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약속은 지킨다 (1)
목요일 늦은 오후.
역삼동 사무실에 여섯 사람이 모여앉아 있었다. ‘돼지이모’를 운영하는 운영진들이었다. 물론 사채업 외에도 마약, 불법도박 등의 사업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정일돈, 정이돈 형제가 그중에서도 핵심이었다.
회의는 난항이었다. 새롭게 마약을 풀고 있는데 생각만큼 판매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너희 뭐야?”
“악! 씨발, 기습이다.”
“정문 지켜! 아악!”
정일돈 형제를 비롯한 운영진들이 다들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 그중 몇 명은 벌써 품안에서 칼을 꺼냈다.
특히 정일돈 형제는 벽에 걸려있던 일본도를 잡아서 칼을 뽑았다.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진검이었다.
일본도를 쥐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정일돈 형제 모두 십 수 년 간 검도를 수련한 검도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요즘 뒷골목의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광명회’라고 불리는 이상한 놈들이 파죽지세로 뒷골목을 점령해나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놈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문이 거칠게 열렸다.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다.
굳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바깥의 소란을 통해서 이쪽이 불리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고, 또한 아군이 문을 저따위로 버릇없이 열지는 않을 테니까.
정일돈 형제가 기다렸다는 듯 일본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온 자가 얼른 팔을 들어서 일본도를 막았다.
‘흥! 겨우 팔로 일본도를?’
정일돈은 칼이 팔을 자르고 놈의 어깨도 벨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상황은 다르게 돌아갔다.
깡!
‘이런! 팔목에 뭔가를 댔군!’ 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상대방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주먹을 뻗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복면인의 주먹은 정일돈의 명치에 정확히 꽂혔다.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이어서 이마에 번쩍 하는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다른 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러 명의 복면인들이 들어와서 사무실을 헤집었다. 다들 나름대로 어금니를 깨물며 저항하려 해보았지만, 상대방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명의 실력이 대단했다.
사무실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러자 마치 군계일학처럼 날뛰던 복면인이 복면을 위로 걷어 올렸다.
그 안에서 마태수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태수가 득의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후훗. 나도 주군처럼 조금씩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어가는군. 조금만 더 강해지면 되겠어. 그러면 굳이 주군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겠지.’
겨우 한 달 만에 이만큼 강해졌다. 그렇다면 한두 달만 더 지나면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주군을 베고 자신이 주군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제아무리 주군이라고 해도 분명 사람이었다. 다른 조직들과 싸울 때 그도 상처를 입었고 피를 흘렸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 역시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사람 하나 죽이는 방법이야 많다. 제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해도 예상치 못한 기습에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마태수의 입술에 걸린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후훗, 빨리 전국통일을 해야 하겠어. 내가 제2의 서방파를 만든다. 아니, 더 크게. 마피아와 야쿠자, 삼협회까지 흡수하고 말겠다.’
비슷한 시각.
서유림의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 올라갔다.
‘후훗, 마태수 이자식, 꿈도 야무지군!’
그 모습을 보고 채희라도 함께 웃었다.
“무슨 생각 해?”
무슨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생각을 조금 읽은 것뿐이다.
마태수의 하위정령을 힘껏 성장시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마태수의 생각을 조금 더 확실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서유림이 충분히 판을 키워놓으면 자신이 서유림을 죽이고 그 조직을 한입에 집어삼키겠다는 계획이다.
서유림의 예상에서 요만큼도 벗어나지 않은 계획이었다.
역시 단순한 놈들이라니까.
“자는 거야?”
서유림이 별다른 대답이 없자 채희라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서유림이 눈을 떴다.
“뭐 좀 생각하고 있었어. 벌써 도착한 거야?”
“응. 저기야.”
영화 촬영장이었다. 임채모가 주연 급 조연을 맡아서 출연하는 영화다.
현재시각은 오후 6시 30분.
오늘은 오후 씬만 촬영한다고 했다. 그러면 해가 지고나면 더는 촬영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곧 촬영이 끝난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시간적 여유는 없다. 곧바로 예능프로그램 출연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채희라가 반가운 표정을 하며 손가락을 뻗었다.
“어, 저기 오신다!”
