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복수는 나의 것 (4)
“고마워. 조만간에 신세 갚을게.”
-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신세 갚아야죠. 대리님이 이런 곤욕을 치르시는 것도 모두 저 때문인데······.
그건 아니란다. 권진아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이렇게 틀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경찰 문제도 그렇고 YJY 문제도 그렇고 권진아 때문에 벌어진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내 걱정은 하지 마. 잘 대비할게.”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곰곰이 생각했다.
한상민 이놈을 어떻게 하지?
서유림이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언제고 뒤통수를 얻어맞을 것 같았다. 돈이 넘쳐나는 놈이니 이번 일을 막아낸다고 해도 계속해서 뒤통수를 노릴 것 아닌가?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오히려 그놈들을 손에 넣으면 되겠구나!’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굳이 채희라의 정보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조폭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상민이 돈으로 산 조폭을 서유림이 움켜쥐면 그만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걸려드는 놈 없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입안에 떠 넣어주려고 하다니. 고맙기도 해라.
그렇다면 오히려 서유림이 덫을 놓아주는 게 낫겠다. 저쪽이 일을 결행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을 결행하도록 구실을 만들어주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할 테니까.
한상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유림이 곧장 채희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오빠.
“이번 주말이 토너먼트 16강전이잖아.”
- 알아. 이번에도 상해에서 열린다며?
“16강전 끝나고 우리 강원도 팬션 같은 곳으로 여행이나 갈까? 한 2박3일 정도로.”
- 갑자기 웬 휴가?
“사실은 푸르름 대표 한상민이······.”
서유림이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채희라는 눈치가 빨라서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 알겠어. 근데 오빠, 시간 돼?
“휴가 내면 돼지. 너도 나하고 일정 맞춰서 직원들한테 미리 공표해놔. 2박3일 휴가 다녀온다고.”
- 알겠어.
다음날.
서유림이 출근하자마자 휴가계획서를 올렸다.
배기열 팀장이 조금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 겨울에 여행을 다녀온다고요?”
한동민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때 서유림에게 된통 당한 후로는 서유림의 그림자만 봐도 어깨를 움츠리는 듯했다.
저렇게 하고 있으니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저러다가 조금만 기를 세워줘도 옛날 버릇이 나올 게 분명했다.
너는 그렇게 찌그러져있는 게 가장 좋겠다.
“여자 친구도 저도 사람 많은 걸 싫어해서요. 휴가철에 다녀오는 것보다 이렇게 한적할 때 다녀오는 게 낫습니다. 회사 일에 지장이 없도록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만 휴가를 내겠습니다.”
어차피 화요일까지는 출장이다. 즉 목요일까지 쭉 쉬겠다는 얘기지.
물론 팀장은 토를 달지 못했다. 서유림은 이미 명진식품에서 귀한 몸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서유림은 휴가철에 제대로 휴가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 월차를 사용한 게 전부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이틀 후.
회의를 다녀온 배기열 팀장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서유림 대리. 회사에서 특별포상 개념으로 이번 휴가비 일체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서유림이 반가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뭔가 꿍꿍이가 있군. 어쩌면 한상민의 술책일 수도 있겠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면 알겠지.’
“정말입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휴가 장소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면 회사에서 팬션 비용과 식사비용 일체를 지불할 거예요. 대신 보고서 형태로 올리세요. 회사에서도 예산처리 근거는 필요하니까.”
그런 거였군.
한상민의 노림수가 분명했다. 장소를 정해주면 미리 준비를 해놓거나 아니면 나중에 기회를 노리겠지.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알겠습니다.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휴가계획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번 주말에 토너먼트.”
배기열 팀장이 조금은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말씀하세요.”
“설마 또 YJY 노래를 입장곡으로 사용하는 건 아니겠죠?”
뭐지? 이러면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설마 휴가비를 회사에서 제공하겠다는 이유가 테러를 위한 게 아니라 ‘입장곡’ 로비를 위한 거였나?
그럼 곤란한데.
확인할 방법은 있다. 보란 듯이 삐딱선을 타는 거다. 그런데도 휴가비 일체를 제공한다면 그건 100% 테러가 목적이겠지.
“아뇨. 당연히 YJY 노래를 입장곡으로 사용할 겁니다.”
서유림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배기열 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그래야만 하겠어요?”
“예.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정도면 더는 설득하려 들지 않겠지.
배기열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유림이 쐐기를 박았다.
“휴가비 일체를 제공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 반납하겠습니다. 제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 그건 아니에요. 단지 내 개인적으로 물어본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요.”
개인적으로 물어본 거라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건 그것과 상관없이 휴가비를 제공하겠다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한상민이 일을 꾸미는 시점은 이번 휴가가 될 것이다.
일요일, 중국 상해.
상해종합체육관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차량과 사람이 뒤엉켜서 말 그대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MAN FC 토너먼트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YJY 때문이었다. YJY가 이번 16강전에도 서유림과 함께 등장할 거라는 소문이 잔뜩 퍼진 것이다. 중국측 MAN FC 운영자 측에서 고의로 퍼뜨린 소문이겠지.
그래서 YJY를 보겠다고 찾아온 팬들이 이렇게 몰린 것이다.
