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복수는 나의 것 (3)
서유림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도 파격적인 인사에 혀를 내둘렀다.
“와! 이게 뭐야? 그룹 감찰실 파견?”
“인턴생활 1년밖에 안 한 친구가 뭘 할 수 있다고 감찰실로 파견을 보내? 차라리 나 같은 사람을 보내주지.”
몇몇 사람은 권진아를 흉보기도 했다. 특히 여자들.
“그러게 말이야. 하여튼 여자는 얼굴이 무기라니까. 보나마나 얼굴로 들이밀었겠지 뭐.”
“권진아씨 그렇게 안 봤는데,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반대로 벌써부터 권진아에게 아부를 떠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구매팀 직원들은 그 현상이 심했다. 권진아가 감찰실로 파견된 이유가 한상민 때문임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권진아에게 잘 보여야 했다. 어쩌면 권진아가 한상민과 깊은 관계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만약 권진아가 그동안에 쌓였던 섭섭한 감정을 터뜨리기라도 한다면 그보다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테니까.
오영훈 주임은 아예 대놓고 용서를 구했다. 말투도 어느새 존대로 변해버렸다.
“권진아씨. 내가 그동안 조금 심했었죠? 이해해줘요. 처음 들어왔을 때 그렇게 해야 업무도 빨리 배우고 그러거든요. 다 권진아씨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요.”
권진아는 한숨만 나왔다.
“아니에요. 이해해요.”
좋은 말로 대답해주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사실 이번 인사발표로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권진아였다. 정식직원이 된 건 너무 좋은데 감찰실로 끌려가다니.
한상민이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런 파격적인 인사로 자신을 흔들 줄은 몰랐다. 감찰실로 끌려가면 한상민에게 무슨 일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것이 너무도 불안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생각이 달랐다.
‘잘됐군!’
물론 권진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권진아는 아직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모르니까.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니까. 한상민이 권진아를 어쩌기 전에 서유림이 먼저 한상민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테니까.
아! 오해는 하지 마. 권진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이건 순수하게 나와 한상민 사이의 문제야. 풀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권진아는 그냥 덤으로 혜택 보는 정도랄까?
권진아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는 서유림이 슬쩍 뒤따라갔다.
권진아는 커피를 뽑아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혼자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서유림이 인기척을 흘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허흠.”
“어머, 대리님 오셨어요?”
“후훗, 고민되겠네.”
서유림이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권진아는 오히려 시원하게 대답했다.
“고민될 것까지는 없어요. 그냥 가면 되죠.”
조금은 뜻밖의 반응이었다. 눈물이라도 터뜨리면 안아줘야 하나 말아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
“그때하고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어떻게?”
“지난번에 간다고 했으면 한 실장님 제안을 제 의지로 수용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무슨 짓을 꾸미건 암묵적으로 동의하겠다는 식이 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끌려가는 거잖아요. 설마하니 대그룹 회장 아들이나 되는 사람이 회사 직원을 강제로 어떻게 하겠어요?”
권진아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술자리만 조심하면 되겠죠. 저만 처신을 잘하면 별일 없을 거예요.”
그럼. 당연히 별일 없겠지. 별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조치한다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혹시 무슨 일 있겠다 싶으면 연락하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울 테니까.”
“감사해요, 대리님.”
며칠 후.
“어서 먹어.”
한상민이 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권했다.
하지만 권진아는 앉은 자리가 불편할 뿐이었다. 차라리 그냥 박차고 뛰어나가 버릴까 싶을 정도로.
한상민 실장과 단둘만의 식사라니.
“······예.”
권진아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었다.
한상민이 쓸데없이 매너를 보인다. 바다가재 요리인데 권진아가 먹기 편하도록 음식을 손질해준다.
그러다가 슬쩍 흘리듯 이야기했다.
“그런데 권진아씨는 서유림 대리가 다른 여자 만나고 있는 건 알고 있어?”
“······예?”
권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누가 봐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한상민이 혀를 찼다.
“저런. 쯧쯧쯧. 몰랐던 모양이네.”
모르고 있긴. 사실 서유림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권진아도 알고 있다. 강은영이 서유림에게 접근했다가 포기한 이유도 그 때문이니까.
아마 명진식품 여직원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일 거다. 다들 서유림과의 핑크핏 사랑을 꿈꿔봤으니까.
그래서 늘 조마조마했었다. 한상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그러면 자칫 권진아의 거짓말이 들통 날 수도 있으니까.
“둘이서 아주 깊은 관계인 모양이더라고. 모텔도 자주 들락거리고.”
이 자리, 너무 불편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권진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못 들은 체 할 수도 없고.
만약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한상민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권진아가 서유림의 여자 친구라면 한상민의 이런 이야기에 발끈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겠지.
권진아가 차갑게 이야기했다. 이런 연기까지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거짓말 하지 마세요!”
“거짓말이라고? 후훗.”
한상민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서류철 하나를 권진아에게 건네주었다.
음식점에 웬 서류철을 가지고 왔나 싶었는데, 권진아에게 보여주려고 가지고 왔었던 모양이다.
보고 싶지 않다. 내용이야 빤할 테니까.
어쩌면 망측한 사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을 테니까.
권진아가 다급한 척하며 얼른 서류철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그런 망측한 사진은 없었다.
대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녀의 사진이 있었다. 하나같이 그런 모습인데 다정하게 걷기도 하고, 함께 모텔로 들어가는 사진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서유림의 얼굴이 훤히 드러난 것도 있었고, 여자 혼자 찍힌 사진도 있었다.
