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아버지를 부탁해. (1)
권진아가 새롭게 보인다. 왜 이러게 지적이야?
한편으로는 한상민이 바보스럽게도 생각되었다.
뭐? 자신이 나서면 결과는 빤하다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는 꼴이군.
물론 나중에 권진아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 말하는 것을 보니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정말 대리님께는 아무 얘기 없었어요?”
이젠 부담 없이 사실을 이야기해줘도 되겠다.
“정확하게 봤어. 사실은······.”
서유림이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물론 여동생 남자친구의 사고 이야기는 빼고.
권진아가 입을 떡 벌렸다. 혼자 실컷 유추하긴 했지만, 막상 서유림의 입을 통해서 진실을 알게 되니 느낌이 새로운 듯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더욱 큰일이 있었다.
권진아의 눈빛이 갑자기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럼 대리님······ 저 때문에 2억 원 기부해야 하는 거예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권진아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군.
서유림은 그냥 피식 웃었다.
권진아에게는 그 모습이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식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이제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다.
“어떻게 해요? 나 몰라. 그냥 농담이었다고 하세요. 그럼 다들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금방 잊을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로군.
잠깐의 쪽팔림으로 2억 원 세이브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 격투기 팬이나 시청자들도 그냥 피식 웃고 말 테고.
물론 조금 가벼운 놈으로 찍히는 건 어쩔 수 없고.
하지만 그럴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 어쩌면 그것이 정령소환력을 한순간에 확 끌어올린 이유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2억 원, 그리 아깝지 않다니까. 두리랜드에 그쯤 못 보태줄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권진아씨는 권진아씨 걱정이나 해.”
그러자 권진아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근데 저 정말 어떻게 해요? 실장님은 주변에 예쁜 여자도 많으면서 왜 하필 저 같은 평범한 애를 찍어서······.”
평범한 애?
사실 너 정도면 ‘평범한 애’라고 보긴 좀 어렵지. 그래도 명색이 명진식품 퀸카잖아.
물론 연예인 급 외모는 아니지만, 너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연예인 못지않은 매력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단다.
“그냥 소신대로 행동하면 되겠지. 설마하니 가만히 있겠다는데도 이상한 짓을 하겠어?”
“그럴 것 같으니까 걱정이죠.”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해결해주마.
한동민 못 봤어? 처음에는 널 유혹하려고 별짓 다 했잖아.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어? 너는 물론이고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잖아.
조만간 한상민도 그 꼴이 날 거란다.
서유림이 권진아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우리 권진아씨한테는 서유림이라는 든든한 애인이 있잖아.”
“풋! 대리님도 참.”
권진아도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권진아의 웃는 모습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집 앞까지는 바래다주셔야죠.”
참내. 내가 네 애인이냐? 여기까지 함께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할 것이지.
그래도 거의 다 왔다고 하니 내가 인심 쓰마.
“권진아씨는 애인 없어? 이런 때는 애인을 불러서 에스코트를 받아야지.”
“삶이 바쁘니 애인 만들 시간도 없네요. 이제부터 만들어야죠. 누군 좋겠다. 대리님 같은 애인 둬서.”
뭐야? 나한테 작업 들어오는 거야?
아니지. 오해하면 안 돼.
사실 명진식품에서 난 ‘애인 있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다. 강은영 떨쳐내려고 ‘애인 있다.’ 한 마디 한 것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여튼 여자들은 빠르다니까.
“저기에요. 이제 가셔도 돼요. 여기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골목이 좀 외지고 어둡긴 하다. 오가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밤에는 여자 혼자 다니기 무섭겠어.
오늘 바래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쿨하게 손을 한 번 흔들어보이고는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내려서부터는 걸어서 갔다. 아직 열 시도 안 된 시각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귀가였다.
근데 와! 자동차 정말 많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 좌우로 자동차가 빼곡하다. 길이 아니라 주차장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언덕길을 따라 사뿐사뿐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강한 불빛과 함께 빠앙- 하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경적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덤프트럭이라도 지나가는 줄 알았다.
깜짝이야.
얼른 주차된 자동차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쳐 올라갔다.
시속 70km는 될 것 같다. 평범한 도로에서는 빠르지 않은 속도였지만, 이런 좁은 도로를 저렇게 달리니 광란의 질주로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어떤 놈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차량을 노려보았다.
고급 외제차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눈에 익은 번호판이다.
[1111]
‘어! 그 놈이네!’