덕분에 MAN FC 토너먼트는 대 성공이었다. 비싼 입장권은 예약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동이 났고, 각종 방송매체도 서로 경기를 중계하겠다며 돈을 지불했다.
서유림의 몸값이 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미 계약이 완료된 상황이기 때문에 대전료가 올라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접이 달라졌다. 경호도 훨씬 강화했고, 대기실도 가장 크고 좋은 곳을 잡아주었다. 한마디로 서유림을 위해서 모든 편의를 다 제공했다.
물론 한상민이 한 짓은 아니다. 이번 대회 운영을 중국 측에 모두 맡겨놓았기 때문에 한상민은 그저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유림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제한하고 싶었지만, 한상민의 권한 밖 일이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서유림의 경기는 토너먼트 마지막 순서였다. 한마디로 밀코 그로캅을 제치고 메인이벤트를 장식한 것이다.
입장 순서도 서유림이 마지막이었다.
서유림은 이번에도 개량된 퓨전 하회탈을 썼다. 서유림과 함께 등장하는 여덟 사람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입장곡은 당연히 YJY의 노래였다. 경쾌하고 강렬한 비트와 함께 모두가 춤을 추면서 케이지로 향했다.
경기장은 함성으로 뜨거웠다.
아가씨 팬들도 엄청나게 몰려온 듯했다. YJY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소리가 경기장에 가득할 정도였다.
관중들 중에도 퓨전 하회탈을 쓴 사람들이 많았다. 누군가가 벌써 제작해서 판매하고 있는지 시중에서 단돈 1만 원이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품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특허라도 내놓을걸.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겠지? 경기 끝나고 YJY에게 특허 내서 돈 좀 벌라고 해야겠다.
서유림을 비롯해서 하회탈을 쓴 사람들이 계단 중간지점에 섰다. 널찍한 무대가 마련된 곳이었다.
장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지난번 32강전에서도 정확히 이곳에서 YJY가 하회탈을 벗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연호하기 시작했다.
“YJY.”
“YJY.”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YJY가 이 자리에 없으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정확히 세 명이 하회탈을 힘차게 벗어던졌다.
YJY멤버들이었다.
그러자 경기장에 사람들의 함성이 폭죽처럼 폭발했다.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함께 하회탈을 쓰고 있는 서유림의 심장이 다 요동칠 지경이었다.
서유림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하회탈을 벗었다.
그리고 주어진 5분의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며 입장을 완료했다.
이제부터 진지해질 시간이다.
상대는 브라질 출신의 110kg에 달하는 거구.
납득할 수 있으면서도 멋진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화려한 입장과 달리 경기는 너무도 허무하게 끝났다. 경기가 시작되고 30초 정도 만에 서유림의 원투 스트레이트가 상대의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그러자 무려 110kg에 달하는 거구 파이터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관중석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터뷰가 생략될 수가 있나? 게다가 서유림은 메인이벤트나 마찬가지인 마지막 경기 승자였다.
YJY도 어느새 케이지 인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터뷰 없이 서유림을 퇴장시킨다면 MAN FC가 흥행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물론 한상민은 아래쪽에서 연신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저러다가 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목에 상처 나겠다.
하지만 사회자는 한상민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이크를 들고 서유림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인터뷰가 진행되긴 했지만, 장내가 너무 시끄러워서 누구도 서유림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서유림이 결국 YJY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러자 관중들이 다시 한 번 뜨거운 함성을 내질렀다.
YJY는 서유림과 어깨동무한 채 관중들의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역시 무대매너가 뛰어난 자들이었다. 손으로 관중들을 진정시키자 어느새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제야 YJY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유림 선수는 지금의 YJY를 만들어준 분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가 인기를 조금 얻었다고 해서 그런 고마움을 잊어서야 하겠습니까?
저희는 서유림 선수가 입장할 때마다 마음만이라도 늘 곁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서유림 선수가 토너먼트 결승까지 진출한다면 저희도 반드시 함께 입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서유림 선수, 많이 응원해주세요.]
와아-
YJY가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상민이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지에서 가장 가까운 VIP석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너무도 잘 보였다.
한상민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YJY의 인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올랐다.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기관차였다.
서유림의 인기도 마찬가지였다. YJY 효과에 매 경기 1라운드 KO라는 진기록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니, 서유림 본인에 대한 기대감도 뜨거웠다.
이미 밀코 그로캅의 인기를 넘어서서 말 그대로 토너먼트 진출자들 중에서 가장 핫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럴수록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와 한상민을 향한 대중의 비난은 거세졌다.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와 YJY 사이의 일들이 모두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YJY와 서유림의 인기가 뜨거워질수록 속이 더욱 타들어갈 수밖에.
서유림이 빨리 탈락해야 저 꼴을 더는 안 볼 텐데.
방법은 있었다.
‘이번에 저 새끼 다리를 부러뜨리던지 해야겠어.’
그러다가 문득 YJY와 눈이 마주쳤다.
YJY가 놀리기라도 하듯 한상민을 향해 승리의 V자를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카메라가 일제히 한상민을 향했다.
경기장에 설치된 여러 대의 TV와 스크린에도 한상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갑자기 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감했다. 도망칠 수도 없고.
한상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오지도 않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YJY를 향해 손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귀국하자마자 그년하고 영월 팬션으로 휴가 다녀온다고 했지? 개새끼들. 그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