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복수는 나의 것 (1)
어머니가 다시 식사준비를 하셨다.
식사준비가 끝날 무렵이 되자 아버지도 들어오셨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시네.
아버지가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셨다.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하긴, 놀라실 법도 하다. 밥상 하나로 부족해서 두 개를 붙여서 차렸으니까. 누가 보면 동네잔치라도 여는 줄 알겠다.
“아들이 사왔어요. 당신 많이 드시고 돈 많이 벌어 오시라고.”
이런! 그건 조금 민감한 이야기 같은데, 어머니가 너무 가볍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일하기 싫어서 직장 그만둔 것도 아닌데.
물론 다시 직장을 다니실 때가 되긴 했다. 저렇게 건강해진 몸으로 집에서 놀기만 한다면 그것도 죄악일 테니까.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다. 아버지도 다시 직장을 다닐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렇지 않아도 자리 알아보고 있어. 내가 건강 때문에 일을 그만둔 거지 기술이 부족했던 건 아니야. 조만간 다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머, 잘됐네요.”
서유림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깟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감의 문제였다.
사람이 존재감을 가지려면 역시 일을 해야 한다. 몸에 병이 생기고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됐구나.’ 하는 자책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이랄까.
특히 아버지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아버지는 실력이 좋은 목수이자 건축가였다. 비록 당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차린 적은 없지만, 사장이 대부분 일을 아버지께 의지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만큼 자부심도 대단하셨다.
그런데 건강 때문에 모든 일을 그만두게 되자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너무도 안쓰럽게만 보였었다.
이제 몸도 좋아지고 일자리까지 새로 생긴다면 전보다 몇 배는 더 활기찬 생활을 하시게 되겠지.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음식이 더욱 맛있네.
즐겁게 식사하고 있는데, TV에서 임채모의 모습이 보였다. 짤막한 연예가 단신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요즘 화제는 온통 YJY의 방송복귀에 대한 것뿐이었는데, 오늘 저녁은 임채모의 기사가 YJY 못지않게 뜨고 있었다.
리포터의 질문에 임채모는 한결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MAN FC에 서유림 선수라고 있습니다. 저와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죠.
그 친구가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죠.]
[이렇게 건강을 되찾으신 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앞으로 방송활동 계획은 없으신가요?]
[당연히 방송활동을 다시 시작해야죠. 신이 제게 놀고먹으라고 건강을 주진 않았을 테니까요.
두리랜드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뛸 생각입니다.]
서유림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유림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임채모의 인터뷰 내용 때문이겠지. 모든 것을 ‘서유림 덕분’이라는 말로 포장해버렸으니까.
서유림이 활짝 웃었다.
“그냥 힘내시라고 몇 말씀 드린 것뿐인데······ 임채모 선생님도 참. 하하.”
“단지 그뿐이야?”
“그렇죠. 제가 의사도 아닌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근데 그 말씀 듣고 갑자기 건강을 회복하시더라고요. 정말 이상했어요.”
“그러네. 정말 이상한 일이네.”
아버지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머니 당신 몸의 변화도 이상한 일이긴 마찬가지니까.
“하긴,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일도 많아요. 호호.”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하하.”
그렇게 즐겁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아버지는 좀이 쑤신 듯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어머! 저도 같이 가요.”
“당신도? 난 좀 뛰려고 그러는데.”
“저도 같이 뛰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몸이 근질근질한지 모르겠네.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요.”
“그래? 허허, 그럼 그러던가. 괜히 따라나섰다고 후회해도 난 몰라.”
“이가 정말······. 우리 다녀올게.”
그렇게 부모님이 함께 밖으로 나가셨다.
서유림의 얼굴에 다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따라 웃을 일이 참 많은 듯했다.
서유림도 방으로 들어갔다.
영어와 중국어, 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법이 아닌 회화 공부였다.
운동을 할 때에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듣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공부에만 집중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머리가 좋아지면서 공부도 잘 됐다. 며칠 전에 들었던 영어문장이 발음 그대로 기억날 정도였다.
그러니 공부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시사도 공부하고, 교양서도 읽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조금 넘어서 잠이 들었다.
* * *
서유림이 눈을 떴다.
어두컴컴한 것이 마굴이었다.
몸을 살짝 웅크린 채로 주변을 경계하는 아리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마굴에서는 요정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는 이상에는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워낙에 마물이 많으니까.
“별일은 없지?”
“네. 조용해요.”
서유림이 안심하고 습관처럼 망막의 스텟창들을 확인했다.
[레벨 325]
근력 : 999
순발력 : 999
체력 : 999
감각 : 930
마력 : 227
아직도 레벨이 계속 올랐다. 감각과 마력이 999가 될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르는 속도는 느리겠지만.
[잠재레벨 158]
잠재력 : 981
지속력 : 96
회복력 : 26
맷집 : 310
항마력 : 157
잠재력도 어느새 981이 되었다.
잠재력능도 999가 오를 수 있는 한계다. 그래서 정령계에서는 잠재능력 중 하나가 998에 도달한 상태를 2차 성장판이라고 했다.
2차 성장판을 여는 데 성공하면 정령계에서도 손꼽히는 능력자 반열에 오를 것이다.
물론 금방 될 일은 아니었다. 아직 20 가까이 남았는데, 1 올리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그 시기를 앞당기려고 이렇게 매일 마굴에서 사는 것이고.
그래봤자 닷새 동안 1 올리기도 힘든 상태이긴 하지만.
수치가 올라갈수록 스텟 올리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마법]
체력흡수 : 227
정령소환 : 617%
순간 서유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우왓! 이게 뭐야?”
그리 크게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마굴이다 보니 소리가 울리듯 크게 들려왔다.