카드에서 에이스 4카드에 해당하는 번호판이라서 유독 기억에 남았다. 게다가 차량을 난폭하게 운전하기로 소문난 놈이라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어디 사는 놈인지도 대충은 안다. 서유림이 사는 빌라 위쪽에 형성되어있는 고급주택가다.
차량은 순식간에 저만큼 올라갔다. 그곳에서 다시 천둥소리 같은 경적소리를 울렸다.
저놈의 특기다.
시도 때도 없이 경적 울리기.
특히 골목 사거리에서 많이 울렸다. 내가 지나갈 거니까 다른 놈들은 알아서 멈추라는 경고음이었다.
그리고는 속도를 전혀 줄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달려갔다.
사고나봤자 어차피 보험처리 할 거고, ‘내 차량은 비싸니까 부딪쳐봤자 너만 손해다.’ 그거지.
그런데 그때 저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짧게 들렸다.
“어이쿠!”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서유림의 오감이 워낙 발달한 상태라서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비명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
재빨리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전력으로 뛰는 바람에 100m를 7초 이내에 주파할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낸 것 같다.
고급 외제차가 멈춰서있었다. 운전자가 내려서 비명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순식간에 도착했다.
“아버지!”
버럭 소리 지르며 차량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주차된 차량 사이에 넘어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계셨다.
아버지도 서유림을 발견하셨다.
하지만 통증 때문인지 입술을 질끈 깨물기만 하셨다. 손으로 엉치뼈 부근을 잡고 계셨다. 아무래도 넘어지면서 그쪽을 다친 듯했다.
그때 운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조금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 서유림 대리! 아버님이셔?”
서유림이 고개를 거칠게 돌렸다.
한상민의 비서였다. 특별한 직책은 없지만 유진그룹에서는 이자를 장성식 부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자식 뭐야? 사람 다친 것 안 보여? 그것도 네가 운전을 그따위로 해서 다친 거잖아.
그럼 당연히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 아냐? 그게 기본이잖아.
하지만 장성식은 기본이 안 된 놈이었다.
“아저씨. 제가 친 것 아니죠? 혼자 넘어진 것 맞죠? 제 차에 블랙박스 다 달려있어요. 측면도 전부 보이거든요.”
“장 부장님. 지금 그게 중요해요? 사람이 다쳤잖아요.”
서유림의 말에 장성식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놓았다.
“하하 참. 그건 아는데, 사실관계는 확실하게 해야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내려서 봐주고 있잖아. 하암. 피곤해 죽겠고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경적소리에 놀라서 그런 것 아닙니까?”
“미치겠네. 그럼 경찰에 신고하던가. 하암. 아무튼 난 잘못 없어. 그러게 차가 오면 빨리빨리 피해야지 왜 늑장을 부려?”
사람이 저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잘잘못을 떠나서 사람이 다쳤으면 일단 병원부터 데려가야지.
하지만 장성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만큼 인간말종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유유자적 차량을 타고 떠나려고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차를 타기 전에 자빠뜨렸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체력이 바닥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복수를 해야겠다.
서유림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슬립다운!’
그러자 이제 막 출발하려던 차량이 헛바퀴를 돌면서 오히려 뒤로 주르륵 밀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는 차량들을 쿵쿵 부딪치며 밀려 내려갔다.
서유림은 슬립다운 마법을 풀지 않았다.
장성식이 당황한 모양이다. 가속페달을 힘껏 밟은 듯 엔진소리가 격하게 들려왔다.
그 순간 슬립다운 마법을 풀었다.
옆으로 비틀어진 차량이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면서 주차된 차량을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차량 예닐곱 대가 파손된 듯했다.
좀 더 혼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가 먼저다. 빨리 병원부터 모시고 가야겠다.
“업히세요, 아버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차량으로 달려갔다.
순간 다리가 살짝 휘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립다운 마법을 무리하게 펼치면서 체력이 바닥난 듯했다.
하지만 이쯤은 버틸 수 있다. 200m만 뛰면 된다.
어금니를 깨물고 차량에 도착했다.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사가 엑스레이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기 보이시죠? 엉덩뼈에 금이 갔습니다. 수술까지는 필요 없지만, 최소 4주 이상은 입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계셨다. 폐가 좋지 않아서 기침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마다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듯했다.
“진통제 좀 놓아주실 수는 없나요?”
“일단 처방했습니다. 곧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응급실로 몰려왔다.
“아휴,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빠!”
