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민들레와 사명감 (2)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채희라의 스폰서는 대체 정체가 뭘까?
“그런데 푸르름이 워낙 강하게 압력을 넣어서 활동이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함께 고민해주고 있는 거야. 아! 이건 오빠만 알고 있어야 해. 우리 스폰서가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일이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도 알고 있는 일이 비밀이라니.
“이미 푸르름도 알고 있던데?”
“정말?”
“며칠 전에 푸르름 사무실에 들렀었거든. 그때 YJY 보고서를 슬쩍 봤어. 혹시 스폰서가 차렸다는 기획사가 마루 엔터테인먼트 아냐?”
“어머! 정말인가 보네. 어떻게 알았지?”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스폰서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역시 한상민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한상민은 무려 10대 재벌그룹의 힘을 등에 업고 있는 사람이니까.
“잠깐만. 지금 스폰서한테 알려줘야겠다.”
채희라가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나름대로 고급 정보를 준 것 같군.
문자 보내기를 마친 채희라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박스티가 위로 살짝 들리면서 흰 핫팬츠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이상하게 저런 모습을 보면 달려가서 확 안아주고 싶단 말이야.
“요새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조금 피곤하네. 우리 오늘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여기에서 놀자.”
“좋지.”
뭐 하고 노느냐는 식으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채희라가 벌써부터 팔로 목을 감아왔다.
망설일 필요 있나? 어차피 이러려고 만난 건데.
와인 잔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놀이(?)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고, 어느새 함께 침대를 뒹굴었다.
비슷한 시각.
피아노라는 이름의 고급 유흥주점에 여섯 사람이 모여 앉아있었다.
유흥주점 업주들의 모임인 69회 회원들이었다.
업주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다들 화난 표정으로 한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흥주점 피아노에서 일하던 텐프로 아가씨였다. 옷은 찢기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상태였다. 그 몰골이 조금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아노의 점주 오윤진이 아가씨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아가씨의 고개가 강제적으로 번쩍 들렸다.
얼굴에도 상처가 제법 많았다.
“네년이 감히 나를 배신해?”
“돈 다 갚았잖아요.”
“다 갚기는 XX년아. 이자는 생각 안 해?”
“이자도 다 갚았잖아요.”
“아직 1천만 원 남았어, X년아.”
“열심히 일해서 갚을게요. 한 달이면 갚을 수 있어요.”
“네년이 무슨 수로. 어디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는 거냐?”
“민들레에서 일하고 있어요. 약속할게요. 한 달 안에 이자까지 해서 갚을게요.”
“시끄러 X년아. 나랑 계약했으면 내 가게에서 일해야지, 왜 민들레에서 일해? 너 같은 년을 다루는 법을 알지.”
오윤진이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아가씨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싫어요. 제발 그것만은.”
하지만 오윤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점주가 아가씨를 붙잡은 사이 주사바늘을 팔뚝에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잠시 후, 아가씨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술이 잔뜩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오윤진이 인터폰을 눌렀다.
“이년 끌어내.”
건장한 청년 둘이 재빨리 들어와서 아가씨를 데리고 나갔다.
그제야 오윤진이 소파에 앉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나이 많은 점주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저 년도 민들레로 갔었군. 큰일인걸. 이러다가 망하겠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민들레에 빼앗긴 단골이 벌써 몇인지 셀 수도 없어.”
“그년이 우리와 나눠먹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아도 제가 사람을 보내봤습니다. 그런데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어디 처박혀있는지 찾기도 힘들고. 그래서 말만 전했는데, 그런 얘기는 씨도 안 먹히더군요.”
“젠장, 망할 년!”
업주들이 분해 죽겠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쯤 되면 그분께서 나서줘야 하시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그분께 매달 상납하는 돈이 얼마인데.”
“그분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야. 채희라 그년이 잡은 스폰서가 만만찮은 사람이잖아.”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업주가 자중하자는 듯 분위기를 눌렀다. 이곳에서 모인 사람 중 가장 연장자였다.
하지만 40대 초반의 젊은 사장은 역시 혈기왕성했다. 참고 지켜보는 것보다는 빠르게 행동하는 걸 선호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봐야 근본도 없는 창녀 아닙니까? 막말로 스폰서가 그년에게 매달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년이 사라지면 다른 운영자를 찾겠죠. 그때 우리 중 누군가가 나서면 되는 겁니다. 아니면 적당히 말 잘 듣는 년을 하나 밀어 넣든가요.”
“흐음. 내가 보기엔 정섭이 생각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누가 스폰서를 물려받건 민들레의 손님을 여러 업소에 골고루 뿌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냐?”
“바로 그겁니다. 일이 그런 식으로 풀리면 그년의 스폰서도 손해 볼 것 없으니 조용히 넘어갈 테고요.”
40대 젊은 사장이 의욕을 보였다.
그러자 가장 연장자인 업주가 결심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그분께 말씀을 드려보지. 만약 그분께서 의견을 물어오면 다들 입을 잘 맞춰줘야 하네.”
