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80화 (80/196)

# 80

먼저 흥분하는 놈이 지는 법이다. (2)

도상국이 서유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서 서유림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내가 조언 하나 더 할 테니까 들어볼래?”

“예.”

“싸움은 먼저 흥분하면 지는 거다. 너는 지금 흥분해있어. 그 상태로 싸우면 절대 못 이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저도 그러고 싶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먼저 힘을 키워라. 내가 힘을 키울 방법을 가르쳐주마.”

“어떻게요?”

며칠 후.

서유림이 채희라가 운영하는 민들레 토탈 헬스케어로 들어갔다. 도상국과 강종범도 함께였다.

도상국과 강종범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들처럼 연신 사방을 둘러보았다. 며칠 전에 서유림이 민들레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특히 도상국은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러고 보니 꼴이 좀 우습긴 하네.

“어머, 오빠! 안녕하셨어요?”

민희라는 아가씨였다.

텐프로라는 사실을 알고 보는데도 여전히 남자라고는 전혀 모를 것만 간츤 청순한 이미지였다.

도상국과 강종범 역시 눈이 휘둥그레 해진 상태였다. 민희 같은 미인과 오빠동생 하며 알고 지내는 서유림이 새롭게 보일 정도였다.

“오랜만이네.”

“사장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고마워.”

곧바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도상국과 강종범의 눈이 다시 커졌다. 민희보다 더 예쁜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장님이라지 않던가?

그런 예쁜 사장님이 서유림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왔어?”

도상국과 강종범은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말했던 사람들이야. 이쪽은 도상국, 이쪽은 강종범 형님.”

“안녕하세요. 채희라에요. 오빠한테 말씀은 들었어요.”

원래는 도상국만 소개시켜주려고 했었다. 강종범이 싸움 기술이 뛰어나긴 하지만, 보디가드 역할을 하기에는 완력이나 순발력 같은 신체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을 지키는 가장이 아니던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소개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채희라가 다른 적당한 일을 주기로 했다. 민들레에는 허드렛일 할 사람도 제법 많이 필요하니까. 강종범이 지금 하는 일도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고.

그리고 조만간 복성체육관이 민들레 근처로 확장이전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곳에서 코치 역할도 병행할 것이다.

“저는 유림 오빠를 믿어요. 그리고 유림 오빠가 소개해주신 분도 믿고요. 그래서 지금부터 두 분을 제 가족으로 생각할게요. 그러니 두 분도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뭐야? 부담스럽게. 그래서 사람은 함부로 소개해주면 안 된다니까.

어쨌건, 저렇게 앉아서 이야기하니 사장님 포스가 느껴진다.

강종범과 도상국이 채희라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채희라도 손으로 앞가슴을 가리며 예의를 갖추었다.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요.”

대충 인사는 마친 것 같군.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할 차례인가?

사실 채희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었다. 도상국과 강종범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밀이란 원래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형님은 상국이랑 건물 구경 좀 하시겠어요?”

채희라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서유림이 말을 꺼내자마자 얼른 종업원을 불러올렸다.

“부르셨어요, 사장님?”

민희라는 아가씨였다.

“두 분, 건물 구경 좀 시켜드려.”

“알겠어요. 가실까요?”

강종범과 도상국이 민희를 따라서 응접실을 나섰다.

그제야 서유림이 준비해온 이야기를 꺼냈다.

“YJY 말이야. 푸르름 때문에 활동하기가 여전히 힘들지?”

“힘들지. 데뷔시킬 방법도 못 찾고 있어.”

“나한테 YJY 방송에서 데뷔시킬 방법이 하나 있는데 혹시 마루 엔터테인먼트에서 관심이 있을까?”

그러자 채희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말? 어떤 방법인데?”

* * *

한상민이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손가락은 연신 이마를 톡톡 때렸다.

한상민의 습관이었다. 뭔가 깊은 고민을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다.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MAN FC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독이 든 성배를 잡은 건 아닌가 모르겠군.’

사실 한상민에 대해서 세간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진그룹 후계구도와 관련한 것이었다.

세간에는 한상민이 한유진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유진그룹의 후계구도는 아직도 경쟁 중이었다. 그것도 치열하게.

한상민의 경쟁자가 무려 네 명이나 되었다.

첫째는 물론 누나인 한수영이다.

