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알리바이가 필요해 (1)
“좋아. 상체 흔들고. 좋았어!”
강종범이 연신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서유림도 만족스러웠다.
역시 시간이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어색하던 변칙 스텝이 이제는 발에 착착 달라붙었다. 사우스포나 오서독스 한 가지 자세만 유지한 채 톡톡 튀는 스텝이 오히려 더 어색할 정도였다.
“어느 자세가 공격이고 수비인지 전혀 구분이 안 가. 이젠 유림이가 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형님도 참. 아직 멀었죠.”
“과장이 아니라니까. 운동신경이 정말 대단하네.”
“형님이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서유림과 강종범이 서로를 칭찬하며 한껏 기분을 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도상국도 연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부럽습니다. 전 왜 이렇게 실력이 안 늘죠?”
엄살이다. 도상국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 채희라 보디가드 해주느라 시간도 별로 못 내는데 저렇게 빨리 성장하는 걸 보면 역시 운동신경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다시 시작해볼까?”
“그럴까요?”
서유림이 강종범 앞에서 자세를 잡으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또 누구야?”
서유림이 귀찮은 표정으로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희라였다.
그래도 채희라의 전화는 받아줘야지.
“여보세요.”
서유림이 힘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채희라가 목소리를 작게 해서 물었다.
- ‘응’, ‘아니’로만 대답해줘. 상국씨 옆에 있지?
뭐지? 갑자기 왜 이래?
서유림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응.”
- 상국씨 몰래 나한테 와줄 수 있지? 지금.
“응.”
- 그럼 와줘. 나 지금 민들레 옥탑방이야.
“그래, 알았어. 형님, 저 잠시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서유림이 통화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운동복 위에 겉옷을 챙겨 입었다.
강종범은 물론이고 도상국도 의아한 표정을 했다.
“사장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이런. 귀도 밝네. 채희라가 목소리를 죽여서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처음에 발신자 이름을 보았던 건가?
어쨌건 몰래 나가기는 글렀다.
“아냐. 그냥 갑자기 보고 싶다네. 하여튼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러자 도상국이 가볍게 웃었다. 서유림과 채희라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림도 피식 웃었다.
“오늘은 내가 희라 지켜줄 테니까 여기서 운동이나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근데 땀이나 씻고 가시지.”
어차피 땀도 별로 안 흘렸다.
“가서 씻으면 돼.”
어라!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하고 보니 괜히 이상한 상상 하게 만든 느낌이다.
뭐 어때? 강종범이나 도상국이 서유림과 채희라의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서유림이 체육관을 나섰다.
곧장 민들레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채희라가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서류를 정리하고는 쇼파에 앉았다.
서유림이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드디어 찾았어. 옥희경.”
옥희경? 그게 누구였더라?
아! 기억난다. 도상국이 여고생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 그토록 찾아다니던 여자.
사건 당일 피해자였던 김미연을 밖으로 불러낸 바로 그 여자였다.
그제야 채희라가 ‘도상국 몰래’를 강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상국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찾아가려 했을 테니까.
그러면 일이 어려운 방향으로 꼬일 수도 있었다.
‘경찰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힘 센 놈’이 옥희경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걱정이 되었다. 채희라가 옥희경을 찾아낸 것을 ‘그 힘 센 놈’이 안다면 옥희경이 위험하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잘 아는 경찰이 있어. 그 경찰 통해서 알아냈어.”
“설마 그놈이 눈치 채진 않았겠지?”
“최대한 은밀하게 알아보라고 부탁했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를 거야. 만나기로 약속 잡아놓았는데, 같이 가줄래?”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약속을 잡았다고? 만나주겠대?”
“잘 설득했어. 청계천 부근에서 만나기로 했어.”
뭐지? 왜 수상한 냄새가 나지? 채희라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일이 갑자기 이렇게 쉽게 풀릴 수도 있는 건가?
마치 누군가가 길을 활짝 열어준 느낌이다. 도심의 대로를 달리는데 신호등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탁탁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혼자 가기 조금 무서워서. 오빠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서유림 혼자야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몸을 뺄 자신이 있지만, 채희라의 안전을 장담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굳이 둘이 갈 필요도 없잖아.
“희라는 여기 있어. 차라리 내가 가볼게.”
“남자가 찾아가면 괜히 겁먹고 안 나온다고 할 수도 있는데. 게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어.”
하긴, 벌써 밖에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서두른다고 해도 옥희경을 만날 때쯤이면 완전히 깜깜해질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 약속장소를 조명도 밝고 사람도 많은 곳으로 정한다면 시간은 별 문제되지 않겠지.
그리고 이런 엄청난 일을 하는데 여자라고 괜찮고 남자라고 무서워한다고?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미리 문자 보내주면 돼지. 그게 나을 것 같아.”
채희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걸리는 게 또 있다.
“결승전이 사흘 후잖아. 괜찮겠어?”
오늘 한 일이 결승전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당장 내일 경기를 뛴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괜찮아. 혹시 모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고. 그런데 그 아가씨와 휴대폰으로 연락 주고받은 거야?”
채희라가 방긋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서 흔들었다.
“대포폰이야.”
서유림도 피식 웃었다.