서유림이 바라보니 임채모가 맞았다. 휴대폰을 만지면서 주차장을 향해 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서유림의 휴대폰이 울렸다.
‘나에게 전화를 거셨던 거군.’
서유림이 차량에서 내리며 휴대폰을 받았다. 한손을 크게 흔들어주었다.
“여깁니다, 선생님.”
임채모가 얼른 고개를 들더니 서유림을 발견하고 손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오랜만이군. 미안하네. 연락도 못하고.”
“저는 가끔 전화 드렸는데. 근데 거의 전화기가 꺼져있더라고요.”
“아! 그랬었나? 하하. 미안하네. 사실은 받기 싫은 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 와서 말이지.”
“받기 싫은 전화라고요?”
임채모에게도 그런 전화가 있나?
“그런 사람이 있네. 연예인으로 정치에 진출해서 가장 성공한 여석이지. 다음 대선에 출마할 생각에 나를 자꾸만 끌어들이려는 게야.”
아! 누군지 알겠다.
고영대.
호스트바 출신으로 활동하다가 능력 좋은 스폰서 만나서 연예인이 되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국회의원이 된 인물.
밖에서는 이미지도 제법 좋고 인기도 많은데, 임채모는 그를 무척 좋지 않게 평가하고 있었다.
아니, 대부분 연예인이 그랬다. 고영대 앞에서는 온갖 선한 웃음과 아부를 남발했지만, 정작 뒤에서는 ‘더러운 남창새끼’ 하면서 호박씨를 까는 것이다.
그런데 임채모는 아예 대놓고 고영대의 손을 뿌리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저도 좀 바빴습니다. 아주 가끔 안부 인사나 드리려고 전화 걸었었고요. 하하.”
“그랬었너? 바쁜 게 좋은 거지. 하하.”
임채모와 서유림이 서로의 손을 잡고 한참동안 함께 웃었다.
“그런데 저 아가씨는······?”
“안녕하세요. 채희라라고 해요.”
그렇게 채희라와도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 일정도 빡빡하시죠? 가면서 말씀 나누시죠.”
함께 차량에 올랐다. 실내가 널찍한 승합차를 준비했기 때문에 앞뒤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따로 식사하실 시간도 없으신 것 같아서 드실 것 좀 준비했습니다.”
김밥, 햄버거, 샌드위치, 치킨너겟 등속이었다. 서유림과 채희라도 함께 먹을 것이기에 양은 충분했다.
“고맙네. 잘 먹겠네.”
임채모가 음식들을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
임채모 역시 정령의 힘을 가진 상태다. 때문에 급히 먹는다고 체할 일도 없었고, 많이 먹는다고 소화불량에 걸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 활동을 너무 많이 하시는 것 아니에요? 적어도 주무실 시간은 비워두고 일하셔야죠.”
서유림이 임채모를 걱정해주었다. 임채모의 일과를 보면 하루에 서너 시간이나 잘까 싶을 정도로 스케줄이 빡빡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정령의 힘을 가졌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시키면 버티기 힘들 텐데.
하지만 임채모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원하게 웃어주었다.
“방송하다 보면 기다리는 시간도 제법 있네. 그때 잠깐잠깐 자면 충분해. 내가 원래 아무데나 뒤통수만 붙이면 잠을 잘 자는 체질이거든.”
“그럼 안심이네요.”
“그런데 어쩐 일인가? 아, 물론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마 토너먼트 준결승전이 내일모레였지? 지금이 가장 바쁜 때 아닌가?”
“그렇긴 하죠. 사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임채모가 말해보라는 듯 먹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선생님은 소속사 없이 활동하시던데 무슨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임채모가 껄껄 웃었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서유림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하겠다는 듯했다.
대답 대신 채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어느 기획사에서 나오셨나요?”
“아뇨. 제가 기획사에 소속된 것은 아니고요. 제가 잘 아는 분께서······.”
채희라가 ‘마루 엔터테인먼트’를 이야기하려다 멈칫했다. 서유림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온전히 맡겨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채희라가 서유림의 눈치를 보자 임채모가 알겠다는 듯 다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아직 정하지 못해서 안 들어간 것뿐이네. 몇 군데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지. 혹시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자네가 추천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들어가겠네.”
