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81화 (81/196)

# 81

먼저 흥분하는 놈이 지는 법이다. (3)

명진식품 창고.

“훅. 훅.”

서유림이 스텝을 밟으면서 연신 발차기를 시도했다. 발목에는 각각 1kg짜리 무게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 큰 무게는 아니지만, 효과는 제법 쏠쏠했다.

두 손에도 30kg짜리 덤벨을 각각 들고 발차기와 함께 펀치도 뻗었다.

이렇게 운동하다 보니 체력이 금방 소진되었다. 역시 펀치보다는 발차기의 체력소모가 훨씬 컸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구매팀 권진아였다.

[유진그룹 한상민 실장님 호출이랍니다. 지금 바로 와 달래요.]

‘한상민’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서미연의 남자친구이자 현직 경찰인 김한수에게 테러를 지시한 놈.

감히 내 동생 남자친구의 손뼈를 으스러뜨려?

그래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복수할 기회.

‘드디어 기회가 왔군!’

하지만 흥분하면 안 된다. 완벽한 기회가 아니면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

대신 뽑아먹을 건 확실하게 뽑아먹자.

요즘 서유림에게는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좀처럼 오르지 않는 정령소환력이었다.

정령소환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놓았다. 한상민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한상민이 서유림을 부르는 이유는 빤하다. 드디어 내기 계약서를 작성하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오늘 대형계약도 체결하고, 덤으로 정령소환력도 함께 올릴 계기를 만들어야겠다.

서유림의 뜻대로만 된다면 정령소환력을 큰 폭으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상민은 얼마짜리 계약을 생각하고 있을까? 1억 원 수준으로 다운 시키는 것은 아니겠지?

서유림이 유진그룹 본사를 향해 출발했다. 뛰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지만, 지하철을 이용하면 금방이었다.

유진그룹 본사.

한상민은 유진그룹의 감찰실장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보다 분위기가 더욱 무거운 느낌이다.

한상민도 한상민이지만 감찰실 직원들도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낯선 직원만 보면 ‘감찰실에서는 눈깔아 새끼야.’ 하는 갑질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물론 내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구시죠? 무슨 일로 왔습니까?”

그래도 존댓말은 써주네. 눈깔에 들어간 힘도 좀 빼주면 안 되겠니?

“명진식품 구매팀 서유림입니다. 한상민 실장님 호출 받고 왔습니다.”

적어도 유진그룹 내에서는 내 이름이 유명세를 탄 모양이다. 감찰실 직원들도 서유림이라는 이름 석 자에 표정이 확 달라진다.

“아, 명진식품 서유림씨.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친절하기도 해라. 처음부터 그렇게 부드럽고 친절했으면 얼마나 좋아?

그뿐이 아니다. 주먹으로나마 조용히 파이팅까지 외쳐준다.

감찰실장실로 들어갔다.

한상민 옆에 중년인 두 명이 함께 앉아있다. 한상민은 언제나처럼 소파에 몸을 묻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저 자세가 한상민의 트레이드마크인 모양이다.

“거기 앉아.”

아! 저놈의 턱짓. 진짜 케이지에서 한번 만나고 싶다. 그러면 턱을 바르게 사용하는 예절을 가르쳐줄 수 있을 텐데.

여동생 남자친구 일까지 겹치니 정말 미워 죽겠다. 계약이고 지랄이고 그냥 달라붙어서 참교육 한번 시켜주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하겠지. 좀 더 크고 짜릿한 복수를 위해서.

그나저나 지난번 일은 어찌 넘어갔을까?

서유림이 한상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한상민이 100원짜리 동전이 행운의 동전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서유림에게 놀림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한상민은 전혀 내색이 없었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한상민 같은 놈이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저렇게 조용히 있을 놈이 아니니까.

“전에 나와 내기하자고 했었지? 토너먼트 우승.”

“그랬습니다.”

한상민이 이번에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턱짓으로 지시했다.

“그거 저놈한테 줘.”

맞은편 사람이 서류 한 장을 서유림에게 내밀었다.

예상대로 계약서였다.

내용이 무척 교묘했다. 내기 계약이 아닌 매니지먼트 계약서였다.

서유림이 이번 토너먼트 무제한급에서 우승할 경우 MAN FC가 한국 격투기 발전을 위해서 서유림에게 00원을 훈련비를 일시불로 지급한다.