한수영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고, 인물도 빼어나서 한때 한유진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그런 한수영이 몰락한 이유는 결혼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범한 7급 공무원과 결혼하면서 완전히 눈 밖에 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50억 원도 안 되는 푼돈으로 혼자 기업을 일으키더니 승승장구하며 어느새 중견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래서인지 한유진이 요즘 한수영의 기업에 관심이 많다는 보고다.

그 점이 가장 큰 불안요소였다.

다음으로 경계되는 인물은 이복동생 한경민이다.

한경민의 가장 큰 단점은 건강이다. 툭하면 아파서 병원에 며칠씩 입원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든 분야에서 한상민을 위협하고 있었다.

친동생 한태민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놈이 욕심만 많아서 계속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도 친형한테.

사실 MAN FC 인수도 한태민이 먼저 제안했었다. 자신이 대표가 되어 아시아 최고의 격투기 단체로 만들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걸 한상민이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실수인 것 같다. 겉에서 볼 때에는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는데, 막상 대표의 입장이 되어서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술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흥행을 선도할만한 스타가 없었다.

권이슬도 사실 조금 약했다. 실력도 좋고 트레시토킹도 잘하지만, 경기스타일이 화끈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명진식품의 한동민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격투기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관심도 열정도 높은 놈이니까.

하지만 한동민도 실망스러웠다. 체육행사 때 불러서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MAN FC를 흥행시킬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저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었다.

“스타가 필요합니다. 격투기 팬을 흥분시킬 스타.”

그런 대답은 초등학생도 하겠다.

그래서 이번 토너먼트가 중요했다. 이번에 엄청난 상금을 건 이유도 그런 스타를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제발 괜찮은 놈이 툭 튀어나와줘야 할 텐데. 휴우, 어렵군!’

잠시 후, 비서가 두툼한 서류철을 가지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대표님.”

“아 그래. 수고했어.”

한상민이 두툼한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서류철 제목에는 ‘MAN FC 토너먼트 대진표’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각 체급당 총 64명의 대진표가 만들어질 것이다.

대진표에는 아직 공란이 많았다. 무명의 선수들은 치열한 예선을 거친 후에 비로소 대진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주요 선수들은 이미 칸을 채우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선수가 미들급 챔피언 권이슬 선수였다.

당연히 예선전은 거치지 않고 곧바로 64강전부터 치를 것이다.

이번에는 무제한급의 대진표를 살펴보았다. 이번 MAN FC 토너먼트 흥행의 열쇠를 주고 있는 체급이었다.

다른 체급과 달리 공란이 그리 많지 않았다. 거구들의 싸움이다 보니 무명의 신인이 낄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진표 안에는 쟁쟁한 이름들이 제법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이름은 한때 씨름판에서 천하장사로 군림했던 최흥만이었다. 키가 220cm가 넘는 최흥만은 한때 일본 입식격투기에서 헤비급 챔피언까지 올랐던 괴물이다.

비록 2년쯤 전부터 한 물 갔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역시 괴력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최근 지독한 훈련으로 전성기 기량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이름은 핵펀치 소유자이자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파이터인 마이티 무어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뛰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부산 탱크로 불리는 최문배도 있었다. 이름값에서 최흥만이나 마이티 무어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한 한방이 있는 선수다.

몽골 출신의 신흥강자 오이르꺼러 역시 눈에 들어왔다. 아직 몇 경기 치르지 않은 20대 초반의 신예이지만,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매력 덕분에 벌써부터 중국에서 제법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선수였다.

지나친 설레발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이번 토너먼트에서 오이르꺼러가 우승이나 준우승을 차지하게 된다면 향후 10년 이상 MAN FC 무제한급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눈에 띄는 이름이 여럿 있었지만, 최종 우승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대회 흥행을 위해서는 중국 선수가 제법 분발을 해줘야 하는데. 이왕이면 오이르꺼러 같은 선수가 우승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겠지.”

“그러면 수많은 중국인 팬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상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MAN FC가 비록 한국에서 만들어진 격투기 대회지만, 흥행을 위해서는 중국의 팬을 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토너먼트 초반 대회는 대부분 중국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만약 중국 선수들이 부진해서 초반에 대거 탈락한다면, 그때는 대회 장소를 한국이나 일본으로 돌리겠지만.

한상민이 대진표를 조금 더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색다른 이름이 들어왔다.

“어! 이게 누구야? 밀코 그로캅? 이 선수 내가 아는 그 그로캅이 맞나?”

