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당신은 누구? (4)
서유림은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마태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복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서유림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서유림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정령의 힘으로 물을 제법 어렵게 컨트롤했는데도 체력의 소모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정령 아리안의 능력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마태수의 질문을 받고 나니 문득 좋은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이들에게 신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마음을 쉽게 품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종교만큼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하는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이비종교의 교주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자이되 종교는 아닌, 그런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는 게 좋겠다.
실제로도 그렇고.
호칭도 교주님보다는 ‘주군’이 훨씬 마음에 든다.
잠시 시간을 끈 서유림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 무엇을 더 확인하고 싶어 묻는 것이냐? 지금껏 네가 보고 들은 대로 믿으면 될 것이다. >>
“······아!”
마태수가 입을 벌리며 혼자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가볍게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렸다.
서유림이 고개를 힘차게 돌리며 불사파의 다른 조직원들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지?
확인할 수가 없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조직원 모두에게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필요했으니까.
사실 마음 같아서는 하위정령 하나를 이놈저놈에게 옮겨 다니게 하며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니,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놈들은 정령이 침투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정령은 침투하는 순간 그와 강하게 교감하게 되니까. 그것도 무척 강하게. 굳이 계약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만약 하위정령을 이놈 저놈의 몸으로 옮겨 다니게 한다면 그런 강한 교감을 강제적으로 끊어놓는 꼴이 된다.
당연히 정령이 받는 충격이 엄청나겠지
그러면 하위정령도 문제지만, 그 하위정령과 교감하고 있는 아리안에게까지도 영항을 미칠 수 있다.
만약 누군가의 몸에서 하위정령을 빼낸다면 그 충격을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굳이 하위정령을 사용하지 않아도 놈들에게 능력을 보여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서유림이 조직원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냐? >>
“우웁! 우웁!”
마태수를 제외한 다른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만 맹렬하게 흔들었다.
두 놈은 ‘이놈의 짓’이라고 말하듯 눈짓을 마구 주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놈들의 눈짓을 못 본 체했다. 놈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실을 만들고 싶었는데 스스로 구실을 주었으니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 네놈들도 뼈가 잘근잘근 부러뜨려줄까? >>
“우웁! 우웁!”
네 사람의 고개가 맹렬하게 흔들어졌다.
서유림이 그중 한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 깊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뼈를 부러뜨리지는 않겠다. 그래도 합당한 체벌은 받아야 할 것이다. >>
그리고는 체력을 살짝 흡수해주었다. 체력흡수 능력이 300이 넘었기 때문에 너무 무리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 적당량만 흡수해야 할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의 체력도 차례로 흡수했다.
그러자 조직원들의 눈빛이 벌써 달라졌다. 피곤함과 두려움, 혼란스러움이 복잡하게 뒤엉킨 눈빛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물을 컨트롤하면서 소모된 체력도 어느새 모두 채워졌다.
서유림이 다시 마태수를 바라보았다.
<< 네게 묻겠다. 필로폰은 어디에서 구했지? >>
“그, 그건······.”
마태수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 즉시 서유림이 마태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다고 힘을 적게 주지도 않았다.
한 번 걷어찰 때마다 뚜둑! 하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끄아악!”
그놈 참, 신음소리 한 번 거창하군!
<< 아직도 주인을 어찌 섬겨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구나. 다시 묻지. 어디서 구했나? >>
“대······ 대부업체입니다. 돼지이모라고 사채업을 주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구입합니다.”
<< 돼지이모라. 사무실이 어디에 있지? >>
“역삼동입니다.”
그러면 다음 타겟은 역삼동에 있는 돼지이모가 되겠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설프게 공격하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거래가 튼 곳이니 다음에 또다시 마약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마약도 돈도 모두 찾아낼 수 있겠지.
그때를 노리는 게 좋겠지.
<< 좋아. 그럼 음식을 넣어주겠다. 상처가 아무는 동안 네놈들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잘못들을 깊이 반성들 하고 있어라.
아!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내 이야기를 누설할 때에는 그 즉시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
서유림이 강하게 경고를 날리고는 지하창고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도상국이 보낸 청년이 별장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불사파 조직원들은 음식이라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별장을 나서는 서유림의 입술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서유림은 마태수를 믿지 않았다. 사람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고통과 이적을 겪었으니 잠시 동안은 서유림을 따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본성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면 놈은 버림받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
그놈이 서유림의 진정한 노예가 될 것이다.
물론 그놈도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마태수와 똑같은 신세가 되겠지만.
한상민이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사파가?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누구 짓인데?”
“그게 저도 잘······. 순식간에 들이닥쳐서 핵심 세 명을 순식간에 납치해갔다고 합니다. 벌써 사흘째 소식이 없습니다.”
“이런 씨발. 요즘 분위기 왜 이래?”
재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당이라도 불러서 굿이라도 한 판 벌여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금이 심하게 쪼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큰 자금줄이었던 대부업체의 실적이 큰 폭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민들레 때문이었다.
한상민이 은밀하게 운영하는 대부업체는 주요 고객이 유흥업소에 다니는 텐프로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민들레로 자리를 옮기면서 대출이 급감한 것이다.
여러 유흥업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들레가 특급 텐프로들을 모두 빼내가는 바람에 장사에 어려움이 심했다. 상납은커녕 현상유지가 힘들 정도란다.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들도 실적이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MAN FC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썼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칫 MAN FC 상금조차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금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민들레 때문이다. 가면 갈수록 민들레와 계약하는 텐프로들은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대부업체의 수익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룹 본사에 손을 내밀 수도 없고.
