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약속은 지킨다 (3)
정이돈이 다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마태수가 주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정이돈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서유림이 지난번에 마태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태수의 완력도 이제는 제법이었다. 제대로 힘을 주면 한 방에 정이돈의 정강이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악!”
정이돈이 고통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실제로 뼈를 부러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서유림이 ‘주군’의 이름으로 금지시킨 일이니까.
마태수의 경우야 애초부터 하위정령을 침투시킬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부터는 웬만하면 하위정령을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러면 너무 심각한 부상은 곤란하겠지.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잖아.
서유림이 다시 물었다. 정이돈이 대답을 피한다면 마태수의 발길질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답할 때까지.
<< 69캐피탈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했다. >>
“저희의 본부 격인 곳입니다.”
보다 못한 정일돈이 대신 이야기했다. 그래도 친동생이라고 고통 받는 걸 더는 지켜보지 못하겠던 모양이지.
하긴, 그래도 가족인데 눈앞에서 저런 고통을 가한 것은 조금 심하긴 했다. 그러게 왜 그랬어? 가족끼리 착하게 살았어야지.
돼지이모는 흔히 말하는 사채업자이고, 69캐피탈은 제3금융권에 등록된 대부업체이다. 형식적으로 완전히 독립되어 있고 운영도 독립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돼지이모가 69캐피탈에 예속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금도 마약도 모두 69캐피탈에서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자금이나 마약을 숨겨두는 위치도 69캐피탈에서 모두 알고 있었다. 자금과 마약이 모두 사라졌다면 69캐피탈에서 빼돌린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서유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한발 늦었군.’
갑자기 정일돈 형제가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저놈들이 악착같이 버티는 바람에 69캐피탈에게 그런 시간을 준 게 아닌가?
하지만 그리 늦지 않았다. 까짓 69캐피탈을 치면 그만이니까.
<< 69캐피탈의 누구를 잡아와야 마약과 자금의 출처를 알 수 있지? >>
대답이 늦어지자 마태수가 지체 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아악! 신태영이라는 사람입니다. 대표는 그냥 바지사장으로 앉아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고, 실질적인 일을 주도하는 사람은 신태영입니다.”
<<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지? >>
“······ 신사동······.”
서유림이 마태수를 바라보았다.
<< 대장로가 직접 가보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
“옛, 주군! 신태영을 잡아서 이곳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가자!”
* * *
한상민이 소파에 앉아있다.
하지만 자세가 편안하지 못했다. 허리를 바짝 구부린 채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노크소리가 들리자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서둘러 말했다.
“들어와.”
비서 장성식 부장이 들어왔다.
장성식 역시 한상민처럼 행동에 긴장감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서두르는 느낌이랄까?
“어떻게 됐어?”
“잘 처리됐습니다. 밀가루와 현금은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신태영도 무사히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제야 한상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놈들의 움직임을 보니 아주 작정하고 서울을 쓸어버리는 듯했다.
“대체 어떤 놈들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실체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우두머리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들리고······.”
한상민도 들어본 이야기다.
불사파나 한방파, 석균이파 등에서 이탈한 조직원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했는데, 다들 이상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물을 마음대로 다룬다느니, 사람의 정신을 제압한다느니, 깜깜한 산속을 대낮의 평지처럼 다닌다느니.
심지어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한단다.
하지만 하나같이 ‘카더라 통신’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조직의 핵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철썩 같이 믿을 뿐이었다.
한상민은 모두 헛소리로 치부했다.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라야 말이지.
“광명회라고 했나? 씨발, 사이비종교도 아니고, 대체 정체가 뭐야? 사이비종교면 신도나 모아서 돈이나 뜯어낼 것이지 조폭들은 왜 쓸고 다니고 지랄이야?”
“그나저나 어쩌죠? 밀가루 구매하는데 돈을 제법 많이 썼습니다. 이걸 되팔아야 자금이 마련되는데······.”
