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11화 (111/196)

# 111

약속은 지킨다 (2)

다음날.

최흥만과 밀코 그로캅의 경기가 먼저 치러졌다.

경기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밀코 그로캅의 전진에 겁을 먹었는지 최흥만은 뒷걸음질만 했고, 케이지 구석에 몰린 순간 복부에 주먹을 맞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최흥만이 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흥만 역시 64강전부터 단계를 밟으며 올라왔으니까. 그 과정에서 제법 이름값 있는 선수들을 모조리 1라운드 만에 KO 시켰다.

판정승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것은 최흥만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키만 멀대 같이 큰 약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만 밀코 그로캅이 그만큼 강했을 뿐이다.

서유림이 봐도 밀코 그로캅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움직임이 가벼웠고, 펀치는 무거웠다.

게다가 이번 준결승전에서는 선보이지 않았지만, 불꽃같은 하이킥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했다.

물론 서유림이 없다는 가정에서 말이다.

다음으로 서유림과 마이티 무어의 경기가 치러졌다. 오늘 열린 11경기 중 가장 마지막에 치러지는 메인이벤트였다.

마이티 무어가 먼저 입장하고, 서유림이 나중에 입장했다.

YJY는 동참하지 못했다. 중국에서의 스케줄 때문에 한국에 올 시간도 없었고, 설령 왔다고 해도 한상민이 어떻게든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YJY의 것을 사용했다. 한상민이 이런저런 이유로 막아보려 했지만, 서유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인제 와서 막아봤자 별 의미도 없었다. YJY는 이미 슈퍼스타로 성장해있기 때문이다.

비록 YJY는 없지만, 분위기는 낼 수 있었다. YJY와의 입장을 상징하는 하회탈이 있기 때문이다.

서유림은 이번에도 모든 동행자들과 함께 하회탈을 쓰고 입장했다. 대신 마지막 순간까지 하회탈을 벗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몇몇 관중들이 실망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드디어 경기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렸다.

마이티 무어가 공격의 주도권을 갖겠다는 듯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는 빠르게 쨉을 뻗으며 서유림을 압박했다.

서유림은 강종범에게 배운 화려한 스텝과 위빙으로 상대했다. 마이티 무어의 쨉과 펀치가 번번이 옆으로 빗나갔다.

서유림도 이따금 펀치를 뻗었다.

하지만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예전에 살짝 선보였던 족보에도 없는 간보기 펀치였다.

준결승전은 5분 3라운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서유림은 시간을 충분히 활용했다. 마이티 무어의 펀치를 옆으로 흘려도 보고 몸으로 받아도 보며 실전 감각을 충분히 익혔다.

3라운드 중반쯤 되자 마이티 무어의 움직임이 크게 느려졌다.

하긴,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서유림을 잡으려고 많이 뛰어다니긴 했다. 빈 펀치도 엄청나게 많이 날렸다.

당연히 지칠 수밖에. 주먹을 뻗을 때마다 자세가 무너져서 빈틈도 훤히 드러났다.

서유림도 더는 뽑아먹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슬쩍 시간을 보니 3라운드 종료 1분을 남겨두고 있었다.

기회를 노리다가 빈틈을 노리고 크로스 카운터를 집어넣었다. 마이티 무어 입장에서는 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연속으로 들어가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유림이 재빠르게 달려가서 파운딩으로 경기를 끝마쳤다.

그와 동시에 관중들이 뜨거운 함성을 보내주었다.

곧바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마이티 무어 선수에게 MAN FC 케이지의 바닥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선언했었는데, 그대로 되었군요. 소감이 어떤가요?”

케이지 바닥 운운한 것은 사실 분위기 띄우려고 한 것이다. 경기를 마쳤으면 깔끔하게 털어내고 상대선수를 존중해줘야 한다.

그래야 관중들도 좋아하지.

“역시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이티 무어 선수에게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승리의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젊어서겠죠. 마이티 무어 선수는 제게 삼촌뻘이잖습니까? 기술보다는 체력에서 앞섰기에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패한 자에 대한 체면은 충분히 살려준 거겠지?