그러면 아버지 한유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누나나 동생들에게 그룹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들 수야 없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MAN FC를 성공적으로 키워내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 한유진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돈이 나올 구석이 없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젠장. 또 그 짓을 해야 하는 건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독립된 회사이기 때문에 설령 적발된다고 해도 꼬리를 깔끔하게 자를 수 있을 것이다.
한상민이 휴대폰을 들었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대포폰이었다.
상대방이 즉각 전화를 받았다.
- 네, 김병웁니다.
(주)썬푸드라는 식품회사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사장은 한상민이었고, 김병우는 단순한 바지사장일 뿐이었다.
“태국의 옥수수 통조림이 언제 수입될 예정이지? 태국에서 적재일이 언제야?”
한상민은 앞뒤 말 다 자르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길게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다. 한상민이 썬푸드의 실질적인 운영인이라는 사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몰라야 하니까.
그중 한 사람이 바지사장 김병우고, 다른 한 사람이 썬푸드 자재부 황상규 대리였다.
- 적재일이라. 잠깐만요. 확인해보겠습니다. 아, 이번 달 마지막 주 월요일에 한 콘테이너 적재될 예정입니다.
이번 달 마지막 월요일이라.
그 정도면 일정은 충분했다. 확실한 공급선도 마련되어 있으니 물건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재과 황 대리. 다음 주 일요일 오전까지 방콕으로 보내.”
- 알겠습니다.
김병우의 답을 들은 한상민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다시 비서 장성식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장 부장이 태국에 좀 다녀와야겠다. 일정이 촉박한 건 아닌데, 그래도 서둘러서 떠나도록 해.”
“태국이라면······!”
“가서 밀가루 한 포대만 수입해와!”
한상민과 통화를 마친 김병우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자식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런 일이 아주 가끔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진그룹에서 통조림을 몇 상자씩 통째로 빼가곤 했었다.
특별한 표시가 되어있는 상자였다. 아무래도 통조림 안에 뭔가 다른 게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보세창고에 들어오자마자 식품검사도 받기 전에 물건을 바꿔치기 해가니 도무지 내용물을 알 수가 없었다.
‘괜찮겠지 뭐. 설마하니 대기업 회장의 아들씩이나 되는 한 실장이 이상한 짓이라도 하겠어?’
* * *
서유림이 별장을 다시 찾은 것은 마태수에게 정령을 침투시키고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별장은 다시 텅텅 비었다. 마태수 등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청년도 오늘은 서유림의 지시를 받고 자리를 비웠다.
서유림 역시 지난번처럼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목소리 역시 거칠거칠하면서도 울림이 큰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마태수 일당은 그때까지도 온몸이 묶인 상태였다.
<< 몸은 다 회복되었겠지? >>
“예, 주군.”
마태수는 정말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최고의 병원에서 최고의 의료진을 만난다고 해도 몇 달은 걸려야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나마도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온몸의 뼈가 잘근잘근 부러진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불과 일주일 만에 깔끔하게 나았다.
물론 아직 100%는 아니었다. 하지만 80% 이상 치료되었다고 확신했다.
물론 통증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복면의 사내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별한 존재임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
<< 좋다. 그러면 이제 너를 놓아주겠다. 너는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것 외에는 어떤 짓도 벌이지 마라. 무슨 짓을 하려거든 반드시 내게 먼저 보고하라. 알겠나? >>
“예, 주군.”
일단 대답은 했지만, 과연 지켜질까? 마태수 본인조차도 의심스러웠다.
‘내가 아무도 몰래 일을 저지르면 제가 무슨 수로 알겠어?’
그냥 따르는 척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 서유림이 마태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다. 마태수의 심장을 찌르는 이야기를 했다.
<< 네가 한 짓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나는 언제 어디서건 네가 하는 짓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 만약 내 명령을 어기고 네 멋대로 일을 꾸민다면 그땐 평생 폐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
마태수는 순간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거짓말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지금까지 겪은 일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마태수가 재빨리 수긍하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놓아준다고 했으니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질문 한 가지 정도는 용납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기······.”
마태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뭐냐? >>
“불사파 식구가 마흔 명이 넘습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자면 돈이 필요한데 어떻게······?”
서유림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하지만 그 대상은 조금 달랐다. 마태수가 말하는 조직의 식구가 아니라 서유림을 위한 군대였다.
이놈들처럼 죄 없는 사람들의 고혈을 빠는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이런 일을 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
그렇다고 서유림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낼 수도 없다. 그럴 돈도 없고, 그런 식으로 운영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답을 얻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죄 없는 사람들의 돈은 건들지 않는다. 대신 죄 많은 놈들의 죄 묻은 돈을 건든다.
그 돈으로 운영하면 될 것이다.
당장 눈앞의 마태수 같은 놈들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중요한 법이다. 일단은 마태수를 실컷 이용해먹어야지. 그러면서 마태수의 재산을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을 것이다.
바닥까지 싹싹.
그리고 지금은 군대를 만들고 정비하는 일이 먼저다. 떨거지들은 떨쳐내고 진심으로 충성을 다할 자들만 남게 하는 것이다.
<<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다. 네가 왜 다른 사람들 밥벌이를 걱정하는 것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