와! 여자 정말 예쁘다. 이 정도 미인이니까 서유림 같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대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 채희라라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텐프로지.”
텐프로?
이번에는 조금 놀라웠다.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고.
권진아의 표정을 읽은 한상민이 더욱 흉물스럽게 웃었다.
“서유림 대리. 알고 보니 텐프로의 기둥서방이더라고. 정말 크게 실망했어.”
권진아는 한상민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저 있지도 않은 말로 서유림을 흉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 친구 이야기는 사실이겠지.
그래도 크게 화나고 실망한 척했다.
“말도 안 돼요.”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보고도 못 믿겠어?”
그러고 보니 여자 혼자 찍힌 사진 중에는 유흥주점을 드나드는 모습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실이란 말인가?
“기분이 어때? 화나지 않아? 복수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화가 나야 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복수하고 싶어야 하는 상황이다.
권진아가 서유림의 여자친구라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연기해야 하겠지.
하지만 권진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한상민이 대신 복수해주겠다며 서유림에게 해코지할 것만 같았다.
그저 큰 충격을 받은 척하면서 사진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런데 한상민은 권진아의 대답도 필요 없는 듯했다.
“후훗, 내가 대신 복수해주지.”
순간 권진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한상민 실장은 이미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생각해보니 한상민이 서유림에게 복수할 명분은 차고도 넘쳤다. 당장 YJY 문제만 해도 한상민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하니까.
권진아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변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서유림을 위해서 동참해주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래야 한상민의 계획이라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서유림에게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요?”
“간단해. 돈 좀 풀면 이런 연놈들 손봐줄 놈들은 많으니까.”
다시 한 번 심장이 뚝!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듯했다. 폭력배들, 흔히 말하는 조폭을 동원하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면 큰일인데.
어떻게 해야 서유림을 도울 수 있을까?
잠시 머리를 굴리던 권진아가 한상민에게 부탁했다.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그러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일이 치러질지 미리 알 수 있겠지.
하지만 한상민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후훗, 왜? 시간과 장소라도 알고 싶어서? 그러면 서유림 대리한테 미리 이야기해서 피해있으라고 하려고?”
가슴이 뜨끔했다.
“아, 아니에요. 화가 나서······.”
“후훗. 걱정하지 마. 현장에서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동영상으로 찍은 영상은 볼 수 있을 테니까. 하하하.”
“파악되려면 아직도 멀었어?”
서유림은 조금 미안했다. 괜히 채희라를 재촉하는 것 같다.
- 그게 금방 되는 일이 아니야. 먼저 믿을만한 텐프로부터 섭외해야 하는 일이거든. 괜히 서두르다가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오히려 일이 더 어렵게 꼬이잖아.
그렇긴 하다. 서울의 조폭 현황을 알아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조용히 기다리면 채희라가 알아서 잘 조사해주겠지.
“그래. 수고해.”
채희라와 통화를 마쳤다.
그런데 서유림의 휴대폰이 곧바로 다시 울렸다.
권진아였다.
어쩐 일이지?
문득 한상민이 생각났다. 설마 벌써 권진아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자꾸만 시간이 지체된다. 빨리 한상민을 폐인처럼 만들어버리고 싶은데 도무지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할 수는 없는 일이고.
서유림이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이야, 권진아씨.”
얼굴 못 본지 겨우 일주일도 못 됐으니 오랜만은 아니지. 연인도 아닌데.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권진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뜻밖의 내용을 질문했다.
- 그런데 서유림 대리님 혹시······ 채희라씨라고 아세요?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권진아씨가 채희라를 어떻게 알아?”
- 사실은 한상민 실장님이······.
권진아가 한상민과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들려주었다.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한상민이 서유림과 채희라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니.
하긴, 조금만 뒷조사하면 금방 나올 이야기였다. 모자와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만났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신분이 완전히 가려지는 것도 아니고.
서유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숨길 일도 아니었고.
물론 권진아가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권진아 기분 생각해서 거짓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막말로 텐프로와 엔조이 관계로 지내는 게 무슨 죄라도 돼?
그렇다고 권진아와 사귀는 관계라서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고.
“사실이야. 채희라는 텐프로이고 가끔 만나는 사이야. 그렇다고 기둥서방까지는 아니고.”
- 아, 그러셨구나.
권진아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아졌다.
역시 실망했군.
그래. 차라리 지금 실망하는 게 낫다.
그나저나 한상민 이놈이 폭력배를 동원할 계획이라고?
그렇다면 이쪽도 그만한 대비를 해야 하잖아.
“언제 어떤 식으로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지?”
- 제가 알아보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아요. 제가 대리님께 고자질할 수도 있다면서.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이런 정보라도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오히려 권진아가 걱정되었다. 호랑이 아가리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명색이 재벌 후계자인데 ‘설마 치사한 짓까지는 하지 않겠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남의 일이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만약 내 동생 서미연이나 서미진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이렇게 한가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당장 직장 때려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백에 하나, 아니 천에 하나라도 흉측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권진아가 참으로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상민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빤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신의 발로 들어가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내가 빼내줘야지.
그렇다고 좋은 직장을 잃게 할 수는 없지. 다시 명진식품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물론 권진아 의견을 물어본 후에. 권진아가 유진그룹 감찰팀에 남는 것을 원할 수도 있잖아.
방법?
그거야 어렵지 않지.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