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94화 (94/196)

# 94

천 냥보다 비싼 말 한 마디 (1)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리아나가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이 그린루트라는 거구나. 아니면 비슷한 것이거나.

그런데 여기에서 옷을 모두 벗으라고?

하긴, 뭐 어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고, 이곳에서는 그런 것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것 같으니.

그래도 아리아나가 고개 좀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와! 오히려 대놓고 바라보네.

그래. 실컷 봐라.

그런데 그거 알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거라고.

언젠가 나도 똑같이 볼 날이 있을 거야.

서유림이 옷을 모두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그래도 아리아나에게 정면을 보여주는 건 조금 부끄러워서 뒷모습만 보여주었다.

그런데 뽀얀 엉덩이를 보여주는 것도 왠지 부끄럽네. 발가벗겨진 기분이라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렇게 알몸이 되어서 나무상자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상자 안에 있던 그린루트라는 넝쿨식물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면서 서유림의 온몸을 감싸듯 올라왔다.

그린루트는 순식간에 서유림의 옷이 되었다. 이렇게 입고 있으니 아리아나와 커플티라도 입은 것 같다.

촌장이 무척 흡족해했다.

“허허,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그린루트가 자네를 거부하지 않는군. 자네에게는 전사의 기질이 있어.”

그런 거였어? 만약 내가 자격이 없었다면 그린루트가 나를 거부했겠군.

그러면 무척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나체쇼만 하는 꼴이 되었을 것 아냐?

“그럼 저희는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시게. 그런데 요즘 주변 기운이 심상치가 않아. 너무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리아나와 함께 촌장의 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린루트 이거 참 쓸 만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넝쿨이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무척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데, 착용감이 끝내준다. 옷을 안 입은 것 같다.

“이거 정말 좋은걸. 따뜻하기까지 해.”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린루트는 전사에게 특화된 방어구에요. 방어력도 좋고, 상처를 입으면 치료도 도와줘요.”

그런 능력까지 있었어? 오늘 완전히 득템했군.

곧장 숲속의 마굴로 향했다.

마굴은 쉽게 말하면 던전이었다. 마계의 마물이 이동하는 통로로서 아무리 많은 마물을 사냥해도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게다가 층마다 마물의 능력이 갈렸고, 개체수도 풍부해서 레벨을 올리기에 그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서유림과 아리아나가 함께 시커먼 마굴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멀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요정마을에 사는 한 남자였다.

남자의 눈빛이 어느 순간 붉은 빛을 띠었다가 가라앉았다.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사람처럼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요정마을로 돌아갔다.

* * *

서유림이 눈을 번쩍 떴다.

아침이구나!

문득 가슴이 설렜다. 정령소환력이 300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하위정령의 능력을 선물할 수 있다는 뜻이지.

빨리 집에 가서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고 싶다. 어머니께서 정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어깨가 왜 이렇게 묵직해?

고개를 돌려보니 채희라가 서유림의 어깨를 베개 삼아 잠들어있었다. 밤새 이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정령의 힘으로 강해진 서유림이라고 해도 저 무거운 머리로 이렇게 짓누르고 있으니 묵직함이 느껴질 수밖에.

시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새벽 다섯 시겠지.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채희라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령과의 계약을 몇 시간 늦춘다고 달라질 일도 없을 테고.

채희라가 깨지 않도록 머리를 조심조심 옆으로 옮겨주었다.

밤에 힘들었던 모양이다. 서유림이 움직이면서 침대도 함께 출렁였는데 여전히 쌔근쌔근 잠들어있다.

[운동 나갔다 올게.]

한겨울 새벽이라 아직 깜깜했다. 하지만 라이트사이트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전등을 켤 필요는 없었다.

간략하게 메모를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경기도 외곽의 시골이었다. 주변에 건물도 많고 상가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시골이지.

일부러 산길을 따라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천천히 날이 밝아왔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누구지?’

순간 한상민이 아닐까 싶었다. 중국에서 뒤통수를 워낙 세게 얻어맞아서 지금쯤 뭔가를 단단히 꾸미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상민은 아니었다.

‘도상국이네. 상국이가 이 시각에 웬일이지?’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도상국이 숨넘어갈 듯 다급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목소리가 약간 젖어있는 느낌도 들었다.

- 형님! 임채모 선생님께서 위독하시답니다.

“임채모 선생님?”

갑자기 두리랜드가 생각났다. 그리고 병색이 완연한 가운데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 어쩌면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른대요.

“지금 어디 계시는데?”

- 강남제일병원에요. 저는 지금 출발합니다. 형님도 오시려면 오세요.

당연히 가야지. 비록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얼른 모텔로 돌아갔다.

서유림의 문 여는 소리에 채희라가 눈을 떴다.

“운동 다녀온 거야? 하~암. 몇 시나 됐지?”

“어서 일어나. 나 지금 출발해야 해.”

서유림이 숨넘어갈 듯 이야기하며 옷을 마구 벗어던졌다.

채희라도 덩달아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서유림이 저토록 서두르는 일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왜? 무슨 일인데?”

“임채모 선생님이······.”

서유림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샤워실로 들어가서 대충 씻고 나왔다.

“미안한데 넌 나중에 씻고 치장하면 안 될까? 빨리 병원에 가보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세수만 할게.”

