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억울하면 출세해라. (2)
순간 관중들이 ‘와아!’ 하며 함성을 터뜨렸다.
사실 다들 궁금해 하고 있었다. 서유림이 과연 얼마를 부를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금액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누구라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유림이 이런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궁금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회자를 물고 늘어지는 재치를 보여주자 크게 만족하며 호응해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자를 압박하는 것이기도 했다. 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도 네 손으로 하라는 것이다.
사회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시 노련했다. 재빨리 표정을 감추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상황을 회피했다.
“정말 재치 있는 대답입니다. 여러분! 서유림 선수였습니다!”
서유림이 관중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케이지를 내려왔다.
이어서 마지막 경기가 치러졌다.
예상대로였다. 밀코 그로캅이 1라운드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강력한 스트레이트펀치를 성공시켰다. 주무기인 불꽃 하이킥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상대 선수가 무명선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경기장이 후끈 달아오르기에는 충분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한상민이 서유림을 불렀다.
한상민은 이번에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비서는 한상민의 그림자처럼 옆에 묵묵히 서있었다.
“오늘 잘했다. 경기도 재미있게 했고, 인터뷰도 재치 있었다.”
웬일이야? 한상민이 칭찬을 다해주고.
그런데 칭찬이 아닌 모양이다.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빛에 약간의 조롱 섞여있었다. 입꼬리도 기분 나쁘게 살짝 말려 올라가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건 없고. 그보다 너 이제 어떻게 하냐? 아무래도 생돈 날아가게 생겼다.”
웬 생돈이 날아가? 무슨 일인데?
“사회자가 1억 원 기부하기로 결심했단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회자가 1억 원씩이나 기부한다고?
말도 안 돼. 1억 원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이야? 사회자가 재벌 2세가 아닌 이상 그런 결정을 그렇게 쉽게 하진 못 할 텐데.
게다가 슬쩍 들리는 소문에 사회자가 무척 짠돌이라고 하던데.
그걸 떠나서 한상민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 사회자는 경기 내내 케이지 근처를 떠난 적이 없는데.
경기 끝나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한상민한데 보고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구린 냄새가 나는걸.
“가만있어보자. 그럼 계산이 어떻게 되나? 이번에 우승 못 하면 나한테도 10억 원 줘야 하고, 기부금까지 2억 원을 내야 하네. 너 부도 나게 생겼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면 날 불러서 굳이 그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잖아.
“다음 32강전에서 발표할 계획이래. 그럼 빼도 박도 못하고 무조건 2억 원 기부해야 해.”
잠시 말을 멈춘 한상민이 서유림의 눈을 집요할 정도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거 막아줄까? 그럼 최소한 2억 원은 세이브 할 수 있잖아.”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왜 자꾸 핵심을 피해서 말하는 거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서유림의 물음에 한상민이 씨익 웃었다.
바로 대답하지는 않고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툭 던지듯 물었다.
“너 여자 한 번 만나볼래? 내가 아주 기가 막히게 예쁜 여자를 아는데.”
무슨 수작이지? 저놈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네.
“권진아씨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미인이야. 얼굴 끝내주고, 몸매? 키야! 환상이지!”
한상민이 두 손으로 커다란 젖가슴을 떠받치는 모션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왜 갑자기 권진아 이름이 나오지?
“어차피 권진아씨랑 결혼할 것 아니잖아. 둘이 서로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고. 이제 바꿔 탈 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더 예쁘고 쭉쭉빵빵한 아가씨로 붙여준다니까.”
갑자기 뒤통수에서 꿍!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한마디로 네가 권진아와 헤어지라는 거잖아.
그러면 혼자가 된 권진아를 한상민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고.
무슨 이런 황당한 얘기가 다 있어?
너무 황당해서 마땅히 대꾸할 말도 안 떠오른다.
“지금 저한테 권진아씨와 헤어지라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에이, 협박이라니. 표현을 왜 그렇게 과격하게 해? 그냥 권하는 거지. 어차피 선택은 권진아씨 몫이잖아. 안 그래?”
어딘가 모르게 궤변인 것 같은데 얼핏 들으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권진아가 선택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지.
