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민들레와 사명감 (1)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한상민의 비서가 급히 들어왔다.
한상민도 비서를 보자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확인해봤나?”
“예.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마루? 그런 기획사가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신생 기획사입니다. 제가 자료를 조사해왔습니다.”
비서가 얼른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서유림이 흘끔 보니 서류철 제목에 ‘YJY 보고서’라고 적혀있었다.
한상민이 서류철을 들추자 동방신화의 예전 멤버들 사진이 보였다.
한상민이 왜 그렇게 고민하나 싶었는데, 비로소 대충 감이 잡혔다.
동방신화는 아시아에서 최고의 스타로 군림한 5인조 아이돌그룹이다. 경제효과가 연 수천억 원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스타다.
그런데 그중 세 명이 ‘13년 장기계약은 노예계약으로 불법이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걸었다.
법정공방 끝에 결론은 ‘계약 무효.’
두 명은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에 남아서 ‘동방신화’라는 이름으로 계속 활동했지만, 탈퇴한 세 명은 YJ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한상민이 막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바람에 그 어디에서도 활동할 수 없었다.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TV에서 YJY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드디어 YJY가 새로운 기획사를 찾아 들어간 모양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할 디딤돌을 놓았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한상민이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저러고 있는 거다.
YJY도 불쌍하지. 하필이면 한상민 같은 놈에게 걸렸을까? 거대 재벌그룹의 자본력을 동원하고 있으니 맞서 싸우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데 한상민이 문득 서유림을 신경 썼다.
“뭐야? 왜 아직도 안 나가~ 하~암! 씨발, 긴장했나? 왜 이렇게 피곤해?”
그제야 비서도 서유림을 의식했다.
“실장님께서 나가보라 하시잖아.”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줄 아나 보지?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유림이 힘차게 인사하고는 사장실을 나섰다.
지글지글.
불판에서 장어가 노릇노릇 익어간다. 한쪽에서는 다 익은 장어를 야채에 싸먹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먹방의 신은 역시 서미진이었다. 저렇게 먹고도 살이 안 찌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서미진은 서유림이 더 신기한 모양이다. 연신 장어를 입에 집어넣으면서도 눈은 서유림을 바라보고 있다.
“와, 오빠 정말 대단하다. 벌써 경기를 몇 번째 치렀는데 다친 곳 하나 없어?”
“얘 말하는 것 좀 봐. 넌 그럼 오빠가 다쳤으면 좋겠니?”
모녀가 또 시작이다. 저렇게 다투다가도 길거리만 나가면 팔짱을 끼고 누구보다 다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미연이는 오늘도 바쁜 모양이네.”
“언니 요즘 연애하느라 바쁘다니까. 그런 식으로 공부해서 경찰시험에 붙으려나 모르겠어.”
“네가 지금 언니 걱정할 때니? 너나 열심히 해. 적당히 좀 먹고.”
“엄만 만날 나만 가지고 그래.”
모녀 덕분에 밥상머리가 시끌벅적하니 좋다. 어떤 사람은 밥상머리는 절간처럼 조용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난 이렇게 시끌벅적한 게 좋다.
“한잔 따라봐라.”
아버지도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복분자주가 벌써 세 잔째다.
간도 안 좋으시면서.
어머니가 당장에 술잔을 빼앗으신다.
“오늘은 그만 마셔요. 오늘처럼 좋은 날 소금 뿌릴 일 있어요?”
“세 잔까지는 괜찮아.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기분 내?”
서유림도 조금은 걱정이다. 하지만 기분 내고 싶다는 걸 만류하기도 그렇고.
이럴 땐 타협이 필요하지.
“그럼 제가 반잔만 드릴게요.”
“그래, 그래. 너도 한잔 받고.”
외식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이제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채희라였다.
- 오빠. 오늘 같은 날은 축하주 한잔 해야지. 혹시 다른 약속 있어? 없으면 내가 살게.
사실 불러주는 곳이 무척 많았다. 평소에 연락도 없던 놈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참 대단들 하다.
물론 모두 바쁘다는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모임 나가는 게 귀찮은지.
이제 보니 채희라와의 시간을 위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좋지. 어디로 갈까?”
- 오늘 내 가게 구경시켜줄까? 지금 나 가게에 있는데 오빠가 여기로 와주면 안 돼?
가게 구경?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그래봤자 유흥주점일 텐데.
하지만 채희라 말하는 것을 보니 은근히 가게 자랑하고 싶은 듯하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는 근처의 모텔이 될 터. 노래방을 거치건 호프집을 거치건 채희라 가게를 거치건 중간과정이 무슨 상관이랴?
“가게가 어딘데?”
- 신사동.
신사동이면 제법 먼 거리다. 물론 뛰어서 갈 때의 기준으로 말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금방이긴 하다.
“그러지 뭐. 정확한 위치 문자로 보내줘.”
잠시 후 문자가 날아왔다.
[민들레 토탈 헬스센터]
가족을 먼저 택시 태워서 보내드리고 신사동으로 향했다.
무척 찾기가 쉬웠다. 9층짜리 멋들어진 건물이 랜드마크처럼 당당하게 서있었다. 자꾸만 눈이 갈 정도로 세련된 건물이었다.
‘와! 이런 건물 소유한 사람은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서유림이 커다란 건물 근처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민들레 토탈 헬스센터 근처에 왔거든? 여기에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런데 채희라가 엉뚱한 대답을 해왔다.
- 민들레가 내 가게야. 들어와.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이게 채희라의 가게라고?
다시 한 번 민들레 건물을 바라보았다.
