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01화 (101/196)

# 101

당신은 누구? (2)

“회사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광고를 찍을 때도, TV에 출연할 때도, 어디 강의를 나갈 때도 일일이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요. 게다가 시간도 너무 많이 빼앗기고요.”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을까?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섭섭하겠지. 나는 휴가지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놈이라고. 그 값도 받아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다른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회사에 출근할 필요도 없고, 방송활동의 자유도 보장하면서 월 1천만 원 이상의 훈련지원금도 보장하고요. 제가 이런 조건을 뿌리치면서까지 명진식품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거짓이다.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조건이 저만큼 좋진 않았지.

하지만 당신이 알게 뭐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라고.

한명진이 깊이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화끈한 성격답게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았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돼. 방송활동의 자유도 보장하지. 그리고 훈련지원금도 액수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지만, 보장하겠어. 그러면 남아있겠나?”

그 정도면 80%는 된 것 같다.

하지만 난 100%를 다 얻어야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뭔가?”

“제가 그동안 구매팀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권진아씨 때문이었습니다.”

“권진아?”

한명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사장이나 되는 사람이 직원을 일일이 다 기억하진 못하겠지. 게다가 권진아는 인턴으로 겨우 1년 근무하다가 유진그룹으로 간 사람이니까.

“아! 권진아! 유진그룹 감찰팀!”

이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다.

“맞습니다. 그 권진아씨요. 권진아씨가 원하면 아무 때고 명진식품 구매팀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사표 철회하는 걸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습니다.”

한명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명진식품 내의 인사가 아니라 유진그룹 차원의 인사문제니까.

막말로 유진그룹에서 No 해버리면 제아무리 한명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그럼 저는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서유림이 당당하게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비서 장성식의 보고에 한상민이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

“이런 씨발. 이게 말이 돼?”

제대로 밟아주라고 조폭을 보냈더니 오히려 자신들이 깨져서 돌아왔다.

쪽팔리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제는 오히려 서유림이 갑질을 하고 있었다. 명진식품을 향해서 황당한 요구조건을 내민 것이다.

한상민이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출퇴근시간의 완전한 자유 보장]

즉, 1년 365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었다.

[훈련지원금 월 1천만 원 보장]

일도 안 하고 돈만 받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도둑놈 같으니라고.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했다. 서유림 덕분에 명진식품은 물론이고 유진그룹조차도 엄청난 홍보효과를 누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서유림이 회사를 그만두면 반대효과가 너무 컸다. YJY문제와 관련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그러니 월 1천만 원으로 입막음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지.

설마하니 서유림의 인기가 영원히 지속되겠는가?

어차피 6개월 정도면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YJY문제도 슬며시 누그러질 것이고, 그때는 서유림이 이상한 방향으로 떠든다고 해도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서유림 본인이 타격을 입겠지.

지금까지 훈련지원금 잘 받고 다니던 회사 배신 때렸다고 말이다.

‘그래. 6개월만 참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마지막 조건은 너무도 괘씸했다.

[권진아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명진식품 구매팀으로 복귀시킬 것]

이건 대놓고 한상민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만약 이 조건을 들어줘서 권진아가 당장 구매팀으로 복귀한다면 왠지 서유림이게 얼굴을 짓밟히는 굴욕감을 느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어쩌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권진아가 정말 구매팀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까?’

전에는 서유림과 깊은 관계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서유림과 채희라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감찰팀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잡아둔다면 마음이 더욱 굳어지겠지. 선물을 듬뿍 안겨주는 거다.

한상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권진아가 좋아할만한 선물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권진아씨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비서 장성식이 얼른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권진아가 감찰실장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권진아가 절제된 동작으로 인사했다.

깔끔한 정장차림이었다. 머리카락도 뒤로 질끈 동여매서 무척이나 깔끔했다.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의 모습이랄까?

이렇게 보니 청순함과 순결함에 더해서 지적인 매력까지 느껴졌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어.’

권진아는 보면 볼수록 매력이 더욱 살아나는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품을 때가 아니다. 어찌 보면 한상민에게 위기의 순간이 아닌가?