그럴 줄 알았다. 그런 게 싫어서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거다.
“그건 아니고요. 혹시 마루 엔터테인먼트라고 들어보셨어요?”
“들어는 봤지. 아, 자네가 YJY와 인연이 깊지?”
임채모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YJY는 이미 아시아를 뜨겁게 달구는 스타로 떠올랐고, 임채무가 그 소식을 모를 수는 없겠지.
“인연이 좀 깊긴 한데 그렇다고 마루를 잘 아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믿을만한 사람이 괜찮은 곳이라고 해서······.”
“알겠네. 마루와 계약하지.”
임채모가 더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벌써 결정한 거야? 그러면 내가 부담스럽잖아. 그렇게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가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면 일단 계약기간을 짧게 하세요. 저도 마루에 대해서 잘 모른다니까요. 그곳에서 활동해보시고 괜찮은 곳이다 싶으면 그때 장기계약 하시면 되겠네요.”
“좋은 생각이군. 한 2년 정도 계약하도록 하지.”
서유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뭐 일방적인 통보 하러 온 거나 마찬가지인 분위기가 되었잖아.
그 와중에도 채희라는 좋다면 활짝 웃고 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채희라가 괜찮은 곳이라면 틀림없이 괜찮은 곳이겠지.
“그리고 선생님. 혹시 일요일에 시간 좀 비워주실 수 있으세요?”
“일요일? 가만있어보자. 일요일에 무슨 일정이 있더라?”
임채모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인기 최고의 연예인이 수첩을 열어보지 않고도 일정을 기억할 수 있는 걸까? 특히 임채모는 활동이 워낙 많아서 기억하기 힘들 텐데.
아! 정령의 힘 덕분에 가능하겠구나. 서유림처럼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아졌을 테니까.
“오후에는 잠깐 시간을 낼 수 있겠군. 그런데 왜?”
“시간 되시면 준결승전에 잠깐 와주세요. 선생님께서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거든요.”
“도와줄 일. 그게 뭔가?”
토요일.
MAN FC 토너먼트 준결승전 장소는 장충체육관으로 예정되어있다.
오늘은 그전에 계체행사가 진행되었다.
당연히 대결을 앞둔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대놓고 상대방을 도발하라는 행사였다.
서유림의 준결승전 상대는 마이티 무어였다.
서유림이 가장 기대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왜냐고? 마이티 무어는 전직 복싱선수로서 이름을 날렸던 선수니까. 전성기 때에는 오직 복싱만 사용해서 일본의 K-1 우승을 여러 차례 이뤄냈고, 미국의 UFC에 진출해서도 제법 많은 승리를 챙긴 선수다.
물론 밀코 그로캅에 비해서는 이름값이 크게 떨어지지만, 그래도 복싱 실력만 놓고 본다면 이번 토너먼트 참가자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했다.
즉, 서유림의 복싱 연습상대로 최고라는 뜻이지.
“마이티 무어 선수. 이번 준결승전에 임하는 각오는 어떻습니까?”
“이번 토너먼트를 준비하면서 샌드백을 참 많이 때렸습니다. 그런데 내일 또 샌드백을 때리게 생겼군요. 상대 선수에게 미리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대신 초반에 빨리 끝내드리겠습니다.”
“재치 넘치는 답변이었습니다. 서유림 선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뭘 어떻게 생각해?
마이티 무어의 말을 듣는 순간 동상이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유림 역시 마이티 무어를 샌드백처럼 활용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초반에 끝내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마이티 무어와 충분하게 스파링하고 마지막 순간에 끝낼 것이다.
“마이티 무어 선수는 K-1이나 UFC의 케이지 바닥은 많이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MAN FC의 케이지 바닥은 아직 경험해보신 적 없죠? 내일 실컷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 정도면 제법 근사한 대답이 되었겠지?
마이티 무어도 재치 있는 답변이라는 듯 씩 웃어보였다.
역시 경험 많은 베테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선수들 같으면 이 정도 도발에 씩씩거릴 텐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걸 어째? 나 농담으로 한 것 아니었는데.
미안하지만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