사람들의 눈빛이 갑자기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입가에도 가벼운 웃음이 지어졌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큰사장님께서 나서주시기만 한다면야 뒤는 저희가 든든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 * *
채희라가 서유림의 가슴팍을 손가락 끝으로 간질이듯 만졌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에 맞지 않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 오빠.”
“뭐가?”
“사실 나 만나는 거 조금 위험할 수 있어.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말 못했어.”
얼마 전에 모자며 선글라스며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다닐 때부터 조금 예상은 했었다. 쫓기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그 이유는 지금도 전혀 짐작이 안 간다.
“내가 가게를 좀 유별나게 냈거든. 건물 올라오면서 사람들 못 봤어?”
“봤지.”
“느낌이 어땠어?”
어땠긴. 유별났지. 대한민국에서 예쁜 아가씨들만 모아놓은 느낌이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가씨들의 정체 말이다.
어쩌면 손님이 아닐 수도 있었다.
서유림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설마 그 아가씨들이······.”
“맞아. 대부분 다 텐프로들이야. 남자건 여자건.”
그랬구나! 그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서유림을 옥탑방까지 안내해준 ‘민희’라는 아가씨도 텐프로였던 모양이구나.
그제야 ‘채희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왜 그렇게 깜짝 놀랐는지 알 것 같다. 사장님 손님을 빼앗겠다고 추파를 던진 꼴이 되었잖아.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텐프로들이 왜 술집이 아닌 스포츠센터에 몰려있는 거지?”
“여기가 부킹장소니까.”
채희라가 자신이 창안해낸 독특한 부킹 방법을 설명했다.
듣고 보니 간단했다. 텐프로들이 이곳에서 몸매관리하며 시간을 보내면 돈 많은 회원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음에 드는 텐프로를 찍고 부킹을 시도한다.
물론 부킹에는 흥정이 오가겠지. 몇 시간에 얼마, 잠자리에 얼마, 하는 식으로.
“그럼 곳곳에 카메라가 많겠네.”
“운동기구마다 달려있고, 천정이나 벽에도 곳곳에 숨어있어.”
몰래카메라는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온 텐프로들 모두 그런 내용을 듣고 연회비 1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내로 들어온 거니까.
물론 대부분은 민들레가 회비를 빌려주는 식이다.
그렇게 흥정이 성사되면 약속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듣고 보니 독특하긴 했다. 법적인 부분이야 채희라가 알아서 할 테니 내가 따질 부분이 아니고.
“근데 뭐가 문제야?”
“서울에서 잘나간다는 텐프로들이 계속 여기로 몰려들고 있거든. 그럼 다른 유흥주점들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지.”
그거야 당연한 시장경제논리 아닌가?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는 거고, 지면 도태되는 거고.
물론 이쪽 생리는 좀 다를 수 있겠지. 유흥주점 하면 공식처럼 연결되는 단어가 ‘깡패’, ‘폭력’ 같은 거니까.
“그래서 자꾸 압력이 들어와. 내가 밖에서 조심하는 것도 그래서고. 오빠한테 조심시키는 것도 그래서고.”
순간 서유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물론 시시비비를 따져보긴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완력으로 채희라를 위협한다면 그냥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압력이 들어오는데?”
“독점하지 말라는 거지 뭐. 계속 그러면 실력행사 하겠다고.”
“아직 실력행사 당한 적은 없고.”
서유림이 꼬치꼬치 캐묻자 채희라가 밝게 웃었다.
“왜? 오빠가 나 지켜주려고?”
“그냥 있을 수야 없지. 상황이 심각해?”
채희라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심각하진 않아. 오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한다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회사 그만두고 나한테 오라니까. 오빠처럼 믿을만한 보디가드 한명 있으면 나야 좋지.”
보디가드라.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배복성 관장님께 부탁해보지 그래? 그분이라면 보디가드 해줄만한 사람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삼촌이 걱정할까봐. 아직 그렇게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자꾸 삼촌이라고 그러네. 게다가 걱정할까봐 이야기를 안 했다고?
“관장님하고는 어떤 사이인데?”
이런.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대답하기 곤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채희라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엄마 좋아하던 이웃집 아저씨.”
채희라 어머니는 조금 이른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워낙 동안인데다가 외모도 빼어나서 주변에 탐내는 사람이 많았다.
배복성도 마찬가지였다. 세 살이나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오랜 시간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결국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때 엄마는 이미 암 말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채희라도 그때까지는 배복성을 싫어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 앞에서 배복성의 진실 된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배복성을 또 다른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아빠라고 부를 수는 없어서 삼촌이라고 불렀다.
배복성 역시 채희라를 딸처럼 여겼다. 물론 집도 따로 살고,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은 부녀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군.”
이야기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다면 채희라의 손님 정도로만 생각했었을 테니까.
그보다 큰 오해도 없었겠지.
‘그럼 적당한 사람이 없나?’
문득 도상국이 생각났다. 도상국 정도의 실력이라면 채희라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도상국 역시 막노동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도상국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까.
“믿을만한 보디가드 한명 알아봐줄까?”
“그럴만한 사람이 있어?”
“알아봐야지. 대신 월급은 잘 챙겨줘야 해.”