“앉지. 차 한 잔 해.”

한상민이 부드러운 미소로 대화를 시작했다. 권진아를 위해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매너를 다 보여주었다.

권진아 입장에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한상민이 세상착한 관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권진아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본론을 꺼내도 될 것 같다.

“서유림씨하고는 계속 잘 만나고 있어?”

그러자 권진아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주세요. 이미 끝난 사이에요.”

한상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속마음을 들킬 뻔했다.

“그랬군. 내가 미안하네. 괜한 정보를 줘서…….”

“아뇨. 오히려 감사해요.”

“그럼 명진식품 구매팀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겠군.”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런. 아직도 감찰팀으로 끌려온 걸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직원들은 감찰팀에 오지 못해서 서로 난리인데.

정식 인사이동이 아닌 파견이라서 그런 건가?

“아예 이참에 유진그룹으로 소속을 옮기는 건 어때? 한 1년쯤 감찰팀에서 업무 배우고 나면 원하는 부서로 보내줄 수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니. 이런 파격적인 조건이 어디 있다고?

아무래도 선물을 조금 더 얹어줘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해. 그러면 내가 권진아씨 가족 모두 태국여행 한번 보내드릴게. 한 5박7일 정도로 말이야.”

그러자 이번 선물에는 권진아게 크게 반응했다.

“어머, 정말요?”

역시 장성식의 보고가 맞았다. 권진아가 엄청난 효녀라더니.

한상민의 입술이 흐뭇하게 찢어졌다.

“당연하지. 태국 여행은 4월 전에 가야 해. 우기에 걸리면 별로 재미없어요. 다들 여권은 가지고 계시지? 내가 3월 말경으로 해서 일정 잡아줄게.”

“감사해요.”

와다다다-

서유림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자전거 모드는 가파른 언덕. 처음 시작할 때는 대수롭지 않았지만, 30분 째 같은 모드에 놓고 전속력으로 달리려니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웬만하면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흘끔 보니 권진아의 이름이 보였다.

‘조금 있다 다시하면 되지 뭐.’

서유림이 자전거 타기를 멈추고 휴대폰을 받았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라서 말하기도 힘들다.

“하악. 하악. 여보세요.”

- 어머,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렇게 숨이 차요?

“하악. 하악. 운동하고 있었어. 후우우.”

서유림이 심호흡을 가쁘게 했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숨이 가쁜 현상도 빠르게 진정되었다.

- 오늘 한상민 실장님하고 이야기했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랬군.

사실 조금은 뜻밖의 선택이었다. 기회를 주면 명진식품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유진그룹에 남기로 했다.

하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겠는가? 권진아가 그렇게 선택했으니 존중해줘야 하겠지.

“잘됐네.”

- 덤으로 선물도 받았어요. 온가족 태국여행 보내준대요. 대리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이에요.

그건 조금 뜻밖이다. 어쨌건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나중에 밥 사.”

- 호호, 알겠어요. 시간만 내세요.

간단하게 통화를 마쳤다.

다시 자전거를 타려고 올라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서유림을 만류했다.

“넌 많이 탔잖아. 이제 나 좀 타자.”

30분밖에 못 탔는데.

하긴, 겨우 한 대 가지고 세 명이 함께 쓰려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아무래도 집안에 사이클 몇 대 더 사놔야겠다.

“그러세요. 전 좀 뛰고 올게요.”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명진식품은 서유림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

훈련지원금도 흥정을 하겠다는 마음에 조금 세게 불렀는데, 전혀 깎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

월 1천만 원.

혹시 흥정하는 과정에서 서유림이 다른 회사와 계약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던 듯하다.

덕분에 낮 시간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낮부터 체육관에서 살기도 하고, 북한산도 수시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채희라에게서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 놈들의 위치를 파악했어. 지금 모두 피아노에 모여 있어.

“지금?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아냐? 미리 준비할 시간은 줘야지.”

- 이놈들이 정해놓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서 일정을 사전에 파악하는 게 쉽지가 않아. 지금은 어렵겠지?