“장소가 어디야?”
서유림이 청계천 신답역으로 향했다. 옥희경과 새롭게 약속을 잡은 장소는 용답휴식공원이었다.
그런데 공원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 채희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장소가 바뀌었어. 자기 원룸으로 와달라고 그러네.
원룸으로 오라고?
이거 자꾸 분위기가 이상해지네. 뭔가 모르게 꺼림칙해.
어느새 세상을 집어삼킨 어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낯선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다니.
“직접 통화했어? 옥희경하고?”
- 응.
“남자가 간다는 얘기도 하고?”
- 했어. 군자동 신원빌라야. 2동 302호.
옥희경과 직접 통화했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군자동 신원빌라로 향했다. 중랑천과 인접해 있는데, 주변의 높은 건물들에 가려서 사방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게다가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보나마나 실내도 좁을 것 같았다.
‘2동 302호라고 했지?’
서유림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도 가렸다. 그리고는 3층으로 성큼성큼 뛰어올라갔다.
302호 앞에서 벨을 눌렀다.
그런데 조용하다. 서너 번을 눌렀는데도 안에서 전혀 반응이 없다.
순간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이었다.
‘혹시······?’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았다.
그러자 현관문이 잠김 장치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 냄새는······!’
피 냄새였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신선한 피.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기 힘들었겠지만,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서유림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단번에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이 켜지지 않아서 안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하지만 이깟 어둠은 서유림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라이트사이트!’
원룸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아가씨가 보였다. 거실에 쓰러져있었다. 주변에 피가 가득했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피가 멈춘 것을 보면 사망하고 시간이 제법 지났다. 채희라와 통화한 직후에 사고를 당한 게 분명하다.
‘그냥 달아나야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일 것 같았다.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함정인게 분명하니까.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순간 서유림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휴대폰 하나가 서랍장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옥희경의 휴대폰일 것이다.
그런데 왜 저 밑으로 들어가 있지?
대충의 상황이 그려졌다. 연약한 여자의 몸이라고 해도 살인자에게 격렬하게 저항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휴대폰이 발에 차이거나 하는 식으로 저기까지 밀려들어간 거겠지.
살인자는 옥희경의 휴대폰을 찾아서 없애려고 했을 것이다. 저 안에 들어간 것을 찾지 못한 거겠지.
그러는 사이 서유림과의 약속시간은 다가오고.
그래서 더는 찾지 못하고 그냥 사라졌을 것이다.
문득 저 휴대폰에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휴대폰만 가지고 가자.’
서유림이 얼른 원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서랍장 밑에 손을 넣어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밖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서유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함정이었다. 7년 전인가 김미연의 죽음을 도상국에게 뒤집어씌운 것처럼 옥희경의 죽음 역시 서유림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아니면 이 모든 일이 처음부터 계획되어있었거나.
어쨌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옥희경의 휴대폰을 움켜쥔 채 현관문을 나왔다.
그 와중에도 지문 생각이 났다. 옷소매로 현관문 손잡이에 묻어있을 지문을 닦아내고 아래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래쪽에서 벌써 경찰들이 열 명도 넘게 몰려와 있었다.
경찰이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저기 있다. 잡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잘 지켜!”
도상국의 말이 맞았다. 경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살인사건에 저렇게 많은 경찰이 찾아올 리가 없다.
완력으로 경찰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자칫 경찰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게다가 흘끔 보니 몇 몇은 총까지 꺼내들고 있었다.
‘뭐야? 다짜고짜 총부터 꺼내드는 경찰이 어디 있어?’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정령의 힘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총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재빨리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신원빌라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완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철문을 뜯어낼 수는 없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옥희경의 빌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 와중에도 지문 걱정에 옷소매로 손잡이를 감아쥐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안에서 잠가버렸다.
‘젠장, 독안에 갇힌 쥐 꼴이군.’
그나마도 오래 버틸 수 없겠다. 현관문 밖에서 경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유림을 암울하게 만드는 말소리였다.
“열쇠 가져왔지? 어서 열어?”
젠장, 철두철미하게도 준비했군. 아예 ‘이건 함정이다.’라고 대놓고 떠들지 그래?
대한민국 경찰이 저래도 되는 거야?
어쨌건 이제 탈출구는 하나뿐이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
시간을 끌수록 상황은 불리해진다. 경찰들이 창문 아래쪽도 지키게 될 테니까.
아래쪽을 흘끔 바라보니 벌써 경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총을 든 경찰들도 있었다.
여기에서 붙잡히면 앞일을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결백을 주장한다고 해도 결국은 도상국과 똑같은 꼴이 되겠지.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유림이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는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비록 2층이자만, 육체능력이 발달한 서유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높이였다.
아래쪽에서 경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 뛰어내린다.”
“잡아!”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땅에 착지했다. 엄청나게 발달한 신체능력 덕분에 전혀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땅에 착지하자마자 그 반발력을 스프링처럼 이용해 곧바로 달릴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경찰들이 깜짝 놀랐다.
“저 새끼 뭐야? 저게 가능한 거야?”
“씨발, 잡아!”
빌라 위쪽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죽었다! 살인범이야. 도주하면 발포해.”
서유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발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