“당연하지. 내가 돈 걱정하는 사람으로 보여? 고마워 오빠.”
고맙긴.
그보다는 채희라가 참 힘들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깟 돈이 뭐라고.
“그런데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이 일을 할 필요 있나? 너 정도라면 이렇게까지 안 해도 충분히 잘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유림의 말에 채희라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돈 때문에 이거 한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변종된 성매매 알선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일을 무슨 역사적 사명감이라도 갖고 한다는 거야?
“나 이거 사명감 가지고 하는 거야.”
헐! 그 농담 진담이야?
어쩌지? 난 아직 이상한 궤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채희라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서유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무슨 사명감인지 물어봐줘.”
별걸 다 시키네. 근데 저 표정을 보니 도저히 안 들어줄 수가 없다.
“무슨 사명감인데?”
“텐프로들의 독립!”
이런! 이제 보니 텐프로들 모아놓고 계라도 만든 모양이이다. 이름이 ‘독립계’인 모양이지? 채희라가 계주고.
이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하나?
“재미없지?”
역시 채희라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솔직히 별로. 우리 만나는 이유가 서로 즐기자는 건데 그런 무거운 얘기 할 필요 있나?”
“하긴, 그래. 사실 이 얘기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오빠도 조심해. 그놈들이 나 만나는 거 알면 오빠한테도 해코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조심은 해야 하겠지.
신체적인 능력이야 그런 놈들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때려눕힐 자신이 있지만, 만약 암습을 걸어온다면 정령의 힘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당해낼 수 없을 테니까.
“말해줘서 고맙다.”
서유림이 집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채희라가 자고 가라며 가볍게 붙잡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건 내키지 않았다.
어쩌면 사명감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일은 웬만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니까.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한껏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예민하게 발달된 서유림의 청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뭐지? 누가 우는 거지?’
서유림이 울음소리의 진원지를 찾아서 움직였다.
종착지는 서미연의 방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미연의 울음을 생각하는 순간 떠오르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남자친구가······?’
그것 말고 서미연이 저렇게 울 이유가 있을까?
동생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화가 머리꼭대기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놈팡이가 감히 우리 미연이를······?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단 서미연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는 게 먼저다. 그런 다음 화를 내도 늦지 않겠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서미연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방문을 닫고 서미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왜 울어?”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내버려둬.”
서미연의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섞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애써 눌러놓은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경찰인가 뭔가 하는 새끼 때문이냐?”
그러자 서미연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거칠게 걷어내며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우리 오빠 나쁘게 말하지 마. 알지도 못하면서.”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지. 네가 뭐라도 얘기를 해줘야 알 것 아냐?
“그럼 왜 우는 건데?”
그때 밖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미연이가 울어?”
어머니를 시작으로 아버지, 막내 동생 서미진까지 모두 들어왔다.
서미진도 언니의 눈물을 보고는 서유림과 똑같은 추측을 한 모양이다.
“언니 혹시 그 놈팡이한테 차인거야?”
“미진이 너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러면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 가족한테도 못할 이야기가 뭐니?”
“그래. 말해보렴. 무슨 일이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미연을 재촉했다.
하지만 서미연은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대신 가족들을 방에서 내쫓기 바빴다.
“엄마아빠는 몰라도 돼. 그냥 다 나가. 혼자 있고 싶단 말이야.”
“언니 정말 너무해. 오늘 오빠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몰라? 축하는 못해줄망정 분위기만 망치고 있어?”
“몰라. 모른다고. 그러니까 다들 나가라고.”
서미연이 짜증을 부렸다.
오늘따라 서미연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족에게 이야기하기 힘든 일인가?
지금 분위기에서는 이야기가 안 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어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제가 미연이하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미진이 너도.”
서유림이 가족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서미연이 서유림도 내쫓으려 했지만, 못들은 체했다. 방문을 잠그고는 서미연 옆에 앉았다.
밖에서 들을 수 없도록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래야 서미연이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내용을 알아야 함께 슬퍼하건 화를 내건 도움을 주건 할 것 아냐?”
“오빤 알아도 못 도와주는 일이야. 그러니까 관심 꺼.”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 일단 얘기나 해봐.”
서미연은 한참을 더 버텼다.
하지만 결국 자초지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 경찰이야. 지금 교통과에 있어서 교통단속 다니고 있고.”
한번 입이 열리자 자질구레한 이야기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스스로도 어딘가에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둘이서 공원에서 데이트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 술 취한 새끼가 와서 시비를 걸더니······.”
결국 싸움으로 이어졌다. 남자친구는 경찰 신분이라서 웬만하면 싸우려 하지 않았지만, 취객이 서미연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취객이 전문 싸움꾼이었다. 남자친구도 운동을 제법 하지만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새끼가 오빠 손을 밟아버렸다. 그래서 손가락이 전부 부러져버렸어.”
서유림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자꾸만 고개가 갸웃해졌다. 왠지 모르게 우발적이 아닌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일 같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그놈이 시킨 게 분명해. 그 새끼가 그랬거든. 자기 딱지 끊은 손,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사람 봐가면서 딱지 끊으라고.”
“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