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92화 (92/196)

# 92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1)

중국 상해.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빈자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만원관중이었다.

물론 홍보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긴 했지만, 32강전인데도 이 정도 반응이라면 이번 대회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이르꺼러를 비롯한 중국의 기대주들이 대거 출전한 덕분이었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체급별로 따로 경기를 치렀는데, 낮은 체급에서 중국 선수들이 선전을 펼치면서 시간이 갈수록 반응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미들급 토너먼트가 시작되었다.

서유림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자꾸만 신경 쓰이네. 처음도 아니고 왜 저렇게 긴장해.

“관장님!”

서유림의 부름에 배복성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응?”

“다리 좀 그만 떠세요.”

“아, 내가 또 다리 떨고 있었나?

“긴장되세요?”

“긴장은 무슨. 그냥 습관이지.”

거짓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조력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마음은 없다. 이상하게 배복성과 궁합이 잘 맞거든.

특히 크로스 카운터나 훅, 잽을 넣는 타이밍을 잡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했다. 몇몇 체육관에 가서 가르침을 부탁하곤 했었지만, 배복성만큼 귀에 쏙쏙 박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잔소리가 없었다.

지금도 저렇게 조용하잖아.

다른 코치가 왔었다면 아마 조언한답시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끝도 없이 주절거렸을 거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대회 관계자가 대기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제 입장하시면 됩니다.”

배복성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누가 보면 서유림이 아닌 배복성이 경기하는 줄 알겠다.

“가자.”

“가시죠.”

모두 함께 일어섰다.

각자의 손에는 탈이 하나씩 들려져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하회탈인데 전통적인 하회탈과는 약간 달랐다. 디자인을 요즘 세대에 맞게 약간 개선한 것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퓨전 하회탈이라고 할까?

다른 조력자들도 모두 퓨전 하회탈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하회탈을 얼굴에 쓰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유림의 일행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회탈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모두가 똑같은 것이라서 서로 섞어놓으면 어느 게 네 것이고, 어느 게 내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경기장 입구에 섰다.

케이지 가까운 곳에는 VIP자리가 있었다.

한상민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이번 토너먼트를 공동 후원한 중국 재벌과 일명 꽌시라고 불리는 중국의 고위직 공무원들도 잔뜩 앉아있었다.

서유림이 먼저 입장하고, 다음 리콴첸이라는 중국선수가 입장했다.

다들 기대 어린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나운서의 입장 멘트가 끝나자마자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순간 한상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자신이 예상했던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 이 음악은 뭐지?’

한상민이 지시한 것은 분명 ‘올리브’라는 신인 걸그룹의 ‘하이하이’라는 노래였다. 토터먼트 예선 첫날에 지시하고 그것을 바꾼 기억이 없다.

그런데 왜 바뀌었지? 게다가 들어보니 전혀 생소한 음악에 생소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푸르름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의 노래가 아닌 듯했다.

아니면 한상민 관심 밖에 있는 신인가수인가?

‘그래도 경쾌하긴 하네.’

강렬한 비트가 심장을 울렸다. 쿵! 쿵! 비트가 울릴 때마다 한상민도 함께 일어서서 무릎을 들썩들썩하고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춤은 더욱 경쾌했다. 일곱 명이 하회탈을 쓰고 입장하고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춤을 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춤이 제법 코믹했다. 같은 동작이 계속 반복되니 중독성도 느껴졌다.

흥이 넘치는 일부 관중들은 벌써부터 일어서서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지?’

서유림의 일행은 계단 중간까지 내려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제법 널찍한 무대가 마련되어있었다.

강렬한 비트의 음악은 계속되었고, 춤사위도 절정으로 치달았다.

특히 세 명은 움직임이 경쾌했다.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때 세 명이 하회탈을 훌러덩 벗었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헛바람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들 ‘어디에서 봤어라?’ 하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20대는 달랐다. 경기장에는 20대 남녀도 제법 와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20대 여성들은 세 명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절할 듯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꺄악! 동방신화다.”

그들은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와를 뛰쳐나온 동방신화의 멤버들이었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뭉쳐서 YJY라는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다.

동방신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YJY 그룹을 이룬 세 명의 인기가 특히 대단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순식간에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비록 잠깐 동안이긴 하지만, 이곳이 MAN FC 토터먼트 경기장인지 YJY의 콘서트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한상민 역시 YJY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요즘 가장 골치를 아프게 하는 인간들이 바로 저들이었으니까.

YJY의 활동을 막는 것이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의 가장 큰 업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곳에서 YJY를 보게 되다니. 이곳은 한상민이 직접 만든 무대나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그 무대를 저 꼴 보기 싫은 YJY에게 가져다 바친 꼴이 되다니.

더욱 큰 문제는 이 방송의 파급효과였다.

한상민은 이번 대회의 흥행을 위해서 엄청난 홍보비용을 들였다. 중국, 일본의 거대 방송국과도 손을 잡았다.

때문에 이 대회는 현재 중국, 일본, 한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입에서 절로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얼른 메인박스를 바라보며 자신의 손으로 목을 그었다. 빨리 음악을 중단하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메인박스의 관리책임자는 중국인이었다.

