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복수는 나의 것 (2)
“사연은 개뿔이.”
“······뭐?”
한동민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다. 입만 뻥긋뻥긋할 뿐이다.
하긴, 생각지도 못했던 뒤통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째? 뒤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서유림이 갑자기 한동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번쩍 들어서 옥상 벽으로 몰아세웠다.
한동민이 비록 격투기로 다져진 몸이라고 하지만, 키도 10cm가량 작았고, 그동안 체력을 많이 빨려서 완력도 약해졌다.
서유림이 조금만 힘을 쓰자 종이인형처럼 질질 끌려가다가 벽에 부딪쳤다. 서유림이 팔을 위로 뻗으니 한동민의 발이 지면에서 20cm 이상 떨어져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한동민이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왜? 이러는······?”
“왜 이러느냐고? 몰라서 물어? 너 몇 살이야 새끼야? 나이도 어린놈이 말끝마다 반말이야? 내가 네 종이냐? 노예야? 똘마니야?”
한동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황망하게 커진 눈동자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된 모양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는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너······ 진짜 자, 잘리고 싶어?”
아직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거 정말 웃기는 상황이네. 한동민 분위기 파악 너무 못한다.
아무래도 ‘상황이 이렇습니다.’ 하고 보여줘야만 정신을 차릴 것 같다.
그럼 수고 좀 해줘야지 뭐.
서유림이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풋, 잘라? 내가 이따위 직장에 목 맬 사람으로 보이냐? 내가 이 직장 아니면 먹고 살 길 없을 것 같아?”
한동민도 지금쯤이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 능력을.
내가 이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오히려 훨씬 더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내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저렇게 눈동자만 바삐 굴리는 거겠지.
“그런데도 내가 아직까지 명진식품 그만두지 않고 다니는 이유가 뭔지 알아?”
물론 돈이 가장 큰 이유다. 월급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지원금이 월 500만 원 이상 나오고 있으니까.
그런 공짜 돈을 왜 포기해?
게다가 명진식품의 창고 업무는 서유림과 궁합이 딱 맞는 업무였다. 업무 자체가 운동이니까.
창고는 이제 서유림만의 운동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곳.
물론 CCTV가 설치되어있긴 하지만, 사각지대가 비교적 넓었다. 한마디로 서유림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사실 체육관에서 30kg짜리 바벨 들고 마음껏 운동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비 상식적인 힘을 발휘하며 운동한다면 당장에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그러면 엄청나게 신경 쓰이겠지.
하지만 한동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 말이라는 것이 목에 걸면 목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거잖아.
이참에 생색이나 실컷 내주자.
“그게 사람 된 도리니까. 그래도 내가 어려울 때 몇 년간 월급 준 곳이라서 의리상 남아있는 거다. 내가 토너먼트 우승할 때까지 만이라도 명진식품 홍보해주려고. 알아들어?”
한동민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같은 거겠지. 서유림이 기본 월급에 이런저런 지원금까지 받는다고 하지만, 홍보효과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푼돈에 불과할 테니까.
한마디로 서유림은 이미 명진식품에게 귀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네가 은혜도 모르고 이따위로 나와? 자꾸 그러면 나도 생각 바꾸는 수가 있어. 내가 지금 당장 사표 던지면 누가 손해일까?”
당연히 명진식품 손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지. 이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거든.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명진식품과 유진그룹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될 수 있다.
왜냐고?
한번 들어보래?
“내가 명진식품 그만두면서 ‘유진그룹이 YJY 문제 때문에 나를 잘랐다.’라고 세상에 떠들어대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유진그룹이 참 잘했네!’ 그럴까?”
물론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알지? 내가 YJY와 얼마나 친한지. YJY까지 나서서 ‘서유림이 불쌍해.’ 하거나 ‘유진그룹 너무해.’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상황이 어떻게 될까? 응? 말해봐, 새끼야.”
서유림이 한동민의 목을 더욱 힘껏 눌렀다.
한동민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창백해져있었다. 숨이 막혀서가 아니라 서유림이 이야기한 상황이 너무도 엄청나서였다.
“알지? YJY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동남아 전체에 팬이 엄청나게 많아. 그중에는 사생팬도 어마어마하고. 그런 팬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거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뒷일은 한동민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명진식품과 유진그룹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불매운동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을걸.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후훗, 그거야 상황을 만들기 나름이겠지. 막말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분위기를 조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어때? 그렇게 해줄까? 사표 던지고 나가서 명진식품하고 유진그룹, 미친개처럼 물어뜯어줄까? 그러면서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줄까?”
한동민은 찍소리도 못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 한명진조차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회장 한유진은 어떻게든 일을 무마시키려 할 것이고, 한명진이나 한동민 내치는 것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낼 것이다.
“말해봐 새끼야!”
서유림이 한동민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며 노려보았다.
한동민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대로 쫄았군. 시키지도 않은 존댓말이 절로 튀어나와.
이쯤에서 상황 정리해주면 깔끔할 것 같다.
“토너먼트 끝나면 아마 사표 던질 거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밖에서 나 만나면 피해 다니는 게 좋을 거다. 알겠어?”
“······예.”