한상민도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MAN FC 토너먼트 개최와 홍보에 너무 큰돈을 쏟아 부은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MAN FC는 대성공이었다. 이런 식으로 흥행이 이어진다면 아버지 한유진은 한상민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고, 후계구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룹 비자금일 조금 빼돌리는 수밖에.”
“그러다 발각되면······.”
“내가 감찰실장인데 누가 밝혀내? 티 안 나게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빼돌리면 돼. 한 50억 원 정도만 만들어봐. 가을에 조용해지면 밀가루 팔아서 채워 넣으면 돼.”
장성식은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요즘 모든 일들이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만 꼬였기 때문이다.
잘 되면 좋지만, 잘못 되면 한 방에 끝나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결정은 한상민의 몫이었다.
“알겠습니다.”
* * *
서유림은 작업장을 나와서 철마산 인근에서 기다렸다. 깊은 산중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두 시간쯤 후에 마태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데 조금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신태영이 잠수한 것 같습니다.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젠장, 꼬리만 자르고 도망갔군!’
아쉽다. 덩어리가 큰 악의 축을 소탕할 좋은 기회였는데.
하지만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놈들이 마약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떻게든 처분하려 할 테니까.
처분 경로는 당연히 조폭들이겠지. 서유림이 서울의 조폭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마약이 유통되는 게 다시 보일 것이고, 그러면 신태영도 다시 드러날 것이다.
물론 서유림이 모르는 다른 유통경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덩어리가 큰 만큼 아껴두었던 한 수를 쓸 때가 된 것 같다.
서유림이 마태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리하지 말고 복귀하라.]
한 시간쯤 후.
시각은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주변은 온통 깜깜했고, 산속은 그 어둠이 더욱 깊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라이트사이트 덕분에 어두운 산길을 대낮처럼 보며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마태수가 돌아와 있었다. 한건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정일돈 형제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있었다.
<< 그만. >>
그제야 마태수가 발길질을 멈추었다.
서유림은 정일돈 형제에게도 광명회 가입을 강요했다.
<< 선택해라. 죽겠느냐? 아니면 나의 노예가 되겠느냐? >>
처음에는 대답을 망설이기도 하고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서유림이 물방울을 던졌다. 이번 물방울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살갗에 맞을 때마다 푹푹 파이면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
단 정일돈에게만 강요했다. 어차피 형제이니 한 배를 탄 놈들 아닌가? 형만 끌어들이면 동생도 함께 끌려올 것이다.
그러면 하위정령 하나만 사용해도 둘을 모두 묶어둘 수 있겠지.
정일돈의 얼굴은 어느새 붉은 피가 낭자했다.
그 모습에 동생 정이돈은 물론이고 마태수를 비롯한 광명회 회원들도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
특히 마태수는 더욱 가슴이 서늘했다.
‘주군의 능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무시무시하구나.’
그러는 사이 정이돈이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형인 정일돈이 무방비상태로 당하는 꼴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예가 되겠습니다.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형제의 우애는 뜨겁다 그건가?
서유림은 연민이 느껴지기는커녕 코웃음만 나왔다. 나와 가까운 사람의 고통만 불쌍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마음껏 짓밟고 유린하고 고통 줘도 된다는 건가?
이런 놈들은 좀 더 혼을 내야 하는데.
하지만 더는 명분이 서지 않았다. 동생에 이어서 형 정일돈도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뭐,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서유림이 눈에서 사라지면 틀림없이 악행을 다시 저지를 것이다.
그때 더욱 확실하게 혼을 내주면 되겠지.
서유림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좋다. 정일돈. 그대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나의 3장로로 임명하겠다. 너에게 그런 특혜를 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
정일돈은 정신이 없었다. 고통과 굴욕, 두려움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3장로에게 특별히 명할 게 있다. >>
“말씀하세요.”