이거 왠지 한상민의 화술에 말려드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나는 한상민의 제안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
권진아와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놈 아가리에 권진아를 집어넣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저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참 세상 어렵게 사네. 결과가 안 보여. 내가 나서면 권진아씨가 네 곁에 계속 남아있을 것 같아?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쉽게 가야지. 그래야 권진아씨도 마음고생 없고, 나도 편하고, 너도 돈 아낄 것 아냐? 게다가 더 예쁜 여자친구까지 얻고.”
결국 돈으로 협박하는 거 맞네.
내가 진짜 웬만하면 욕을 안 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이 개새끼야!’
“왜 표정이 그래? 억울해? 어쩔 수 없어. 그게 세상이니까. 그게 싫으면 출세하던가. 누가 출세하지 말랬어?”
출세하라고? 출세하지 못하면 여자 친구 빼앗기는 거는 당연하다는 거야?
네가 더러운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당연히 ‘YES’라는 말은 못 해주겠다. 그러면 너한테 굴복하는 것 같기도 하고, 권진아에게 정말 큰 죄를 짓는 기분도 들 것 같다.
그걸 떠나서 권진아를 지켜주고 싶다. 권진아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켜주고 싶다.
그런데 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다.
뭐? 사회자가 1억 원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순 거짓말이다.
한상민이 기부하는 거겠지. 만약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사회자에게 1억 원 지원해줄 테니 그거 기부한다고 선언하라고.
아마 실제로도 그렇게 할 것 같다. 그래놓고는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려 하겠지. 권진아와 헤어지라고. 그러면 1억 원 기부 선언을 철회하도록 시키겠다고.
그래! 이참에 좋은 일 좀 하지 뭐.
너 1억 원, 나 2억 원. 합해서 3억 원. 손잡고 나란히 기부하자고.
그래도 난 상금에 내기 금액까지 23억 원은 남거든.
그나저나 이대로 그냥 있으면 그림이 너무 굴욕적이잖아. 꿈틀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서유림이 표정을 딱딱하게 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힘이 없는 놈이라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입니다.”
“하하하.”
한상민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턱까지 하늘로 치올리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대고는 입꼬리 말아 올린 표정으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네. 밟으면 꿈틀댄다고? 어떻게?”
어떻게? 나 같은 하층민은 꿈틀대봤자 귀여울 뿐이다 그거지?
착각으로 만리장성 쌓고 계시는군.
그 착각, 조만간에 예쁘게 무너뜨려주지. 뒤통수에 붙일 반창고 좀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발설하면 재미없지. 그냥 선물보다는 깜짝 선물이 늘 더 기억에 남는 법이잖아.
“어쨌건, 저는 돈 때문에 여자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한상민이 더욱 활짝 웃었다. 자신은 이만큼 자신있다고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알았어. 그만 나가봐!”
보면 볼수록 쓰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놈은 어디 부러뜨리거나 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안 될 것 같다. 나중에 유진그룹 회장이 되면 더욱 끔찍한 짓들을 많이 저지를 것 아냐?
그렇게 두면 안 되지. 그럼 나도 범죄 방조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곧 기회가 온다. 그때가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사회적 생명의 제삿날!
서유림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옆에 조용히 서있던 비서가 한상민에게 슬쩍 물었다.
“실장님. 혹시…… 권진아씨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권진아? 후훗.”
한상민이 피식 웃었다. 권진아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장 부장.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걸어본 적 있어?”
그런 경험 한 번 없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까지만 들어도 한상민이 권진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상민의 말허리를 자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니까.
“예.”
“참 기분이 좋지 않아?”
“좋죠. 세상에 첫 발자국을 찍는 느낌처럼.”
“권진아는 그런 느낌이야.”
순간 장 부장의 눈에 권진아의 미래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내가 밟고 나면 그 눈밭도 다른 눈밭처럼 금방 지저분해지니까.
그럼 한상민은 다른 새로운 눈밭을 찾아 떠날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눈밭이 널리고 널렸으니까.
불쌍한 아가씨 하나 인생 망치게 생겼군.
물론 장 부장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권진아도 그 덕분에 돈 좀 만질 수 있을 테니까.
