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2)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게 무슨 말뜻인지 몰라?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제대로 가르쳐줘야겠지.
“YJY와 한상민 실장님의 관계. 다 알고 있다고요. 그래서 일부러 YJY의 노래로 선택한 거고요.”
한상민이 멍한 표정을 했다. 뒤통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잠시 머리가 굳어진 모양이다.
아직도 제대로 말뜻을 이해 못하는 건가?
쯧쯧,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일부러 했습니다. 한 실장님 골탕 먹이려고요.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자 한상민이 느닷없이 다가와서 서유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런 개XX.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 반항하는 거냐? 뒈지고 싶어?”
이제야 비로소 상황파악을 하신 모양이군.
그런데 이거 뭐야? 지금 내 멱살 잡은 거야?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렇지 않아도 스킨십 할 기회가 너무 없어서 속상했는데, 이렇게 직접 스킨십을 해주시다니.
서유림은 입술이 쭉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서유림이 멱살을 움켜쥔 한상민의 손을 잡고 체력을 힘껏 빨아주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이다. 그리고 한상민은 오늘 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고.
당연히 여기 온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친분도 두터울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한상민이 쓰러뜨려봐.
서유림이 한 짓이라는 증거는 못 찾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서유림의 짓으로 몰아갈 게 빤했다.
입장 난처해질 일을 스스로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언제 조용한 곳에서 보자.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보내주마.’
서유림은 한상민이 딱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체력을 빨아주었다.
그러자 한상민의 이맛살이 이유도 없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러운 체력 저하에 현기증이 느껴지는 거겠지.
서유림은 그냥 모른 체했다. 대신 한상민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괜히 화를 내는 척했다. 그래야 체력흡수 때문이라는 눈치를 못 챌 테니까.
“이 손 놓으시죠. 저는 누가 제 몸에 허락 없이 손대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멱살 잡히는 건 더욱 싫고요.”
사실 이거 반어법이다. 앞으로 더욱 자주 멱살 잡아달라는 부탁이라고 해야 할까?
너 같은 놈들은 하지 말라고 해야 더하잖아.
예상대로다. 한상민이 가뜩이나 없는 체력으로 멱살 잡은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손으로 툭 치면 그대로 풀릴 것처럼 약한 멱살잡이였다.
“이유가 뭐야, 새끼야?”
이유? 그걸 몰라서 물어? 너 같은 인간쓰레기가 싫어서이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굳이 네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 선 것이지. 더는 나한테 갑질 할 수 없다는 독립선언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넌 그걸 인정 못 하겠지?
그래서 너에게 맞는 명분을 준비했단다. 고맙게도 네가 스스로 만들어준 명분이지.
“권진아에 대한 복수입니다. 실장님이 그렇게 나오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습니까?”
“뭐? ······권진아?”
한상민이 다시 멍한 표정을 했다. 비로소 서유림이 왜 그토록 이를 악물고 복수하려 했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오해지만.
한상민이 권진아를 놓아준다고 해도 서유림은 한상민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한상민의 밑바닥을 경험할 때까지 계속 밟아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과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저와 권진아씨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그리고 다시는 우리 진아 넘보지 마세요.”
“이 새끼. 감히 나한테······.”
예상대로다. 너 같은 놈이 그렇게 쉽게 사과하진 않겠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세서.
사과 한 마디면 쉽게 해결될 것도 쓸데없이 수억 원씩 들여가면서 입막음 하는 게 네놈들의 특징이잖아.
“두고 보자. 네놈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똑똑히 가르쳐주마.”
두고 보자고? 후훗 과연 네가 나한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회사에서 해고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더 있겠어?
뭐, 그쯤이야 전혀 두렵지 않다. 난 손해 볼 것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회사 그만두면 명진식품이나 유진그룹은 잃을 게 많을 걸. 내가 가진 홍보효과가 얼마나 큰데.
오늘의 승리로 내 가치는 아마 더 올랐을걸.
서유림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한상민의 눈빛을 받아냈다.
체력도 흡수할 만큼 다 흡수했기 때문에 더 할 일도 없었다.
한상민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하품까지 나는 모양이다. 스스로도 ‘지금은 안 돼.’ 하면서도 이를 악무는데도 어쩔 수 없이 입이 슬쩍 벌어진다. 눈물도 찔끔 나온다.
그렇게 한상민이 서유림의 멱살을 놓았다.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말씀 다 하신 것 같은데 저는 이만······.”
서유림이 몸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한상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재떨이건 뭐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 체력이 너무 빠져서인지 악력도 약해졌다. 묵직한 유리 재떨이가 손에서 빠지면서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꽈지직-
유리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일부는 한상민의 몸에까지 튀었다. 한상민 본인이 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 덕분에 분노는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복수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한상민이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장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 실장님.
“당장 사람 풀어서 서유림이 약점 찾아와. 무조건 찾아와.”
- 알겠습니다.
장 부장이 재깍 대답했다. 한상민의 목소리와 말투를 듣자마자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것이다.
만약 이런 분위기에서 ‘어떤 약점을요?’라던가 ‘언제까지요?’ 같은 질문을 던지면 왕창 깨질 게 빤하니까.
“그 새끼 가족은 어떤 놈들인지, 친구는 누구인지, 어떤 새끼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조사해와. 알았어?”
- 알겠습니다, 실장님. 최대한 빠르고 자세히 조사하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한상민이 문을 노려보았다.
“개새끼.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하암! 아! 씨발, 이 분위기에서 하품은 왜 자꾸 나와? 저 새끼 때문에 갑자기 피곤해졌네!”