“소란 떨 것 없어. 혼자 넘어진 거야.”
아버지가 애써 통증을 참으며 가족을 달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운동 삼아 산책을 다녀오시는 길이었단다.
환자복을 입고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니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 달려가서 장성식의 목뼈를 부러뜨려버리고 싶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뺑소니 아닌가? 아무리 차량과 직접 충돌하지 않았다지만 100% 원인제공을 한 거잖아.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고 오겠습니다.”
서유림이 경찰서로 달려갔다.
하지만 경찰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직접 부딪친 게 아니라고요? 고의성이 있을만한 것도 없고. 그럼 처벌은 어렵겠는데요.”
“경적소리에 놀라서 넘어지신 건대도요?”
“그것만 가지고는 처벌이 힘들죠. 입증하기도 어렵고.”
이게 말이 돼?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한 게 분명하잖아.
직업이 경찰인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 비슷한 판례를 어디서 본 것 같긴 해. 처벌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입증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 같은데. 피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피해가 큰 게 아니라니. 아버지 엉덩이뼈에 금이 갔는데?”
- 물론 아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큰 피해지. 하지만 사회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누가 죽거나 앞길 창창한 청년이 평생 불구가 되거나 해야 큰 피해로 생각하지.
어쨌건 결론은 같았다. 입증이 너무 어려워서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이해도 갔다.
법 적용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막말로 이런 사건을 교통사고로 인정해주면 ‘나도 경적소리에 놀라서 넘어졌소.’ 하는 신고가 빗발칠 거라는 거지.
그럼 그 모든 사건의 선을 어떻게 정확하게 그을 것이며, 진위는 또 어떻게 가릴 것인가?
한마디로 법의 허점이었다.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허점.
그래서 힘 있는 놈들이 그런 허점을 마음껏 이용하는 거다. 당당하게 죄를 저지르고도 ‘어디 법대로 해봐.’ 하며 큰소리 탕탕 치는 거지.
장성식도 마찬가지겠지. 법적으로 따지면 자신이 이긴다 그거잖아.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내가 직접 처벌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처벌받지 못한 것을 후회할 정도로 철저하게.
억울해? 법대로 하라지. 난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고 너님을 벌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지? 완전범죄는 무죄나 마찬가지라는 것.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두리랜드의 임채모를 만난 후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무엇을 향해 내 인생을 던질 것인가?]
임채모와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생각을 굳혔다. 죽기 전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내 모든 것을 모두 불태우겠노라고. 완전히 탈탈 털어서 빈손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무엇을 위해 불태울 것인가를 정할 수가 없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진 능력이 워낙 대단해야 말이지. 능력이 큰만큼 목표도 그만큼 크게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로소 답을 찾아낸 것 같다.
[법이 처벌하지 못하는 범죄자들을 내손으로 처벌하겠다. 그리하여 내 손으로 법의 허점을 조금이나마 메워보겠다.]
한마디로 내가 또 다른 법의 심판자가 되는 거지.
물론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가 잘못 판단하여 죄 없는 자를 심판하게 된다면 그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그래서 강한 힘에는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 신중하게 생각하자. 하지만 결심이 서면 망설이지 말자.
먼저 장성식의 문제부터 생각해보았다.
유죄인가, 무죄인가.
결론은 유죄다. 그것도 죄질이 아주 나쁜 유죄.
내 가족을 다치게 해서가 아니다. 그놈이 지금껏 해온 행동과 앞으로 할 행동을 고려한 판단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고, 또 만들 것 아닌가?
법이 막아주지 못한다면 내가 막아주는 수밖에.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놈이 아니거든.
곧 적당한 기회가 오겠지. 그때마다 죗값을 조금씩 치르게 하면 되겠지.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시각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웠다. 여동생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어머니 혼자 남아계셨다.
“너도 그만 들어가서 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내일 휴가 내면 돼요. 오늘은 제가 있을 테니까 어머니께서 들어가세요.”
“너 오늘 많이 피곤해보여. 엄마는 괜찮다니까.”
피곤하긴 했다. 너무 흥분해서 슬립다운 마법을 과하게 사용한 탓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연세가 제법 있으셔서 뼈가 쉽게 아물지 않을 텐데. 게다가 진통제 효과가 떨어지면 또 심한 통증을 느끼실 텐데.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좀 좋았을까? 난 아리안이 있어서 이 정도 부상은 금방 치료될 수 있을 텐······! 응? 아리안? 정령?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정령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