“맞습니다. 저도 그 이름 보고 깜짝 놀라서 거듭 확인했습니다.”

“이 선수 UFC와 계약되어있지 않았어?”

“얼마 전에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합니다. MAN FC 토너먼트 출전에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한상민이 손가락을 힘차기 튕겼다.

“됐어. 이번 MAN FC 토너먼트는 무조건 성공이야.”

밀코 그로캅은 한때 일본에서 헤비급 세계최강자로 군림했던 사나이다. 에밀랑코 효두르가 나타나면서 2인자의 자리로 밀려나긴 했지만, 그래도 아시아 격투기 팬,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한국,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선수다.

지금도 그 인기는 식지 않았다. 밀코 그로캅이 출전한다면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진표는 밀코 그로캅 선수에게 맞춰서 짜도록 해. 적당히 강한 상대와 싸우면서도 부상 없이 결승에 진출하도록 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는…… 어떻게 할까요?”

비서가 서유림의 이름을 손가락을 짚었다.

그러자 한상민도 갑자기 입술이 달라붙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동글동글하면서도 납작한 금속성 물건이 만져졌다. 서유림이 행운의 선물이라며 준 것이었다.

처음 이놈을 봤을 때는 살짝 화가 났었다.

서유림이 준 것은 동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손때가 가득 낀 거무튀튀한 100원짜리였다.

갑자기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서유림 같은 놈이 감히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그 정도 배포가 있는 놈이었다면 지난번 체육행사 때 한상민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았겠지. 그거 한 번이면 그때부터는 한상민이라는 든든한 줄을 잡게 될 테니까.

‘그래. 이건 틀림없이 행운의 동전이다.’

그것을 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서유림이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했던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동전을 움켜쥐는 순간 갑자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마치 온몸의 체력이 한꺼번에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하고,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큰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이 한상민의 지론이었다.

체력을 희생했으니 뭔가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

한상민이 100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정말 큰 선물을 주었어. 마음에 들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유림은 보면 볼수록 탐나는 놈이었다. 적당한 트레시토킹으로 격투기 팬의 기대심을 끌어올릴 줄도 알고, 매번 화끈한 경기를 치러서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줄도 아는 놈이다.

게다가 미래가 기대되었다. 만약 지금까지의 승리가 모두 실력이었다면 정말 엄청난 물건이었다. 어쩌면 권이슬을 왕좌에서 끌어내라고 한국 격투기 미들급의 황금시대를 열 수도 있는 놈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괘씸한 놈이기도 했다. 감히 허락도 없이 무제한급 토너먼트에 도전하다니.

집안에서 키우는 애완견도 잘못했을 때는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한다. 그래야 제법 힘을 얻었을 때도 주인을 물지 않으니까.

‘이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흥행은 시키되 적당한 시점에서 밟아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한상민에게 더욱 의지하고 매달릴 테니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상민이 결론을 내렸다.

“8강까지만 진출시켜. 미들급 선수가 무제한급에서 8강까지만 올라도 대단한 거니까.”

“그럼 8강에서 누구와 대결시키는 게 좋을까요?”

“새내기는 새내기끼리 붙이는 게 좋겠지. 오이르꺼러와 붙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적어도 무제한급의 대진표는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진 듯하다. 물론 선수의 몸 상태를 점검한 후에 약간의 변화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제 남은 문제는 서유림과의 내기 문제다. 그때 말로만 내기 문제를 거론하고 구체적으로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다.

서유림이 무제한급 토너먼트에서 우승할 확률은 0%다. 천운이 도와서 8강전에서 오이르꺼러를 넘는다고 해도, 그 뒤에는 최흥만과 마이티 무어, 거기에 밀코 그로캅까지 버티고 있다.

즉 내기를 하는 순간 서유림은 한상민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었다.

서유림의 나이 30살. 최소한 5년에서 6년은 굴려먹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40살 넘어서까지 흥행 카드로 써먹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 노예 신분으로 잡아두자면 내기 금액을 크게 잡아야 할 것이다. 5~6년 만에는 절대로 벌 수 없을 정도의 금액.

1억 원? 서유림 같은 하층민에게는 물론 적지 않은 돈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래. 최소한 5억 원은 되어야지. 그놈도 그때 5억 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후훗, 그래서 세치 혀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한상민이 인터폰을 들었다.

“서유림이 오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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