“권진아는 유독 풋풋한 느낌이 있어. 장 부장 같은 사람은 무조건 예쁜 여자가 최고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더 특별한 게 필요한 법이지. 권진아는 그런 게 있어.”
사실 장 부장도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다.
권진아가 눈이 부실 정도의 미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옆에 있으면 자꾸만 눈이 가고 관심이 가는 아가씨였다.
한상민이 찍지 않았다면 장 부장이 욕심을 냈을 수도 있다.
“잘만 되면 한 3개월에서 1년 정도는 꿀 빨면서 살 수 있겠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꿀. 후훗.”
한상민은 벌써 기대가 된다는 듯 흥분된 표정을 했다.
장 부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여자를 밝힐까? 한상민이 여자만 덜 밝혔어도 벌써 기업체 몇 개는 물려받았을 거다.
한상민도 그걸 알 텐데 관심 가는 여자만 보면 절제를 못 한다.
그러고 보니 한유진 회장도 그런 성격이라고 했다. 한유진 회장이 여자만 밝히지 않았어도 유진그룹은 국내 3대 재벌그룹이 되었을 거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보다.
“하지만 내가 권진아를 들먹이는 건 꼭 그것 때문은 아냐. 오히려 서유림 때문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권진아 때문에 서유림을 압박하는 게 아니고, 서유림 때문에 권진아를 건드는 거라고?’
“서유림. 제법 매력적인 놈이야. 잘만 길들이면 오래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너무 뻣뻣하단 말이야. 저런 놈은 한 번만 부러뜨려주면 돼. 그런데 딱 보니 권진아가 제일 아픈 구석인 것 같더라고. 후훗.”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군. 역시 실장님은 보통 분이 아니라니까.’
장 부장은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놈 하나 길들이는데 1억 원씩이나…….”
한상민이 피식 웃었다.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어차피 운영비에서 지출할 건데.”
“……아!”
장 부장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다는 거지?
서유림이 주차장에서 기웃기웃했다. 차가 워낙 많아서 찾기가 힘들다.
그러다가 문득 채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여기야!”
채희라가 창문을 열고 얼굴을 보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오늘도 선글라스에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른 채희라의 차에 탔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경기를 마친 날은 꼭 채희라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러다가 습관 되겠는걸.
뭐, 나쁘지는 않다. 아니, 좋다!
“상국이는?”
“오빠 만나는데 상국씨를 왜 데려와?”
하긴, 상황이 좀 애매해지긴 하겠다. 둘이서 모텔에서 즐기는 동안 도상국을 밖에 세워두는 것도 이상하잖아.
“오늘 오빠 정말 멋졌어. 인터뷰도 너무 멋졌고. 두리랜드 이야기에서 나 감동 먹었잖아!”
“그랬어?”
“정말이라니까. 나도 두리랜드에 정기적으로 후원금 보내려고. 한 달에 한 10만 원 보낼까?”
10만 원씩이나? 역시 통이 크다.
하긴 사업을 그 정도로 크게 한다면 한 달에 10만 원 정도는 전혀 부담되는 액수가 아니겠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거지.”
“아무튼 오빠 오늘 최고였어.”
역시 칭찬은 좋은 것이다. 듣고 또 들어도 기분이 괜찮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장소를 옮겼다. 그런데 휴대폰이 울렸다.
강은영이었다.
- 축해드려요, 대리님. 그리고 두리랜드 인터뷰 너무 감동이었어요. 저도 한 달에 1만 원씩이라도 기부할게요.
강은영도? 인터뷰가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네. 오랫동안 머리 짜내며 준비한 보람이 있다.
그런데 강은영뿐만이 아니었다. 강철중도 전화를 걸어오고 권진아도 전화를 걸어오는데 모두가 같은 이야기였다.
- 저도 기부할게요.
그 이후에도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고등학교 동창, 군대 동기, 대학교 동창 가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 두리랜드 인터뷰 정말 좋았어! 나도 여유만 되면 기부하고 싶더라.
서유림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와! 이거 대박인걸!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다니! 이 정도 반응이라면 정령소환력이 제법 올랐을 것 같은데! 혹시 100% 넘긴 것 아냐? 그럼 대박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