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너도 억울하면 ○○해라. (1)
서유림이 눈을 번쩍 떴다.
약간 현기증이 일었다. 손끝 발끝에도 가벼운 경련이 느껴졌다.
정령계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 탓이다. 겨우 5일에서 하루 더 머무른 것뿐인데 몸에 이런 이상 현상이 오다니.
‘역시 아리아나의 충고는 흘려들으면 안 돼. 그나저나 마법을 써보고 싶은데.’
하지만 일단 컨디션부터 정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훅. 훅.
서유림이 창고에서 발차기를 연습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마법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라이트사이트는 사용해보았다. 불을 모두 끈 상태에서도 주변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슬립다운은 아직 사용해보지 못했다. 빨리 사용해보고 싶어서 조급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용해볼 수도 없고.
오늘 밤에는 어둑한 뒷골목 좀 다녀볼까? 불량배를 만나면 거리낌 없이 사용해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헛수고일 것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불량배 찾아다니면 오히려 만나기가 힘들더라니까.
한상민에게 사용하면 딱 좋겠지만, 그놈은 얼굴 보기가 더 힘들고.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당장 사용하지 않는다고 마법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느새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
서유림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강은영이 기다렸다는 듯 서유림을 불렀다.
“서 대리님! 이 기사 보셨어요?”
“어떤 기사?”
강은영이 직접 보라는 듯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MAN FC 사회자 홍상기, 두리랜드에 1억 원 기부 발표]
한상민의 짓이다. 서유림을 압박하려는 거겠지.
하여튼 추진력은 좋다니까. 벌써 기사로 떴네.
상관없다. 막말로 이번 토너먼트 끝나면 들어올 돈이 25억 원이다. 그중 2억 원쯤 기부 못 할까?
오히려 두고두고 뿌듯할 것 같았다. 한상민의 돈 1억 원까지 덤으로 기부하게 만들었으니 뿌듯함은 두 배가 되겠지.
덕분에 두리랜드도 제법 큰 운영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상민이 옆에 있었다면 잘했다고 ‘우쭈쭈’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권진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권진아가 평소처럼 전화를 받았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흘렀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서유림도 다른 팀원들처럼 권진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지?
권진아는 별 이야기 없이 그저 네, 예, 같은 대답만 반복하다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는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서 대리님. 유진그룹 한상민 실장님께서…… 저녁 일곱 시까지 저와 함께 ‘어가’라는 식당으로 오라고…….”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식당? 한상민과 함께 밥을 먹는다고?’
이게 웬 떡이야? 그렇지 않아도 얼굴 볼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제 발로 무덤을 파는구나.
잘됐다 싶었다. 오늘 드디어 슬립다운 마법을 써먹어보겠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지? 권진아와 헤어지라고 압박하려는 모양인데 왜 권진아와 함께 오라는 것일까?
가보면 알겠지.
“그런데 ‘어가’가 어디야?”
“제가 알아요.”
어가(漁家).
딱 봐도 고급스러운 일식집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가장 싼 것이 2만9천 원이었고, 비싼 것은 1인분에 20만 원짜리도 있다.
잠시 후, 한상민이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
“앉아, 앉아.”
음식이 주르르 나왔다.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맛은 좋네.
그런데 양이 너무 적다. 4인분이 나오는데, 혼자 다 먹어도 배가 안 찰 것 같다.
“서 대리, 기사 봤어?”
“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얘기해.”
한상민이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깟 돈 2억 원, 전혀 아깝지 않거든.
오히려 한상민이 저렇게 싸움을 걸어주니 고맙다.
사실 한상민의 뒤통수 칠 일을 하나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결행만 하면 될 정도로 마무리단계였다.
이런 식으로 자꾸 속을 긁어주니, 그날이 무척 기대되었다. 개봉하는 순간 속이 후련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상민이 이번에는 권진아를 바라보았다.
“권진아씨. 유진그룹 본사에서 근무해볼 생각은 없어?”
“예?”
