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압도적인 힘으로 (3)
채희라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야기했다.
“제가 능력이 없어서 여러분을 못 죽이는 게 아니에요.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안 죽이는 것뿐이에요. 사실 이딴 촬영 하지 않아도 여러분을 처리할 방법은 많아요. 하나만 이야기해볼까요? 제가 여러분 뒤에 있는 사람을 밝히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여러분을 그냥 둘까요? 아니면 꼬리를 자르려고 할까요?”
업주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낙담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당장 전화해서 감금하고 있는 텐프로들 모두 풀어주라고 하세요. 지금 민들레에 데려다주면 되요. 당신들 손으로 직접 민들레 앞까지 데려다주라고 하세요.”
청년이 업주들을 구속했던 밧줄을 풀어주고 휴대폰을 주었다. 업주들의 휴대폰이었다.
업주들은 반항하지 못했다. 휴대폰 전원을 켜고 시키는 대로 했다.
“다 풀어줘. 민들레에 데려다줘.”
다른 업주들에게도 일일이 통화해서 텐프로들을 풀어주라고 했다.
몇몇 업주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69회 회장인 원나잇 도기태의 의견에 따랐다.
채희라는 민들레에 전화해서 텐프로들이 도착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실종된 명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든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시는 민들레를 상대로 수작부리지 마세요. 여러분 놈들 목숨 끊어놓는 것은 주머니 속 사탕 꺼내는 것보다 쉬우니까.”
모든 일을 마치고 채희라가 청년들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청년들이 업주들의 눈을 다시 가리고는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그제야 다들 가면을 내리고 웃음을 지었다.
강민주도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강민주는 아직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분장을 아주 리얼하게 잘했다.
채희라가 강민주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고생 많았어.”
“그런데 저놈들이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어요. 이참에 아예 바다에 빠뜨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강민주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여튼 요즘은 여자들이 더 무섭다니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강민주의 말대로 하면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일 수 있다. 경찰이 실종신고를 받으면 가장 먼저 민들레와 채희라부터 수사를 시작할 테니까.
채희라가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잘 풀리겠지?”
그거야 두고 봐야 알겠지. 하지만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잔머리를 굴려보니 이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설령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또 이상한 짓 하면 다시 혼내주면 되지 뭐. 저놈들 잡아오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니까.”
“호호, 말만 들어도 시원하네.”
채희라가 맑게 웃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건 두고 보면 알 거야.
그런데 청년 하나가 슬쩍 다가와서 말을 끼워 넣었다.
“베트남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뭐 좀 털어놨어?”
“아뇨. 자신들도 본거지는 모른답니다. 대신 엉뚱하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용서가 아니라 부탁을 했다고?
정말 엉뚱한 놈들이군.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무슨 부탁?”
“자기 여동생이 감금당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답니다. 이번 일도 여동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거고요. 여동생을 구해주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답니다.”
청년이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서 사연을 들려주었다.
베트남 하노이파는 많은 베트남 여성들을 납치해서 성매매를 강요하고 있었다. 잡혀온 베트남인의 여동생도 그런 식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들어보니 딱한 사연이긴 했다. 여동생의 일도 그렇지만, 강제로 성매매 당하는 여성들의 사연 역시 그랬다.
물론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채희라도 베트남인의 사연에 측은함을 느낀 듯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네. 어쩌지?”
참 이상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흉기를 들고 덤비던 놈인데, 이런 측은지심이 든다니.
그래도 쉽게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다.
베트남 하노이파는 중국 흑사파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졌다는 놈들이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갱단이 뒷골목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다.
게다가 워낙에 잔인해서 온갖 흉기를 서슴없이 사용한다고 했다.
그만큼 지독한 놈들이라는 거겠지.
서유림이 육체능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다. 막말로 서유림도 칼에 찔리면 아프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무턱대고 도와줄 수 있나? 그거야말로 오지랖 중의 왕 오지랖이겠지.
하노이파 같은 놈들을 상대하자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면 조직의 힘이라도 키워야 하겠지.
국가의 군대나 경찰처럼 말이다. 국가가 법을 집행할 수 있는 것도, 그걸 강제할 수 있는 공권력이 있기 때문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방법이 보이는 듯도 했다.
‘가만있어봐! 나도 나만의 힘을 키워볼까?’
서유림의 새로운 목표는 법의 허점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는 놈들을 자신만의 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만한 힘이 필요할 것이다. 힘이 부족하다면 제아무리 나쁜 놈이 있어도 멀뚱멀뚱 바라만 봐야 할 테니까.
하노이파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힘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자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있어야 힘을 키울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그 힘의 충성심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채희라의 스폰서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그러면 그건 서유림의 힘이 아니라 채희라 스폰서의 힘이 되겠지.
“역시, 우리가 돕기는 좀 무리겠지?”
채희라가 다시 물었다.
서유림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자 나름대로 서유림의 마음을 해석한 모양이다. 우리가 도울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당장은 무리니까.
하지만 맞는 해석도 아니다. 아예 손 놓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지금부터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나만의 힘, 나만의 군대를 만들 방법을.