채희라가 서유림을 위해서 서둘러주었다. 세수하고 영양크림 바르고, 머리만 간단히 손질한 후 모텔을 나섰다.

강남제일병원.

채희라는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지고, 서유림은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임채모는 중환자실이 아닌 특실에 있었다. 몰려오는 문병객 때문이었다. 임채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 때문에 특실 앞이 완전히 장사진을 이루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문병객의 면면이었다.

안성기, 신순재, 김혜자, 최불암, 백일섭, 박근형······.

누구라도 이름만 대면 허리를 굽실거릴 원로 중의 원로들이었다.

게다가 연예인 출신으로 정치권에 진출하여 대세가 된 고영대도 있었다. 나이가 겨우 45살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국회의원 3선에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덕분에 데뷔 때 나돌았던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루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래서인지 차승원, 최수종, 하정우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와있지만, 감히 큰소리도 못 내고 행동거지에 조심성이 잔뜩 붙어있다.

와! 저 사람들이 모두 임채모와 안면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기회에 선후배 연예인 얼굴도장이라도 찍자고 무작정 찾아온 걸까?

어쨌건 임채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았다면 대한민국 연예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텐데.

그러면 서유림이 나중에 연예계에 진출할 때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왠지 모르게 임채모는 서유림 편에 서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서유림의 도움으로 임채모가 건강을 되찾는다면 완벽한 서유림의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걸 떠나서라도 임채모 같은 사람은 더 오래 살아야 한다. 대한민국 연예계는 물론이고 두리랜드에서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사람이잖아.

찾아보니 임채모를 도와야 할 이유는 많았다.

어차피 하위정령도 둘이나 확보했다. 어머니께 하나를 선물한다고 해도 하나가 남잖아.

그렇다고 임채모에게 하위정령을 완전히 주는 것도 아니다. 한두 달 임채모의 몸에 머물게 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한 다음이 회수하면 그만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심이 쉽게 굳어졌다.

‘그래! 이참에 연예계에 든든한 인맥 하나 만들어두자!’

‘그런데 임채모 선생님께는 어떻게 다가간다?’

병실 밖에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했다. 유명연예인들조차도 임채모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서유림 같은 평민이 저 안을 어떻게 들어가?

그런데 특실 안에서 서유림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여기입니다. 들어오세요.”

도상국이었다.

‘오! 그래! 네가 임채모 선생님을 살려드리는구나!’

덕분에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특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서유림에게 관심을 두었다. 몇몇은 서유림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다.

“어! 저 사람 MAN FC 파이터 서유림씨 아닌가?”

“그러네! 저분도 임채모 선생님과 인연이 있으시구나.”

“선생님께서 인물은 인물이셔.”

“안타깝구나! 대한민국 연예계의 거대한 별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서유림은 그런 소리를 뒤로 한 채 특실 안으로 들어갔다.

특실 안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연예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참사랑 보육원 사람들이었다.

“선생님께서 형님을 찾으십니다.”

임채모씨가 나를?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콕 찍어 찾았다고?

괜히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임채모도 본능적으로 ‘서유림이 살 구석이다.’라는 느낌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서유림이 다가가서 임채모의 손을 붙잡았다.

임채모도 서유림의 손을 잡았다. 나름대로 힘껏 움켜쥐려고 한 것 같은데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꺼져가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도상국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자네를 꼭 다시 보고 싶었네.”

나는 이유를 압니다. 선생님은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세요.”

“자네는 크게 될 사람인.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내 눈에는 그게 보여.”

정확히 보셨군요.

“두리랜드를 부탁해도 되겠나? 자네가 홍보해줘서 후원금은 적지 않게 모였네. 당분간은 운영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자네가······ 내 대신 두리랜드를 좀 맡아주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선생님이 계속 맡게 되실 테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방법이다.

사실 지금이라도 아무도 모르게 임채모에게 정령의 힘을 넣어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얻는 게 없잖아. 뭔가 생색을 내려면 내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제대로 생색이 나지? 스토리를 아주 제대로 만들어서 붙여줘야 엄청나게 고마워할 텐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스토리가 있었다.

역시 아리안 덕분에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아졌다니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통한다면 천 냥의 값어치보다도 비싼 말 한 마디가 될 것이다.

까짓, 안 통하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는 꼴이 되는 거지 뭐. 그래도 후회는 없다. 좋은 일 하는 거잖아.

서유림이 임채모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여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선생님, 사실 어제 저녁에 길에서 이상한 사람을 한 명 만났습니다. 자신을 빛의 사자라고 하면서 선생님 말씀을 하더라고요.”

이런. 막 지어내다 보니 이름이 너무 유치하다. ‘빛의 사자’가 뭐냐? 차라리 광명교 교주라고 하는 게 낫겠다.

하지만 임채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긴 죽어가는 마당에 그런 이름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랬었는가?”

임채모도 서유림 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가 예언하기를 선생님께서 오늘 돌아가실 운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10년 쯤 더 살게 할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이쯤 되면 관심이 폭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조금은 놀라는 표정이라도 해야 맞겠지.

하지만 임채모는 반응이 너무 없었다. 그저 힘이 완전히 빠진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그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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