그럼 이제 준비한 선물을 펼쳐볼까? 가만, 임채모 선생님이 도착해 계셔야 하는데. 아! 저기 계시는군!

임채모가 케이지 아래쪽에서 언제든지 올라올 준비를 하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림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팬 여러분께 한 말씀 해주시죠.”

마지막 한 말씀은 너무 짧고, 3분 정도만 잡아먹어야겠다.

서유림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사회자를 가리켰다.

“제가 일전에 사회자님과 함께 팬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린 게 하나 있었습니다. 우승, 준우승 여부를 떠나서 두리랜드에 성금을 드리겠다고요.”

순간 사회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어차피 당신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서유림이 못 본 체하고 말을 이었다.

“사회자님께서 통 크게 1억 원을 성금하시겠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사실 그렇게 크게 성금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서 오늘 성금을 준비했습니다. 선생님 잠시 올라와주시겠습니까?”

임채모는 벌써 케이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종범도 커다란 판을 들고 올라왔다. 판에는 200,000,000원이라는 숫자가 크게 적혀있었다.

물론 돈은 통장 안에 있었다.

서유림이 한 손으로는 숫자가 적힌 판을, 다른 한 손으로는 통장을 들어보였다.

카메라가 그것을 줌으로 잡아주었다. 경기장 곳곳에 붙어있는 TV에 통장이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2억 원이 들어있는 통장입니다. 이건 제가 성의를 보이려고 만든 거고요. 이 자리에서 전달하고 싶어서 임채모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와!’하는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유림이 그 함성소리를 배경 삼아서 성금을 임채모에게 전달했다.

사회자도 함께 박수를 주었다. 웃고는 있지만 그리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다.

임채모가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화답을 해주었다.

역시 언변이 뛰어났다. 덕분에 장내에는 더욱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유림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후훗, 다됐군. 이제 결승전만 치르면 되는 건가?

25억 원이 코앞까지 다가온 듯했다.

MAN FC 토너먼트 결승전에 진출한 서유림.

그것도 미들급인데도 불구하고 두 체급이나 올린 무제한급에서 그런 쾌거를 이루었다.

아직 우승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중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려 2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두리랜드에 투척했다.

그러면 여기저기에서 방송요청이 쇄도해야 하는 것 아냐? 예능프로그램 섭외도 들어오고, 방송출연 요청도 들어오고, CF출연 요청도 들어와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토너먼트 상위로 진출할수록 오히려 인기가 줄어드는 듯했다.

서유림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림이 중국 등지에서 반짝 인기를 끌었던 것은 토너먼트 때문이 아니었다. YJY와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한상민이 자신의 힘으로 서유림의 출연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그냥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현재 MAN FC에서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선수는 권이슬이다. 미들급에서 오랫동안 왕좌를 지키고 있고, 화려한 트레시 토킹으로 경기 때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재능도 있다.

그런 권이슬조차도 방송출연은 많지 않았다. 격투기와 관련된 방송에나 찔끔찔끔 나오는 수준이었다.

이따금 예능에 출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연예계 친분 덕분에 까메오로 출연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서유림은 저 아래에서 찌그러져있는 게 맞는 거지. 그나마 이따금 CF도 찍고 방송도 출연하는 것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승하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경기가 제법 임펙트 있었으니까. 게다가 YJY와 임채모 때문에 이미 인지도도 상당히 올라갔으니까.

UFC에 진출해서 우승하면 더할 것이고, 복싱으로 명성을 날리면 정점을 찍겠지.

그리 먼 미래가 아니다.

조급히 생각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때를 위해서 조금씩 준비할 때다.

‘그래. 요즘 들어서 시간을 너무 낭비하고 있어. 자꾸만 나태해지는 거야.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 아리아나를 만나고 정령 아리안과 계약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의욕이 넘치다 못해 과할 정도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하고 싶었었다. 잠자는 네 시간가량을 제외하면 하루를 전투하듯이 살았다. 밥 먹는 것조차도 전투하듯이.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생활해야 할 것이다.