권진아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서유림도 조금 놀랐다. 한상민이 그런 카드까지 준비해온 줄은 몰랐네.
‘내가 안 넘어가니까 권진아를 넘어뜨리겠다는 수작이겠군.’
권진아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겠다. 제아무리 계약직이라고 해도 작은 계열사인 명진식품에 다니는 것과 유진그룹 본사에 다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제안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1년 정도 버텨내면 정직원으로 전환시켜줄게.”
하마터면 입이 벌어질 뻔했다.
명진식품 정직원만 해도 파격적인 인사제안일 것이다. 그런데 유진그룹 정직원이라고?
권진아 부모님이 저 이야기를 들었다면 집안에 경사 났다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권진아에게 좋기만 한 일일까? 뭔가를 결정할 때에는 조금 길게 내다봐야 하는데.
뭐, 권진아가 알아서 하겠지. 물론 기회를 봐서 지금의 상황을 살짝 귀띔은 해줘야 하겠지만.
“생각 있으면 인사팀에 이야기해. 그럼 내년 봄 정기인사 때 본사로 올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권진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는 무슨. 권진아씨 일 잘한다고 소문나서 스카우트하는 건데. 오늘은 서 대리 토너먼트 우승을 기원하는 자리고. 자, 거국적으로 한잔하지?”
기분이 영 찜찜하네. 권진아 미래가 자꾸만 걱정된다.
나중에 슬쩍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 중인지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그나저나 한상민 저놈을 어떻게든 해야겠다.
대충 식사를 마쳤다. 양이 워낙 작아서 먹은 것 같지도 않지만.
“그만 일어설까?”
한상민이 먼저 일어섰다.
서유림은 순간 ‘지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하는 내내 지금과 같은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서유림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아리아나가 가르쳐준 동작이었다.
‘슬립다운!’
슬립다운은 그냥 미끄럽기만 한 마법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름이 ‘slip down’이 아니라 그냥 ‘slip’이 되었겠지.
슬립다운은 바닥을 미끄럽게 함과 동시에 아래쪽을 슬쩍 밀어주는 효과까지 있다. 한마디로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는 것도 쓰러뜨릴 수 있는 마법이지.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상민의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정확히 식탁 위였다. 간장이며 초장이며 남은 음식물들이 제멋대로 엎어지고 뒤집어졌다.
와장창창-
“아이쿠!”
“실장님!”
비서가 깜짝 놀라서 얼른 달라붙었다.
하지만 서유림이 조금 더 빨랐다. 이런 좋은 기회를 빼앗길 수야 있나?
재빨리 한상민의 팔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은 것 같다. 등허리가 식탁 모서리에 부딪치는 걸 봤거든.
한상민이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오만상을 썼다.
“됐어. 놔.”
한상민이 서유림의 손을 뿌리쳤다. 대신 비서의 부축을 받았다.
옷이 음식물들 때문에 엉망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을 보니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다.
아쉽네! 한 방에 보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서유림의 손가락이 다시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서의 발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으앗!”
저런 바보! 그럴 땐 한상민을 재빨리 놓았어야지. 그렇게 물귀신처럼 붙잡고 있으면 함께 넘어지지.
비서와 한상민이 사이좋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런데 하필 비서가 한상민의 몸 위로 포개졌다. 마치 깔아뭉개듯.
한상민의 성격으로 볼 때 아무래도 오늘이 비서의 제삿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유림이 다시 재빨리 다가갔다. 각각 한 손으로 비서와 한상민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그러면서 비서의 체력도 흡수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나름대로 괜찮은 콤비네이션인걸. 넘어뜨리고, 잡아주는 척하면서 흡수하고.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다.
“바닥이 미끄러운 것 같습니다. 조심하세요.”
비서가 서유림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한상민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괜찮으십니까?”
“씨발 뭐야? 자빠지려면 혼자 자빠질 것이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서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쩔쩔맸다.
한 번 더 할까 하다가 관뒀다. 한두 번은 실수라고 하지만, 세 번 연속이면 누가 봐도 이상한 느낌이 들 테니까.