서유림이 마지막으로 한동민을 한 번 더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한동민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마 서있을 힘도 없을 것이다. 서유림의 으름장에 겁도 먹었겠지만, 그걸 떠나서 체력도 쪽 빨렸으니까.
서유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을 내려갔다.
하지만 한동민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힘이 빠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서 도움을 요청할 뿐이었다.
“누가······ 나 좀······ 도와줘.”
서유림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팀원들이 모두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나갈 때는 두 사람이었는데, 들어오는 건 한 사람이었으니까.
배기열 팀장이 대표로 물었다.
“한동민 대리는?”
“담배 좀 실컷 태우고 들어오겠답니다.”
“그 새끼 확 잘라버릴까?”
“그러면 MAN FC 흥행에 타격이 클 겁니다.”
한상민이 비서 장성식을 노려보았다.
한상민이 그걸 모르겠는가? 그냥 홧김에 막 내지른 거잖아. 불난 집에 휘발유 붓는 것도 아니고.
장성식도 그제야 분위기가 파악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한상민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서유림은 이제 MAN FC 흥행의 키였다.
사실 이번 토너먼트는 밀코 그로캅이 가장 확실한 흥행의 키워드였다.
과연 누가 있어 밀코 그로캅의 인기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토너먼트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팬들의 관심이 한순간에 서유림에게 넘어갔다. 중국을 비롯해서 아시아 각국에 퍼져있는 YJY 팬들 때문이었다.
서유림의 실력도 한몫 했다. ‘주먹이 운다.’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경기를 1라운드 만에 KO 승리로 장식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서유림이 밀코 그로캅을 꺾고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예측까지 나왔다.
때문에 이제는 누가 뭐래도 서유림이 MAN FC 흥행의 키였다. 서유림의 출전 여부에 따라서 관중은 물론이고 경기의 시청률도 크게 널뛰기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림을 어떻게 자르겠는가?
그건 MAN FC 운영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한마디로 갑을관계가 바뀐 것이다. 적어도 MAN FC 대회에 있어서만큼은 서유림이 갑이었고 한상민이 을이었다.
‘그래. 사적인 감정은 사적인 감정이고 사업은 사업이다. 서유림의 일을 MAN FC 일과 연관시키지 말자.’
복수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해야 한다.
‘그래. 개인적으로. 난 유진그룹 후계자잖아. 서유림 그 자식은 그래봤자 격투기선수 나부랭이에 불과하고.’
방법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한상민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권진아!’
서유림이 YJY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든 것도 따지고 보면 권진아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 권진아를 건들면 된다.’
“장 부장. 권진아는 어떻게 됐어? 본사로 넘어온대?”
“그게······. 명진식품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씨발!”
서유림과 권진아 사이가 깊긴 깊은 모양이다. 그런 엄청난 조건을 걷어찰 정도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명진식품 정기인사가 언제라고 했지?”
“2월 중순입니다. 열흘 정도 남았습니다.”
한상민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권진아, 정직원으로 채용하라고 해. 그리고 유진그룹 감찰실로 파견 보내도록 하고.”
장성식은 거기까지만 들어도 한상민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불필요한 질문은 삼가야 할 일이다.
“알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서유림의 뒷조사는 잘하고 있나?”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보고서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아무래도 서유림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상민이 눈을 크게 떴다.
“권진아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계속 조사해보고 있습니다.”
한상민의 입꼬리가 더욱 깊게 말려 올라갔다.
“그렇단 말이지? 후후.”
“훅. 훅.”
서유림이 창고에서 덤벨을 들고 실컷 몸을 풀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놈들이 왜 이렇게 안 걸려들어?’
조폭과 관련한 문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폭을 ‘서유림의 군대’로 개조시키는 작업이랄까?
그래서 채희라에게 조폭 정보를 알아달라고 부탁해놓았는데, 아직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다. 대충 어떤 조폭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했지만 놈들의 위치까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 했단다.
그러다 보니 하위정령을 여럿 확보해놓고도 써먹을 방법이 없었다.
‘답답하군. 차라리 조폭에게 공격이라도 당해봤으면 좋겠네.’
그러면 이것저것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작업할 수 있을 텐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조폭이 이렇게 귀한 놈들일 줄이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시간이 좀 먹냐?
서유림이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그런데 가만! 오늘 인사발표 있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것은 별 관심이 없었다. 서유림의 관심은 오직 오영훈의 승진문제 뿐이었다.
오영훈이 한동민을 달달 볶으면서 애는 써보는 것 같은데 과연 한동민의 힘이 그렇게 대단할까?
서유림이 운동을 접고 사무실로 향했다.
샤워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이렇게 실컷 운동하고도 땀은 전혀 흘리지 않았으니까.
사무실로 들어가자 공고판 앞에 직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서유림도 얼른 다가가서 공고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인사는 예상된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오영훈 주임도 결국 대리 승진에서 탈락되었다.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구매팀에는 몸이 좋은 남직원 한 명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서유림을 도와서 창고 업무를 보조할 직원이었다.
이 역시 예상된 일이었다. 서유림이 MAN FC 대회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해서 충원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딱 한 명의 인사만큼은 예상 밖이었다. 그것도 상식에서 크게 벗어날 정도의 파격적인 인사였다.
[구매팀 인턴 권진아. 정식사원 채용]
[구매팀 권진아. 유진그룹 감찰실 파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