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먼저 흥분하는 놈이 지는 법이다. (1)
서유림은 ‘딱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에 ‘딱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로부터 보복 지시까지 받았었다.
비록 서유림은 거부했지만, 그런다고 그놈이 포기했겠는가? 분명 다른 누군가를 시켜서 계획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설마…… 그 놈은 아니겠지?’
서미연의 말이 이어졌다. 한번 말문이 열리자 막혔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오빠가 며칠 전에 고급 승용차를 상대로 신호위반 딱지를 끊은 적이 있거든. 그때 운전자하고 엄청나게 싸웠대. 두고 보자는 식의 보복성 멘트까지 들었고.”
이런! 신호위반까지 동일하다. 불안감이 자꾸만 커지는 느낌이다.
“그놈이 시킨 게 틀림없어.”
“그놈이…… 누군데?”
“내가 아무리 물어도 오빠가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안 해줘.”
서미연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서미연의 남자친구를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다.
이건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을 상대로 계획폭행을 한 거잖아.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당했다고 해도 듣는 순간 열이 뻗칠 이야기인데, 여동생 서미연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내가 네 남자친구 좀 만나봐야겠다.”
서미연이 문득 불안한 눈빛을 했다.
“만나서 어쩌려고?”
“최소한 누가 그랬는지 정도는 알아봐야지.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설 것 아냐?”
“괜히 나서지 마. 오빠가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해. 그냥 모른 척해.”
“그건 내가 판단한다니까. 네 남자친구 지금 어디 있냐?”
다음날 오후.
서유림은 퇴근하자마자 한강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여동생 서미연이 같이 오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혼자서 왔다. 서미연이 함께 있다고 해서 도움 될 일도 없고, 오히려 서미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대신 전화 통화나 해놓으라고 부탁했다.
507호실의 김한수라고 했는데.
아, 저 친구로구나!
서미연보다 한 살 많다고 했다. 그러면 서유림보다는 두 살 어리다. 물론 겉모습은 서유림이 훨씬 어려보이지만.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옆에 계셨다. 어머니는 김한수를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김한수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괜찮다는 식의 미소를 가볍게 지어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유림이라고 합니다.”
서유림이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김한수가 깜짝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황해하고 그래? 내가 무슨 저승사자라도 돼?
저것 봐! 어머니께서 벌써 불안한 표정을 하시잖아.
다행히 김한수가 어머니께 빠르게 설명을 드렸다.
“여자 친구 오빠 되시는 분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이리 앉으세요. 아휴, 이런 건 안 사 오셔도 되는데.”
어머니께서 음료수를 받아서 챙기셨다.
간이의자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냥 덕담이나 안부인사 정도였다.
어머니 앞에서 본론을 꺼내놓을 수는 없었다. 아마 어머니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계실 테니까.
“괜찮으시면 잠깐 밖으로 나가서 바람이나 쐴까요?”
김한수도 그러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서유림이 제안하자 반색하듯 얼른 병상에서 일어섰다.
“그러실까요?”
김한수의 오른손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다. 서미연을 통해서 수술이 잘 이루어졌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그런데 손만 다친 것이 아니었다. 얼굴도 군데군데 상처가 있었다.
한적한 곳에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았다.
여기까지 와서 말을 빙빙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유림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놓았다.
“혹시 그때 신호위반 딱지 끊었다는 사람이 유진그룹의 한상민 실장 아니었나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김한수 입장에서는 기습적인 돌발질문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한수가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역시 그랬군.
오늘 들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들은 셈이다. 어차피 오늘 김한수를 찾아온 것은 그놈이 한상민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도 듣고 싶다. 한상민이 얼마만큼 못된 놈인지 판단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상황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냥 모른 체해주십시오.”
김한수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이런저런 유도심문 끝에 대충의 상황은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한상민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아니, 정확히 반대였다. 경찰이 돈을 요구한 게 아니라 한상민이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놈을 어떻게 혼내주지?’
김한수가 아니라 서미연을 위해서 따끔하게 복수해주고 싶었다.
물론 김한수 앞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경찰 앞에서 ‘나 범죄 저지르겠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몇 가지 생각나는 방법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일은 아니다. 지금 상태에서 한상민과 트러블이 생기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오히려 서유림일 테니까.
한상민은 ‘서유림은 내 사람’이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복수는 복수대로 하면서 실컷 이용해먹지.
무엇보다도 그런 식으로 안심을 시켜야 한상민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혼내줄 기회도 쉽게 찾아올 테니까.
그래. 조급할 것 없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자. 대신 확실하게.
싸움은 먼저 흥분하는 놈이 지는 법이니까.
병원을 나온 서유림은 곧바로 강성체육관으로 향했다.
강종범이 먼저 와서 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상국은 보이지 않았다.
“상국이는 어디 갔나요?”
서유림의 질문에 강종범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난 유림이와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하루 쉬겠다며 일도 안 나왔어.”
느낌이 이상했다. 갑자기 어디로 샌 거지?
오늘 만나면 채희라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는데.
“곧 오겠죠 뭐.”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연신 출입문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록 도상국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늦는데 전화도 없다니. 분명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서유림이 도상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고 나서야 도상국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데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어딘가 무척 불편한 느낌이 가득했다.