만약 성공한다면 그냥 두고 볼 이유가 없겠지. 아예 이참에 그런 놈들을 말끔하게 소탕해버릴 것이다.
오지랖이라고?
해결할 능력도 없이 참견한다면 오지랖이 되겠지. 하지만 능력도 충분하고 참견해야 할 이유도 확실하다면 그건 오지랖이 아니다.
신념이다.
내게는 그래야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으니까.
내 능력에 맞는 역할이니까. 그런 일을 해야만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일을 통해서 정령소환력을 쌓는 것은 덤이 되겠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만큼 성공하기만 하면 정력소환력이 적지 않게 오를 것이다.
‘응? 정령소환력?’
갑자기 머릿속에 아버지의 얼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잘만 하면 빠른 시간 안에 나만의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서유림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때리며 소리쳤다.
느닷없는 행동에 채희라는 물론이고 조용히 서있기만 했던 도상국조차도 움찔 놀랐다.
“왜, 오빠? 무슨 생각인데?”
그걸 채희라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 정령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우리도 하노이파에 버금가는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 서울에 있는 조폭들을 손에 넣으면 하노이파 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뭐어?”
채희라가 조금은 황당한 표정을 했다.
하긴, 조폭 손에 넣는 일을 무슨 장난감 쇼핑하듯 쉽게 이야기하니 황당할 수밖에.
대놓고 비웃지 않은 게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채희라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런 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도 그런 놈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도상국도 합세해서 우려를 드러냈다.
사실 그런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하긴 하다.
하지만 채희라의 걱정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조폭이 아니라 군대를 만들려는 거니까. 놈들에게서 조폭의 색깔을 완전히 벗길 것이다.
서유림이 채희라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 못 믿어?”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채희라가 조금은 안심하는 듯했다.
“물론 믿지. 그런데 방법은 있어?”
“희라가 조폭 정보만 좀 모아줘. 어디에 어떤 조폭이 있고, 우두머리가 누구고, 어디를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텐프로들 통하면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나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
채희라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상국도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다니.
서유림이 다시 활짝 웃었다.
“그냥 날 믿으라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일이 끝나고 나면 그때 보고 판단해줘.”
채희라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그나저나 오빠, 토너먼트 32강전이 나흘 후인데 이렇게 시간낭비해도 되는 거야?”
“결승도 아니고 32강인데 뭐.”
“자신만만한가보네. 이번 대회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다며?”
“MAN FC가 중국시장을 노리는 것 같더라고. 이번에 내가 상대할 선수도 중국선수고.”
“상해로는 언제 출발하는데?”
사실 당일에 출발해서 경기만 마치고 그날 돌아오고 싶었다. 무제한급이라서 계체도 필요도 없거든.
하지만 전날 계체 행사에 꼭 참여해야 한다고 하니 미리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전날에 가면 되겠지 뭐.”
“그렇구나. 근데 그건 어떻게 됐어? 준비는 다 된 거야?”
그게 뭔데?
서유림이 눈빛으로 물었고, 채희라도 ‘그거 있잖아. 비밀스러운 것.’ 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제야 뭔지 감이 왔다.
아무래도 채희라와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봐. 눈빛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네.
“내가 준비할 게 뭐 있나? 마루에서 알아서 잘 하겠지. 다들 그쪽으로 전문가들이잖아. 아마 일주일 전에 중국에 들어갔을걸.”
“그럼 제대로 준비하고 있겠네. 아무튼 파이팅 해!”
“그럼 이쯤에서 헤어질까? 난 저놈들 업소 앞에 버려두고 집으로 갈게.”
“알겠어, 오빠.”
채희라와 헤어진 서유림이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승합차에 올라탔다.
승합차에는 업소 사장들이 결박당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하지만 곱게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놈들은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나쁜 짓만 하게 되어있거든. 원래 본성이라는 게 잘 안 변하는 거잖아.
“집으로 보내준다고 안심하지 마라. 앞으로 똑바로 사는 게 좋을 거다. 다시 걸리면 영영 세상 구경 못하게 될 테니까.”
서유림이 업주들의 뒤통수를 쓰다듬듯 만지면서 충고했다.
그러자 업주들이 갑자기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체력을 완전히 밑바닥까지 쭉 빨아버렸기 때문이다.
서유림의 체력흡수 능력은 이제 거의 200 가까이까지 되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오직 체력흡수만으로 업주들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계에서의 살인은 아직 꿈도 안 꿔본 일이었다. 제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살인’이라니.
정령계에서 마물을 제아무리 사냥한다고 해도 인간계에서의 살인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체력을 흡수해줬다.
아마 하루 이틀은 이대로 잠들어있을 것이다. 그나마 밥숟가락이라도 들을 정도로 기력을 차리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리겠지.
섹스?
후훗, 그게 하고 싶어질 정도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적당한 시점에 다시 찾아가서 체력을 한 번 더 빨아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놈들에게 그 정도 기력은 지나친 사치니까.
남은 인생은 평생 건전하게(?)만 살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