하지만 서유림이 우승하지 못할 경우 다른 선수들에게 00원의 훈련비를 지급하되, 그 비용을 서유림이 전액 보전한다는 내용이었다.

의도는 빤했다. 내기 계약 자체가 민법상 도박에 해당하여 불법이기 때문에 편법을 쓴 것이다.

서유림은 계약서를 보고 또 보았다. 혹시 함정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함정은 없었다. 그리 긴 내용이 아니라서 서유림이 놓칠만한 부분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좋습니다. 그런데 액수는 전부 빈칸으로 되어있네요.”

한상민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10억 원은 무리였다. 서유림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5억 원이 적정선인데, 그렇다고 처음부터 5억 원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그랬다. 그러면 자칫 흥정 과정에서 액수가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빈칸으로 만들어두고 흥정을 벌이려 한 것이다.

지금부터가 싸움인 것이다.

5억 원짜리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은 조금 세게 불러야 할 것이다.

“금액은 서로 협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때 네가 이야기했던 액수가 10억 이었던가? 그 액수로 하지.”

한상민이 툭 던지듯 물었다. 입가에 살짝 걸린 웃음이 마치 서유림을 비웃는 듯했다. ‘어디 덤벼봐! 쫄려서 못 덤비겠지?’ 하고 말하는 것처럼.

10억 원을 부르면 서유림이 깜짝 놀라서 발발 길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서유림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흥분으로 눈이 동그래지고, 입도 떡 벌어지는 것이 마치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표정만이 아니었다. 낚시꾼이 오랜 기다림 끝에 챔질을 하듯 한상민의 말을 재빨리 낚아챘다.

“좋습니다. 10억 원으로 하시죠. 그럼 여기에 액수 적어 넣으면 되는 건가요?”

그러자 한상민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이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서유림에게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상민이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서유림이 무제한급에서 우승할 확률은 0%에 가까우니까. 서유림이 제아무리 잠재력이 폭발한다고 해도 한때 헤비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밀코 그로캅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아니 결승전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8강에서 맞붙을 오이르꺼러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무제한급과 미들급은 차원이 다른 체급이니까.

한상민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 손으로 직접 적어 넣어.”

서유림이 망설임 없이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두 장의 계약서에 각각 ‘10억’이라는 숫자를 적어 넣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명의 사내가 나머지 일을 처리했다. 한상민의 법무대리인들이었다.

한상민이 홀가분하다는 듯 손을 훌훌 털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 서유림이는 그만 가봐.”

이렇게 가면 섭섭하지.

체력도 흡수하고 싶긴 하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이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남았다.

정령소환력을 높이는 일이지.

한상민이 도와주면 효과가 배가 될 수 있는 계획이 있다.

“그전에 하나 더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MAN FC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한상민이 거드름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뭔데?”

“저는 이번에 치러질 토너먼트에서 제가 받는 대전료의 30%를 좋은 곳에 기부할까 합니다.”

한상민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다지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깟 대전료가 얼마나 한다고. 서유림의 경우 아직은 워낙 랭킹이 낮아서 경기당 50만 원 수준밖에 안 되었다.

그것의 30%라고 해봤자 15만 원밖에 더하겠는가?

게다가 그게 MAN FC 흥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서유림은 이미지가 좋아지겠지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MAN FC도 동참해달라는 겁니다. 제가 이길 경우 경기당 100만 원을 기부하는 겁니다.”

“너는 끽해야 15만 원밖에 안 내는데 나보고는 100만 원을 내라고? 하하, 웃기는 계산법이네.”

한상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국내 10대 지벌그룹의 총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놈이 이렇게 계산이 어두워서야.

차라리 내가 유진그룹 회장이 되는 게 훨씬 낫겠다.

어쩌겠는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칼자루를 쥔 놈은 한상민인데.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수밖에.

핵심만 말해도 대충은 알아듣겠지?

“MAN FC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그 정도는 투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만 포장하면 공중파 9시 뉴스에도 내보낼 수 있을 텐데요. 그러면 한유진 회장님께서도······.”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상민이 심청이 목소리 들은 심봉사처럼 눈을 번쩍 떴기 때문이다.

“계속해봐.”