한상민이 MAN FC 대표라고 하지만, 관리책임자는 진행을 맡은 중극측 대표인 장홍카이의 직원이었다. 장홍카이의 지시도 없이 한상민의 지시를 따라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음악을 자르면 자칫 방송사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할 것이다.

관리책임자는 모른 척했다.

한상민은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든 음악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음악은 계속되었고, 서유림은 5분이라는 입장시간을 충분히 소비한 후에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한상민은 뒤통수가 뻐근했다.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 것 같았다. 너무 화가 나서 안압마저 올라갔다.

‘서유림 개새끼. 저 새끼를 어떻게 하지?’

원래는 서유림이 8강까지 무난하게 올라가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서유림이 MAN FC를 이끌어줄 새로운 스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반대다. 중국선수 리콴춘이 서유림을 보기 좋게 박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한상민이 주먹을 움켜쥐며 리콴춘을 응원했다.

‘제발! 이왕이면 아예 죽여 버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고 20초도 못 돼서 그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서유림이 슬그머니 다가서다가 느닷없이 원투스트레이트를 뻗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상민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런 병신새끼. 그 한 방을 못 버텨?”

장내는 다시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YJY 멤버들이 이때다 싶어서 케이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서유림과 함께 손을 번쩍 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해주었다.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20대 여성 팬들은 목청이 찢어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저 새끼 끌어내. 끌어내라고.”

한상민이 소리쳤지만, 경기 운영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상민의 실수였다. 중국의 협조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 경기 운영의 일체를 중국측 대표 장홍카이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지시를 내려도 말을 듣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터뷰는 막았다. 만약 인터뷰를 허용했다면 틀림없이 YJY에게까지 마이크를 넘기려 했을 것 같았다.

“서유림, 이런 개새끼.”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중국 사장과 중국 공산당 유력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자리를 비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YJY의 멤버 중 하나인 유제중이 눈물을 훔치며 서유림의 손을 잡았다. 유제중의 별명은 ‘영웅제중’이었다.

서유림도 그런 유제중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오히려 제가 기쁩니다. 저는 물론이고 제 여동생들도 모두 동방신화 팬들이었거든요.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해주세요.”

“말씀 놓으세요. 이제부터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하하.”

서유림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대회 관계자가 대기실로 들어와서 서유림을 찾았다.

“한상민 대표님께서 급히 호출하셨습니다. 지금 1번 회의실에 계십니다.”

그러자 YJY 멤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덕분에 자신들은 드디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서유림 본인이었다.

틀림없이 큰 곤욕을 치를 게 분명했다.

“어쩌죠?”

하지만 서유림은 여유만만이었다.

“어쩌긴 뭘 어째? 제깟 게 나를 죽이겠어?”

“저······ 지금 대표님께서 계속 기다리시는데······.”

누가 기다리랬나? 기다리기 싫으면 그냥 가시던가.

서유림은 서두르지 않았다. ‘금방 갈게요.’ 라고 말만 해놓고는 일부러 시간을 끌기라도 하듯 YJY 멤버들과 계속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YJY 멤버들이 등을 떠밀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만 가보세요.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그래요.”

“후훗,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서유림이 느긋한 걸음걸이도 대기실을 나섰다. 대회 관계자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바삐 걸었지만, 서유림의 걸음걸이가 느리니 계속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조금만 빨리······.”

“발목을 다쳤나? 여기가 좀 아프네요.”

서유림은 그렇게 시간을 한참 끌고 나서야 1번 회의실에 도착했다.

서유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회의실을 서성이며 담배를 조급하게 피워대고 있는 한상민의 모습이 보였다.

비서 장 부장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 함께 안 따라 온 건가?

서유림이 들어오자 한상민이 다짜고짜 욕설부터 내뱉었다.

“야, 이 XXX야. 내가 널 부른 게 언젠데 이제와?”

“아!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한상민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한심스러웠다.

‘이놈아! 겨우 그 정도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냐? 너한테 당하는 사람들은 그 열 배 백 배를 당하면서 살아간단다. 넌 좀 더 제대로 당해봐야 해.’

한상민이 뭔가를 더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서유림이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중국 꽌시들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시끄럽고,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가 뭘요?”

서유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입장곡을 바꾸래? 이 개XX야!”

“그거야 내 마음이죠. 입장곡 고를 수 있는 건 선수 고유 권한 아닌가요? 예선전과 64강전에서 실장님이 정해주신 곡으로 써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서유림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반말과 존댓말만 아니라면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럴수록 한상민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서유림은 한상민이 실컷 악다구니를 풀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니,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상민이 말을 멈출 때까지. 그래서 자신의 말에 제대로 집중할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까지.

그렇게 조용히 한상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선택한 게 YJY냐? 그 새끼들이 나하고 어떤 관계인지 몰라서 그래? 대답해봐 이 XXX야?”

한상민이 비로소 말을 멈추었다.

서유림이 기다리던 시간이 온 것이다.

그제야 서유림이 조용히 이야기해주었다.

“당연히 알죠.”

“그걸 아는 놈이······응?!”

다시 악다구니를 쏟아내려던 한상민이 갑자기 멈칫했다. 조금 전 서유림의 대답이 뭔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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