아리아나가 움찔할 정도였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정령소환력이 갑자기 617%가 되었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나 많이 올랐지?”
“어머! 뭘 하셨는데요?”
내가 한 것? 없다. 그저 운동하고 공부한 것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200%가 훨씬 넘게 올랐지.
그러다가 문득 TV가 생각났다.
YJY와 임채모가 방송에서 하나같이 서유림에게 공을 돌렸다. 서유림 덕분에 자신들이 이 자리에 섰다고.
‘그래서 그 방송을 본 팬들이 고마움을 느낀 거로구나!’
역시 매스미디어의 힘은 대단했다. 인간계를 넘어서 정령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서유림이 정령펫을 소환했다.
어느 새 여섯 마리나 되었다.
이렇게 죽 세워놓고 보니 워리가 유독 위풍당당해보였다. 워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황소를 넘어서 코끼리만한 크기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블루와 그린도 제법 성장했지만, 워리와 비교되어서 그런지 여전히 연약하게만 보였다.
나머지 정령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럼 다시 출발해볼까?”
아리아나와 함께 마굴을 돌기 시작했다.
마굴은 거대한 동굴 형태였다. 하지만 벽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지고 있어서 굳이 라이트사이트 같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주변을 환히 볼 수 있었다.
“조심해요.”
올무의 무리였다. 생김새도 움직임도 개구리와 비슷한데, 크기는 사람만 했다. 중력의 법칙이 무시되는 듯 바닥, 벽, 천정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뛸 수 있는 놈이었다.
아리아나의 마법과 정령력, 서유림의 칼과 정령펫이 연합작전을 펼쳤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정령펫들은 워리까지 포함해서 모두 사망했고, 아리아나도 힘에 겨운지 가슴을 크게 들썩일 정도로 숨을 헐떡였다.
“이상해요. 올무의 능력이 이렇게까지 대단하진 않았는데.”
서유림도 느꼈다. 올무를 여러 차례 상대했는데, 오늘 상대한 놈들이 유독 강했다.
요즘 들어서 계속 그랬다. 같은 마물을 상대하는데 능력치가 점점 더 강해지는 듯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왠지 마족이 출몰할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마족은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니까.
“마족은 마굴의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없다며.”
“평상시에는 그렇죠. 하지만 정령신의 힘이 크게 약해지면 마신이 결계를 뚫고 마족을 밀어 넣을 수도 있어요. 중간지대에도 마족이 많이 들어와 있었잖아요.”
아, 그랬었군!
중간지대는 정령계와 마계의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다. 그래서 마족과 요정 모두가 통과할 수 없는 결계미로로 막혀있다.
때문에 그곳에는 요정도 마족도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결계미로가 아닌 차원이동마법을 통해서 우연히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아리아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리아나는 마족의 기운을 다수 느꼈다고 했다.
그 말은 우연이 아닌 작전에 의한 마족의 침투라고 봐야겠지. 즉 어떤 강력한 힘이 결계미로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마족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아나의 말대로 마굴의 결계라고 못 뚫을 것도 없겠지.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위로 올라가요. 아무래도 지상 가까운 곳에서 안전하게 사냥하는 게 좋겠어요.”
동감이다.
아리아나와 함께 마굴 위쪽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찜찜했다.
* * *
수요일 아침.
서유림이 정 시각에 출근했다.
배기열 팀장과 한동민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출근해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유림이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마치 절간 같다.
아니지. 이 정도면 절간이 아니라 도살장이다. 다들 인사를 받아주기는커녕 서유림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권진아만이 아주 살짝 고개를 들어서 서유림에게 뭔가 눈짓을 준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눈짓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동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 대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유림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지은 죄도 없이 저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조금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그걸 몰라서 물어? 감히 YJY를 데뷔시켜? 그 새끼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서 그래?”
아, 그것 때문이었어?
그러고 보니 한상민이나 한동민이나 다 한통속이었지? 한동민이 저렇게 발끈하는 게 당연하다.
“회사 잘리려고 환장했어? 대가리 쳐 돌았어?”
그런데 저놈이 진짜 자꾸 성질 건드네. 이제 옛날의 서유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만한 때도 되었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많이 느린 놈인 듯하다. 그러면 내가 직접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주는 수밖에.
나 이래봬도 한상민하고 한타까리 한 놈이라고.
그렇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러면 다들 한동민보다는 서유림을 손가락질할 테니까.
겁낼 일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일도 아니잖아.
일단 은밀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
“아, 그 일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그건 사실 말 못한 사연이 있습니다.”
“말 못할 사연? 그게 뭔데?”
한동민의 기세가 아주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여튼 단순한 놈이라니까.
“여기서는 말씀드리기 좀 그렇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따라와.”
한동민이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데 저놈 걷는 모양새를 보니 생각보다 쌩쌩하네. 한동안 체력을 빨아주지 않았더니 힘이 넘치는 모양이다.
그래서 저렇게 주제 모르고 날뛰는 건가?
하여튼 잠시라도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다시 참교육이 필요한 시간이 왔군.
서유림이 한동민을 따라 움직였다.
한동민이 향한 곳은 건물 옥상이었다. 직원들이 담배를 태우기 위해서 이따금 올라오는 곳이다.
하지만 1층 화단 쪽에 흡연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있기 때문에 옥상까지 올라와서 담배를 태우는 직원은 많지 않았다.
한동민이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서유림이 뒤따르면서 옥상 문을 닫았다. 철문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소리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해봐. 사연이라는 게 뭐야?”
한동민이 자리를 잡고 서유림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면 이 자리에서 패대기라도 칠 기세였다.
그런데 서유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사연은 개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