뭘 계속해보라는 거야? 이 정도면 답 나왔을 텐데.

서유림이 조금 더 부연설명 해주었다.

“저를 스타로 만드는 방법도 됩니다. MAN FC는 간판스타가 필요합니다. 제가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MAN FC가 흥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제야 한상민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때리며 좋아했다.

“이야, 이 새끼 봐라. 이거이거······ 물건이네. 대가리가 제법 잘 돌아가. 하하.”

말 하는 싸가지 하고는.

언제쯤 저 주둥이를 상대로 제대로 된 참교육을 시켜줄 수 있을까?

아니지. 주둥이만으로 끝내면 섭섭하지. 내 동생 남자친구의 손뼈 으스러뜨린 건 어쩌라고?

그렇다면 다리몽둥이 정도는 분질러야 계산이 맞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퍽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슬립다운 마법!’

마물을 사냥할 때 아리아나가 이따금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슬립다운(slip down) 마법을 사용하면 바닥이 갑자기 빙판처럼 변해서 마물들이 정신없이 미끄러지며 넘어지곤 했다.

그 마법만 익힌다면 아주 손쉽게 만족할만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등산 갔을 때 사용하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런데 이놈의 마력이 당최 올라야 말이지. 슬립다운 마법을 익히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 전까지는 체력흡수에 만족하자. 오늘도 그냥 갈 수는 없지.

서유림이 슬쩍 손을 뻗었다.

“원래 계약 체결하면 악수 한 번씩 하지 않나요? 실장님 손 한번 잡아보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이놈 진짜 정이 안 가네. 사람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해? 그냥 편하게 잡아주면 덧나나?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격려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요.”

“됐어. 그만 가보라는 소리 못 들었어?”

한상민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방법은 안 될 것 같다. 나중에 슬립다운 마법 익히면 그때 본때를 보여주는 수밖에.

“그럼 가보겠습니다.”

한상민 실장은 다른 건 몰라도 추진력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서유림과 계약을 마치자마자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각 언론사에 뿌렸다.

서유림과 MAN FC의 대전료 기부행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곧바로 인터넷, 신문, TV를 통해서 방송되었다. 액션TV는 물론이고 공중파 3사에도 간간히 튀어나왔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토너먼트 참가신청 마지막 날에 엄청난 이름값을 지닌 선수가 참가신청서를 낸 것이다.

한때 UFC 챔피언가지 지낸 적이 있던 댄스 핸더슨이었다. 나이가 50살이 넘었지만, 지금도 엄청난 펀치력을 보이며 UFC에서 실력자들을 종종 꺾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서유림 기사가 오히려 묻혀버리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서유림의 가족은 뜨겁게 반응해주었다.

남자친구 때문에 한동안 슬픔을 지우지 못했던 서미연도 애써 웃어 보이며 서유림을 응원해주었다.

“잘했어, 오빠.”

그중에서도 막내여동생 서미진이 가장 관심이 많았다. 당장 돈과 관련된 일이니까.

“오빠 돈 많이 벌었나보네. 기부까지 하고. 그럴 돈 있으면 나한테 좀 기부해주지. 나도 돈 필요한데.”

요걸 그냥 콕! 쥐어박을까보다. 좋은 일 하면 ‘훌륭해.’ 하며 격려를 해줘야지. 오라버니의 깊은 뜻도 모르면서.

“그래봤자 경기당 10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밖에 안 돼.”

“에계계. 그럼 대전료가 50만 원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렇게 피 튀기며 싸우는데도?”

그걸 인제 알았냐? 일부 스타 선수들 아니면 100만 원 받기 힘든 게 우리나라 격투기 현실이란다.

행복한 줄 알아, 이것아.

“그래도 스폰서는 챙길 수 있잖아.”

“이번에도 스폰서 모으는 건 나한테 맡겨줄 거지? 수고비는 10%.”

와! 10%는 너무 센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처음 선례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였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동생인데 값을 깎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래. 너한테 전적으로 일임하지. 이번에도 우승을 조건으로 해서 최대한 긁어모아봐.”

“오케이! 아예 이참에 오빠 매니저로 나서볼까? 호호호.”

웃기고 있네. 누가 시켜준대?

그런데 서미진 저것이 은근슬쩍 집요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왠지 불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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