“69캐피탈과 관련해서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게 되면 즉시 내게 알려라. 만약 정보를 얻고도 숨긴다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명심하라.”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정일돈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정일돈은 아직 서유림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달라질 것이다.
서유림이 정일돈에게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정령을 침투시켰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아서 정령을 통해 다시 이야기했다.
정일돈에게 침투시킨 하위정령은 이미 50레벨이 넘게 성장한 상태였다. 웬만한 의사전달은 가능했다.
물론 정확한 의사가 아닌 대략적인 느낌만 전달하는 것뿐이지만.
<< 내가 언제 어디서건 그대를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하라. >>
그러자 정일돈이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서유림이 다시 정일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조직들을 아우를 때처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로.
<<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어떤 짓도 저지르지 마라. 그것을 어길 시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를 것이다. 알겠나? >>
“······예. 명심하겠습니다.”
서유림이 손을 뻗자 물컵의 물이 덩어리진 채 둥실 떠올라서 정일돈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물 덩어리는 마치 세수라도 시키듯이 정일돈의 얼굴 위를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피로 얼룩졌던 얼굴이 깨끗하게 씻겼다.
얼굴에는 물로 인해 얻었던 상처는 어느새 치료되고 뽀얀 새살이 올라와 있었다.
정이돈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그 경이로운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후훗, 다 되었군.’
서유림이 이번에는 마태수를 바라보았다.
<< 대장로. 이번 일은 그대의 공이 크다. >>
“감사합니다. 주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대장로에게 따로 지시할 것이 있으니 따라 들어와라. >>
서유림이 창고 옆의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공손히 서있는 마태수를 바라보았다.
<< 그대의 충성심을 한 번 더 보여줄 기회를 주겠다. >>
“예, 주군.”
마태수는 무엇이든 시켜만 달라는 태도였다. 하지만 서유림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어깨를 움찔했다.
<< 열흘 안에 10억 원을 마련해서 가져와라. >>
“······예?”
마태수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공손하게 모아진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렸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어떻게든 돈을 안 뜯길 방법을 찾는 거겠지.
하지만 이미 정해진 순서란다. 마태수는 야금야금 돈을 뜯길 것이고, 머지않아서 빈털터리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면 마태수에게는 딱 두 가지 선택만 남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서유림에게 인생을 맡기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새 인생에 도전해보거나.
물론 두 번째 길을 택하겠지.
‘후훗, 과연 언제 그 선택을 결행할까? 그날이 네 인생 종치는 날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지는 실컷 이용해먹어 줘야지.
서유림은 가만히 앉아서 마태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기······ 지난번에도 10억 원을 드렸는데······ 또······?”
<< 그래서? 못 가져오겠다는 것이냐? >>
서유림의 목소리가 일순간 높아졌다.
그와 동시에 마태수가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이거 정말 아주 유용한 기술이다. 공포심 조장하는 데 이보다 좋은 기술이 없다. 이렇게 하니까 서유림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마태수는 벌써 두려움에 떨고 있다.
<< 내가 네게 준 능력이 그깟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차라리 네 능력을 회수하고 폐인으로 만들어줄까? 그깟 10억 원 바칠 노예는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
“아, 아닙니다. 열흘 안에 반드시 만들어서 바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진정으로 충성심을 보이고 싶었다면 한 번에 그렇게 고개를 숙였어야지.
<< 대장로에게 실망이로구나. 너의 충성심이 그것밖에 안 되었다니. 앞으로 지켜보겠다. >>
“죄······ 죄송합니다.”
서유림이 기분이 상했다는 듯 거칠게 일어섰다. 그리고는 사무실을 휘휘 빠져나가서 철마산의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유림의 입술이 깊게 말려 올라갔다.
‘후훗, 이제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겠지? 조만간 작업을 시작하겠군.’
비슷한 시각 마태수는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씨발, 더는 못 참겠군. 빨리 뒤집어엎던지 해야지 안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