도상국이 전화를 받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 죄송합니다, 형님. 병원에 막 입원해서…… 연락도 못 드렸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병원에 입원? 갑자기 왜?”
서유림의 입에서 ‘병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강종범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쯧쯧…… 기어이 그렇게 됐네. 어째 좀 불안하다 싶었는데.”
또 나만 모르는 사연 같다.
사실 짐작은 갔다. 참사랑 보육원을 다녀오면서 도상국의 사연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상국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강종범과 함께 얼른 병원으로 향했다.
도상국은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살갗이 터지거나 하는 상처는 제법 많았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종범이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새끼들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또 둘만 대화하네. 이제 나도 좀 끼어들자.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나는 알면 안 되는 이야기야?”
“그건 아니고요…….”
도상국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예전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약 7년쯤 전, 그러니까 도상국이 보육원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도상국은 졸업 이후에도 보육원을 자주 찾아갔다.
보육원을 찾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김미연이라는 소녀 때문이었다.
김미연은 도상국보다 한 살 어린 여고생인데 오래 전부터 사랑하던 사이였다.
“정말 예뻤어요.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실 정도로. 주변에 남자들이 워낙 많이 꼬여서 무척 힘들었죠.”
하지만 성격은 날라리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생활이 문란해졌고, 심지어 성인을 상대로 성매매까지 했다.
그날도 김미연은 외출을 위해서 한껏 치장한 상태였다. 도상국이 만류했지만, 결국 옥희경이라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육원을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김미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여기 폐교인데…… 살려줘. 꺄악!
김미연의 목소리는 그렇게 짧은 한 마디만 남기고 끊어졌다.
도상국은 앞뒤 가리지 않았다. 당장 폐교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폐교에서 도상국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김미연의 싸늘한 시신뿐이었다. 이미 처참한 몰골로 죽어있었다.
게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경찰이 들이닥쳤다.
도상국은 억울함을 호소해보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알리바이를 입증해주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뭔가에 쫓기듯 서둘러서 사건을 마무리했고, 검찰과 법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상국은 그렇게 여고생 강간살인범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서유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비슷한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늘 그렇게 바빴던 거구나. 억울한 누명이라도 벗으려고.”
“아뇨. 그깟 누명 벗는다고 미연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그럼 왜……?”
“미연이 복수해줘야죠. 그 새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서 죽여 버릴 겁니다.”
문득 도상국이 전에 들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주먹이 운다.’ 본선 경기를 앞두고 대기실에서 나눈 말이었다.
[난 아직도 죽여야 할 놈이 더 남아있거든. 그러니까 나하고 친하게 지내서 좋을 건 없지.]
단순히 협박용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했던 말이다.
한편으로는 도상국이 왜 그렇게 지난 이야기 들려주기를 꺼려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결국은 그것도 범죄 아닌가? 복수는 결국 폭력으로 연결될 테니까. 살인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
그런 것을 떠들고 다닐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 하겠지.
“그래서…… 찾은 거냐?”
이번에는 강종범이 물었다.
도상국이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아뇨. 아직 꼬리도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옥희경 찾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니까 그놈이 먼저 눈치를 챈 것 같아요.”
옥희경은 사건 당일 김미연을 전화로 불러낸 친구였다. 옥희경이라면 그날 사건의 전말을 알 것이라는 게 도상국의 추측이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그만둬라. 경찰을 움직였던 것도 그렇고, 이번에 널 테러한 것도 그렇고. 내 생각에는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상관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죠, 뭐. 전 목숨 걸었습니다.”
도상국의 목소리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누군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살의라고 해야 할까?
어쨌건 여고생 강간살인범이라는 꼬리표는 누명인 게 확실한 듯했다.
인생이 참…… 불쌍하게 꼬였군.
문득 여동생 서미연의 남자친구 김한수가 생각났다. 직업이 경찰이지 않은가?
김한수에게 부탁하면 옥희경이라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김한수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일이다.
그리고 복수도 엄연한 범죄다. 자칫 살인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데, 그런 범죄를 도와주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해서 찾아내면 또 어쩔 건데?
상황을 보아하니 상대는 힘 있는 사람이었다. 도상국이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딪쳐봤자 도상국의 인생만 망칠 것이다.
도상국을 그렇게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 도상국도 아니고.
이럴 때는 고삐를 당기는 것보다는 함께 걸어가 주는 게 나을 것이다.
“상국아. 그 복수, 내가 도와줄까?”
서유림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도상국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위험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위험한 일이겠지.
하지만 돕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무려 ‘정령의 힘’씩이나 가진 내가 아닌가? 조금 위험하고 힘들어 보인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하고 눈을 감아버려서야 하겠는가?
게다가 도상국은 이미 서유림의 품안에 들어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친구들보다도 훨씬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 옆의 사람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놓고 나중에 인생을 뒤돌아보며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웠노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가슴은 뜨겁게 하되 머리는 차갑게.
서유림이 도상국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상국아.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해. 그래야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냐?”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능력이 되는 만큼만 도와줄게. 내가 사실 네가 아는 것보다는 능력이 좀 더 있는 놈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