어려울 것까지는 없다. 사실 크게 준비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가서 놈들을 잡아오면 그만이다.

“아냐. 지금 하자. 어차피 한두 시간 내에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 아냐?”

- 그럴 것 같아. 그런데 핵심들이 다 모여 있어서 지키는 놈들도 제법 많을 것 같아.

“상관없어. 내가 지금 피아노로 갈 테니까 그때 그 승합차와 A팀만 동원해줘.”

A팀이란 도상국이 이끄는 일곱 명의 정예들이었다. 싸움실력보다는 완력 위주로 뽑은 자들이었다.

- 알겠어.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작은 배낭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배낭 안에는 이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상대는 불사파.

채희라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하의 나쁜 놈들이었다. 돈만 주면 사람을 테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해준다고 했다.

게다가 마약에도 손을 대는 놈들이었다.

한마디로 인정을 베풀 이유가 없는 놈들이라는 뜻이지.

오히려 잘 됐다. 오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조금 끔찍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거든. 게다가 저런 악독한 놈들을 교화시킨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유림이 가볍게 주먹을 풀었다.

잠시 후 피아노 인근에 도착했다.

도상국의 A팀이 타고 있는 승합차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15인승이기 때문에 서너 명 정도 더 태워도 공간은 충분했다.

“형님 오셨어요?”

“그래. 준비는 됐지?”

“네.”

도상국의 A팀이 짧게 대답하면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서유림도 같은 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피아노로 향했다.

“누구냐?”

피아노 종업원들이 깜짝 놀라서 앞을 막아섰다. 지난번에 똑같은 방식으로 사장이 납치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조무래기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핵심 서너 명만 잡아서 승합차에 태우면 끝나는 일이다.

서유림이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옆으로 밀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종업원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불사파 놈들이군.

대략 일곱 명쯤 되는 것 같다.

삼단봉을 펼쳐서 간단하게 제압하며 룸으로 들어갔다.

“꺄악!”

“뭐야?”

이런저런 잡소리가 난무했다.

하지만 서유림도 A팀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저 불사파 핵심이 맞는지만 확인했다.

사진에서 본 얼굴과 일치했다.

서유림이 불문곡직 달려들어서 삼단봉을 휘둘렀다. 그중 보스라는 마태수를 때릴 때에는 힘을 강하게 줘서 아예 팔목을 부러뜨려버렸다.

놈들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고, A팀이 놈들을 들쳐 멨다.

서유림이 다시 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놈들도 이번에는 흉기를 들며 저항했다.

하지만 서유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슬립다운 마법과 삼단봉을 조합시키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승합차를 타고 피아노를 떠났다.

승합차는 곧장 별장으로 향했다. 총 세 명을 잡아왔는데 모두 지하창고에 가둬두었다.

“수고했어. 다들 그만 가봐.”

“저희가 더 도울 일은 없는 겁니까?”

물론 없다. 지금부터 할 일은 누구도 몰라야 하는 일이니까. 도상국조차도.

서유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나중에 전화할 때 목소리가 이상해도 놀라지 마.”

“예? 목소리요?”

“그런 게 있어. 음향효과 좀 사용할 생각이거든.”

“……알겠어요.”

도상국이 머리를 긁적이며 A팀과 함께 별장을 떠났다. 별장에는 지하창고에 갇힌 놈들을 제외하면 서유림 혼자만 남은 셈이었다.

모두 온몸이 꽁꽁 묶여있기 때문에 탈출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서유림은 시간을 충분히 보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온 옷과 두건 같은 것을 꺼내서 외관을 치장했다.

치장을 마치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변했다. 옷은 꼭 천주교의 사제복 같았고, 머리에 뒤집어쓴 두건은 고깔모양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흰색이었다면 누가 보더라도 미국의 KKK단이라고 착각할만한 외관이었다.

마지막으로 전신거울 앞에 서서 외관을 점검했다.

서유림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서 조폭들을 상대할 것이다. 그러자면 조폭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군.’

비로소 지하창고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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