두고두고 써먹으려면 자연스러워야 한다.
게다가 체력도 힘껏 빨아주지 않았는가?
마력이 173이나 되기 때문에 체력흡수 능력도 똑같이 173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단번에 체력을 바닥까지 빨아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면 또 이상한 낌새를 느낄 것 같아서 반 정도만 빨아주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저것 봐. 벌써 효과가 나타나잖아.
“아 씨발. 잘못 넘어졌나? 온몸이 다 결리네.”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상민 눈치 때문에 마음껏 행동하지는 못했지만, 연신 어깨를 으쓱으쓱하고, 고개도 돌려보았다. 다리도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후훗, 기분이 어때? 사나흘 연속으로 섹스를 다섯 번씩 하고 난 기분일 거다.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훅 내뱉어주고 싶었다. 얼마 전 한상민에게 들었던 그대로 말이다.
왜? 억울해? 너도 억울하면 강해져라. 네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누가 강해지지 말래?
“제가 부축해드릴까요?”
“씨발, 됐어. 내 몸에 손 대지마.”
한상민이 서유림의 손을 뿌리쳤다. 대신 비서의 어깨를 짚었다. 곧 죽어도 비서에게만 의지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이를 어째? 네 비서 다리 후들거리는 것 보니 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저러다가 슬립다운 마법도 없이 알아서 자빠지겠는걸.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차량에 탔다.
운전 역시 비서의 몫이었다.
조금 걱정되는걸. 저 상태로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설마 교통사고 나서 죽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괘씸한 놈들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사고가 나면 죄책감이 들 것 같다.
문득 아리아나의 말이 떠올랐다.
[마법은 정령신께서 특별히 허락해주신 능력이에요. 잘못 사용하면 정령신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어요.]
다음부터는 조금 자제해야겠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체력을 흡수하면 2차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한상민도 사라졌으니 권진아와 2차를 가볼까?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까?”
그러자 권진아가 피식 웃었다.
“사실 저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대리님 뷔페 좋아하시죠? 가까운 곳에 괜찮은 일식 뷔페 있어요. 제가 살게요.”
“에이, 내가 사야지. 일단 가자.”
2만 원짜리 뷔페였다.
아까 일식집은 1인분에 15만 원짜리였다. 값은 반의반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한데 맛은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양도 무한정이고. 무엇보다도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없으니 맛이 두 배는 좋은 것 같다. 권진아와 단둘이 먹어서 더 맛있는 건가?
어쨌건 음식은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지.
권진아도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밝다. 이따금 서유림을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어주기까지 한다.
다른 남자 앞에서는 그러지 마라. 그런 웃음, 남자 오해사기 딱 좋다.
이쯤에서 슬쩍 물어보면 될 것 같다.
서유림이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권진아씨, 본사 갈 거야?”
그러자 권진아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뇨. 당연히 안 가죠.”
뭐가 이렇게 간단명료해? 솔직히 욕심나는 제안 아닌가? 누구라도 갈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왜?”
“설마 몰라서 묻는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네 머릿속을 어떻게 알아?
“실장님이 저를 본사로 끌어가려는 이유가 뭐겠어요?”
“일 잘한다고 소문났다며.”
“그 거짓말을 믿어요? 입사한지 1년도 안 됐는데 무슨 소문이 났겠어요?”
그건 그러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구매팀에서 그나마 일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은 오영훈 주임인데, 유진그룹에서 오영훈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직무관계자 몇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권진아 똑똑하네.
“그럼 이유가 뭔데?”
“절 가지고 놀고 싶은 거겠죠. 그러다가 싫증나면 버릴 테고. 실장님이 대리님께는 아무 얘기 없었어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저랑 헤어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권진아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MAN FC 사회자가 1억 원 기부한다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실장님이 대리님 노리고 꾸민 일 같던데요.”
와! 이쯤 되면 한번쯤 놀라서 자빠져줘야 하는 건가? 셜록홈즈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