서유림은 시간이 남을 때마다 미친 듯이 운동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할 때처럼 운동할 여건이 안 될 때는 이어폰을 꽂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을 공부했다.

종종 서유림을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지하철에서 아가씨들이 많이 알아보았다.

“어머! 저 사람 어디에서 본 것 같지 않니?”

“맞아. MAN FC 선수잖아. YJY하고도 친한 사람. 이름이 서유림이던가?”

“맞네. 어머! 간지난다. 어쩜 저렇게 잘 빠졌지?”

“얼굴도 잘 생겼다.”

이어폰 볼륨을 제법 높여놓았는데도 그런 수군거림이 모두 들려왔다.

하지만 서유림은 모른 척했다. 그저 눈을 감고 이어폰의 어학강의에만 집중했다.

그러다가 문득 배낭에서 휴대폰 진동을 느꼈다.

대포폰의 진동이었다.

스팸문자가 아니라면 마태수와 같은 광명회 회원들이 문자를 날린 거겠지.

서유림이 기다리던 문자이기도 했다. 지금 철마산 아래 작업장에서 정일돈 정이돈 형제를 비롯한 돼지이모 핵심들을 추궁하고 있으니까.

‘지금쯤이면 뭔가를 좀 알아냈으려나?’

배낭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았다.

[드디어 약을 숨겨둔 곳을 실토했습니다. 지금 사람을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질긴 놈들이네. 그거 알아내는데 무려 닷새나 걸렸다.

‘그럼 이쯤에서 내가 나서면 되겠군.’

서유림이 지하철을 갈아타고 사릉역으로 향했다. 사릉역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철마산까지 뛰었다. 인근에 도착해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복면을 착용한 뒤에 창고로 들어갔다.

서유림은 창고로 들어갈 때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쪽문만 이용했다.

쪽문 주변에는 나무궤짝 같은 잡다한 물건들이 제멋대로 쌓여있었다. 창고 안에 널브러져있던 것들을 그곳에 모두 모아놓은 것이다.

서유림이 지시한 것이다. 일부러.

왜냐고?

분명 언젠가는 배신이 일어난다.

아마 마태수가 가장 먼저 움직이겠지.

그래서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서유림을 상대로 뭔가 작업을 할 생각이라면 여기에서 하라고 말이다.

숨을 곳이 많으니 매복했다가 공격하기 딱 좋잖아.

그러면 서유림이 대응하기 편하거든.

“주군 오셨습니까?”

마태수를 비롯한 광명회도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일돈 형제 앞에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서유림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의자 옆에는 물이 찰랑찰랑 들어있는 물컵이 놓여있었다. 지난번부터 서유림이 지시해놓은 것이었다.

<< 어떻게 되었나? >>

“실토한 곳을 수색하고 있는데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유림이 정일돈 형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정일돈이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틀림없이 거기 있습니다. 없을 리가 없어요.”

서유림이 물컵의 물에 손을 살짝 적셨다. 그리고는 정일돈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물방울이 총알처럼 날아가서 정일돈의 얼굴을 때렸다. 그러자 정일돈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아악!”

서유림이 다시 손에 물을 적셨다.

<<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면 이 물방울이 네 시력을 앗아갈 것이다. 마약은 어디에 숨겨두었지? >>

“정말입니다. 제가 이 꼴이 돼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틀림없이 그곳에 숨겨두었습니다. 이돈아. 맞지?”

그러자 정이돈도 애걸복걸하듯 머리를 굽실거렸다.

“틀림없습니다. 마약은 항상 그곳에 보관합니다. 만약 그곳에 없다면 69캐피탈에서······.”

거기까지 말한 정이돈이 얼른 말을 멈추었다.

정일돈도 깜짝 놀라서 정이돈을 바라보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째? 나는 벌써 들어버린 것을.

<< 계속 이야기해봐. 69캐피탈에 대해서.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