* * *
경기를 마친 서유림은 그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깜깜해진 밤이었다.
채희라가 시간에 맞추어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입국장에서 기다리는 건 사람들 눈에 너무 띄기 때문에 주차장 차에서 기다려주었다.
채희라의 곁은 도상국이 듬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고마워 오빠. 정말 멋졌어. 그런데 한상민 대표한테 한소리 듣지 않았어?”
채희라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지?
하지만 걱정마라. 한소리 듣고 두 소리 해줬으니까.
“제까짓 게 어쩌겠어? 날 죽이기라도 하겠어?”
“오! 남자인데! 가자! 상국씨는 그만 퇴근하세요. 오늘 늦게까지 함께 있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알겠습니다. 형님, 고생하셨어요.”
“그래. 조만간 소주나 한잔하자.”
도상국을 보내고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기에 곧바로 모텔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채희라의 움직임이 적극적이었다. 서유림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온갖 기교를 다 부렸다.
YJY 데뷔시켜준 것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뭐, 고맙게 받아주지.
덕분에 짜릿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잠도 스르르 잘 왔다.
* * *
새벽이라고 해도 좋 을만큼 이른 아침이다.
서유림은 정령계로 들어오자마자 스텟부터 확인했다. 다른 스텟이야 기본 스텟이건 잠재력 스텟이건 워낙 변하는 게 없으니 별 관심이 없었다. 서유림의 관심은 오직 정령소환력 하나뿐이었다.
과연 얼마나 올랐을까?
[마법]
체력흡수 : 198
정령소환 : 376%
“우와!”
서유림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옆에서 아슬아슬한 동작으로 스트레칭 하던 아리아나도 덩달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정령소환력이 하루만에 200이 넘게 올랐어.”
현재의 정령소환력은 정확하게 376이었다. 수치가 늘어나면서 지난번 수치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대략 250 이상이 올랐다.
아리아나도 깜짝 놀랄만한 수치였다.
“어머, 그렇게나 많이 올랐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리아나에게 YJY의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주었다.
아리아나가 가만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YJY라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들을 오랜만에 보게 된 팬들도 유림씨에게 크게 고마워한 모양이네요.”
그런 모양이다.
많은 사람에게 많은 고마움을 받으니 정령소환력이 오를 수밖에.
역시 정령소환력 오르는 것도 빈익빈부익부인 모양이다. 능력이 커지면 할 수 있는 일도 커지니 더욱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으니까.
“어서 하위정령들을 소환하세요.”
그래야지. 레벨 10까지는 세상구경만 시켜줘도 쭉쭉 성장하니까.
하위정령 둘을 소환했다. 하나는 워리처럼 개의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새의 형태였다.
그러자 어느새 시베리안허스키처럼 거대하게 성장한 워리가 강아지 정령펫을 바라보며 무척 반가워했다. 같은 종족이라 그거겠지.
“그럼 또 마굴로 들어가 볼까?”
“그래요. 촌장님께 보고부터 드리고요.”
함께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요정마을의 규모는 대략 17가구 정도다.
그런데 가족의 구성이 조금 독특했다. 모든 가구가 한 명의 남편이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적은 경우 세 명, 많은 경우 일곱 명까지 되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는데, 이유를 듣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정의 성비 자체가 여자가 월등히 많았다. 남자 한 명에 여자가 대여섯 명 정도였다.
때문에 한 가구의 식구가 평균 열 명이 쉽게 넘었다.
촌장의 경우 그런 현상이 훨씬 심했다. 촌장은 무려 열다섯 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리면서 서른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넷에 딸이 스물일곱 명이었다.
촌장의 집은 마을 중앙에 있었는데, 그런 대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집도 규모가 무척 컸다. 촌장의 집 자체가 하나의 마을인 것처럼.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따라서 촌장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촌장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렇게 하고 있으니 꼭 산신령 같았다.
“또 마굴로 들어가겠다고?”
“이번에 들어가면 보름에서 한 달 가량 마굴에서 머물다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대가 마을에 필요한 마나스톤을 모두 공급해주는 것 같군. 그런데 뒤에 있는 계약자는 이번에도 함께 들어가는 것인가?”
“예,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허락해야지. 헌데 사내가 참으로 대단하군. 마굴을 그렇게 거침없이 드나들고. 꼭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으이. 허허허.”
촌장이 서유림을 무척 흡족하게 생각했다.
사실 이것도 처음에는 납득이 잘 안 되었다.
그런데 요정의 특징을 알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 정령계에서는 사냥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 일을 여자가 하고, 남자는 놀고먹는다. 남자의 역할은 오직 하나. 번식이다.
그러니 남자인 서유림이 사냥을 위해서 마굴을 자주 드나드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가만있어보자. 내가 그대에게 특별히 선물을 주겠네. 잠깐 기다려보게.”
촌장이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사과박스만 한 나무상자 하나를 들고 나와서 서유림에게 주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게.”
상자 뚜껑을 열자 웬 넝쿨식물이 가득했다.
“그린루트지. 내가 자네만 하던 시절에 입고 다니던 것일세. 이젠 나이가 들어 쓸모도 없고, 이걸 쓸 사람도 없으니 자네가 쓰도록 하게.”
서유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란 말인가?
그런데 아리아나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서유림을 대신해서 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촌장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그린루트가 주인을 제대로 찾은 게지. 한번 착용해보게.”
이걸?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착용해? 방법을 알아야 착용할 것 아냐?
그런데 아리아나가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옷을 모두 벗고 나무상자 위로 올라가시면 돼요. 그러면 저처럼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