해도 지나치게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예선전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매 라운드를 거칠 때마다 그 생각을 무참히 깨뜨렸다.
32강전은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것도 가뿐히 통과하고, ‘그래도 오이르꺼러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생각했는데, 1라운드 시작하자마자 떡실신 시켜버렸고, 결국 이렇게 결승전까지 올라오지 않았는가?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고, 이변도 이런 이변이 없었다.
말 그대로 돌풍의 핵이었다.
게다가 한국 사람이 아닌가?
유럽 선수와 한국 선수가 맞붙는데 유럽 선수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한국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렇다고 서유림이 죽일 놈으로 찍힌 것도 아니고, 밀코 그로캅이 한국인에게 국민적인 영웅도 아니고.
그러니 다들 무조건 서유림만 응원할 수밖에.
그것도 아주 미친 듯이.
“서유림!”
“서유림!”
서유림을 연호하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체육관을 들썩이게 했다.
TV중계석의 아나운서도 서유림의 편이었다.
“저는 서유림 선수와 권이슬 선수가 대결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군요. 서유림 선수. 굳이 우승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이룬 성과만으로도 권이슬 선수와 상대할 자격은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유림 선수. 한국 격투기의 부흥을 이끌 선수입니다. 저런 선수가 왜 이제야 나온 걸까요? 20대 초반에 발굴했다면 한국 격투기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을 겁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한상민은 고개를 흔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상민이 생각해도 서유림과 권이슬의 대결은 그야말로 빅매치였다. 대결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흥행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서유림이 미운 건 미운 거고 사업은 사업이니까.
“좋습니다. 서유림 선수가 우승한다면 권이슬 선수와의 챔피언전을 긍정적으로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와아!”
관중들이 뜨겁게 환호해주었다.
그 환호가 서유림의 기분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후훗,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떠날 수 있게 되었군.’
계체 행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서유림이 기분 좋게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한상민은 그리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쪼개질 정도로 아팠다.
물론 서유림 때문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유림과의 내기 때문이었다.
무려 10억 원.
따지고 보면 10억 원이 아니라 20억 원짜리 경기다. 이기면 10억 원이 생기고, 지면 10억 원이 날아가니까.
서유림 덕분에 MAN FC가 흥행을 너머서 대박행진을 이어가는 건 좋은데, 이놈이 그 좋은 분위기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신경을 박박 긁고 있었다.
‘아, 20억 원! 씨발! 진짜 그로캅까지 이기는 건 아니겠지?’
경기가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 생각으로 머릿속에 지끈지끈했다.
그런데 잡념을 방해하듯 휴대폰이 울어댔다.
발신자를 보니 경찰청의 윤경식 경감이었다.
‘아! 오늘 경식이하고 함께 술 마시기로 했지!’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친구다. 아버지가 무려 경찰청장이고, 법무부장관까지 지내신 할아버지는 아직도 정치계에 영향력이 좋으신 분이니까.
게다가 윤경식은 5대독자였다. 그럴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윤경식의 가족은 그러지 않았다. 윤경식의 말이라면 깜빡 죽을 정도로 애지중지 키웠다.
즉, 윤경식을 잡으면 그 집안 전체를 잡는 셈이었다.
“그래, 경식아. 어디에서 볼까?”
베니스 호텔 식당.
한상민과 윤경식이 대각선으로 앉았다. 반대쪽 대각선으로는 얼굴도 몸매도 연예인급인 미모의 아가씨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한상민은 그리 유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아가씨들 모두가 민들레와 계약한 텐프로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상민의 자금줄을 말리고 있는 원흉들 중 하나라는 이야기지.
그래도 이왕 돈을 지불했는데 돈 값은 해야지.
‘이년들을 어떻게 괴롭혀야 본전을 뽑을 수 있을까?’
“형님, 무슨 고민 있어요? 표정이 왜 그래?”
표정이 드러난 모양이다.
사실 고민이 많다. 마땅히 털어놓을 곳도 없는 고민이었다.
그런데 윤경식이라면 털어놓아도 될 것 같다. 윤경식과는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니까.
“사실…….”
서유림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윤경식이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서유림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진범은 아니지만 묘한 일로 인연을 맺다 보니 괜히 기분 나쁜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10억 원이라고? 와, 그 새끼나 형님이나 진짜 통 크게 노네. 그런 돈 있으면 나도 좀 줘요.”
“그땐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내가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했으니까.”
“하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긴 했죠.”
한상민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말이. 어떻게든 이놈이 우승하는 걸 막아야겠는데,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승부조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지 막막했다.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보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윤경식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내가 좋은 방법 하나 가르쳐드릴까?”
한상민의 눈이 커졌다.
“방법이 있어?”
“당연하죠. 아주 간단해요. 100%.”
“뭔데?”
“아따, 형님도 차암. 그러다 대머리 되겠네. 10억 원 세이브하게 해줬으면 나한테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니지. 엄밀하게 따지면 20억 원짜리네.”
하긴, 그런 아이디어만 있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살 것이다.
한상민이 시원하게 불렀다.
“1억 원!”
“거기에 이런 자리 일주일에 한 번씩 만들어주기.”
까짓 어렵지 않다. 윤경식과의 술자리 비용은 유진그룹의 법인카드로도 긁을 수 있으니까. 그게 다 나중에 한상민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콜! 인제 말해봐. 방법이 뭔데?”
아가씨들도 궁금한 모양이다.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윤경식은 꼼꼼한 사람이었다.
“너희는 잠깐 나가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