총 9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건물에 붙은 간판을 보니 커피숍, 스크린골프장, 헬스장, 마사지숍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유흥주점 같은 곳은 없었다. 그런 가게가 들어설 분위기도 아니었고.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유흥주점 같은 것은 찾기 힘들었다.
“유흥주점 낸다고 하지 않았나?”
- 여긴 상가지역이 아니라서 유흥주점 못 내. 유흥주점은 다른 곳에 있어. 여기도 내 가게야.
“설마 이 건물 전체가 네 가게라는 건 아니겠지?”
- 맞는데.
갑자기 멍한 기분이 들었다.
채희라 요거······ 대체 정체가 뭐야? 텐프로 맞아?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아니면 스폰서를 제대로 물은 건가?
후자겠지. 실소유주는 돈 많은 스폰서고 채희라가 그걸 관리만 하는 거겠지.
- 올라와서 얘기해. 나 옥탑방에 있거든. 엘리베이터 타고 쭉 올라와도 되고, 가게 구경하면서 천천히 올라와도 돼.
“그래. 지금 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Mindle Total Health Center]
입구는 평범했다. 1층도 평범한 커피숍이었다. 다른 커피숍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매장이 무척 넓다는 점이었다.
그 넓은 매장에 손님이 가득했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길부터는 뭔가 조금 특별했다. 예쁘장한 아가씨 한 명이 말끔한 외모의 청년 두 명과 함께 출입자 한 명 한 명을 모두 체크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고,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원증 좀 보여주시······!”
아가씨가 서유림에게 회원증을 요구하다가 움찔했다. 인이어의 소리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2층부터는 회원만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다. 채희라가 통과시키라고 지시라도 내린 모양이지?
그런데 이쯤 되면 내려와서 길안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올라가면 혼(?)을 좀 내줘야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쑥 올라갈까 하다가 갑자기 건물 분위기가 궁금해졌다. 운동하는 셈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은 식당, 3층과 4층은 스크린골프장이었고, 5층과 6층은 헬스장, 7층과 8층은 스파와 마사지숍, 그리고 9층에 다시 커피숍이 있었다.
먼저 헬스장부터 구경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헬스장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특히 손님의 구성이 독특했다.
개업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손님이 많지 않았는데, 그 손님의 90%가량이 여성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젊고 늘씬한 미인들이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마치 유니폼을 맞춰 입은 듯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유니폼이 너무 야했다. 몸에 착 달라붙은 소재는 기본이고, 최대한 많은 곳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디자인한 운동복 같았다.
누가 보면 미인대회 출전을 위해서 단체로 합숙훈련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여기에서 운동하는 극소수의 남자들이 부러워졌다.
아니지. 남자 손님이 몇 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하나같이 젊고 외모도 훌륭했다. 선남선녀들만 가려 모은 곳 같았다.
건물 전체가 그랬다.
아무리 봐도 수수께끼 같은 건물이네.
그때 누군가가 서유림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가벼운 발걸음소리로 보아 날씬한 아가씨가 분명했다.
서유림은 순간 피해줄까 하다가 오히려 손을 뻗어주었다. 아가씨의 행동에 고의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몰랐겠지만, 서유림의 예민한 감각에는 그런 움직임까지 모두 잡혔다.
아가씨가 서유림과 툭 부딪치며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서유림이 얼른 잡아주었다.
“어머, 죄송해요.”
고의로 당했는데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역시 여자는 얼굴이 무기라니까.
딱 보니 아가씨는 남자가 좋아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얼굴은 예쁘고, 몸매는 늘씬하고, 나이는 어리고, 거기에 순수해보이기까지 했다. 꼭 갓 입학한 새내기 여대생 같았다.
게다가 노출이 제법 있는 얇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뛸 정도였다.
“민들레에는 처음 오셨나 봐요.”
내 행동이 조금 어수룩해 보이긴 했을 거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으니까.
“네. 건물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러시구나. 제가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눈웃음치는 것 좀 봐. 얼굴에서 매력이 철철 넘친다.
그런데 여기 종업원인가? 왜 아가씨가 건물 안내를 해줘?
뭐, 해준다면야 나야 좋긴 하지만.
“그래주시겠어요? 사실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거기 사는 아가씨와 약속이 되어있거든요.”
서유림의 말에 아가씨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사장님 손님이셨어요? 죄송해요. 몰라봤습니다.”
역시 종업원이 맞았군. 저 운동복은 유니폼일 테고.
그럼 아까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여자들도 전부 여기 종업원이라는 건가?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아가씨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또 뭐가 죄송한데?
여기 분위기 이상하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저는 민희라고 해요.”
“아 예. 민희씨. 감사합니다.”
민희라는 아가씨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도 구경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옥탑방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민희가 안내를 마치고 내려갔다.
서유림이 초인종을 눌렀다. 채희라가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깜짝이야!
순간 채희라가 하의를 안 입은 줄 알았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흰색의 박스티를 입고 있는데, 그 아래가 훤했거든. 허벅지살 때문에 뽀얗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박스티 안쪽으로 흰색의 핫팬츠가 슬쩍 보인다.
“얼른 들어와. 와인 한잔 할래?”
“좋지.”
채희라를 따라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옥탑방이 이래?
보통 옥탑방 하면 좁고 허름한 이미지부터 생각나는데 이곳 옥탑방은 달랐다. 공간도 넓고 인테리어나 가구도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그야말로 호텔이 따로 없었다.
채희라가 와인을 건네주었다.
“못 믿겠지만, 내 옥탑방에 남자 손님은 오빠가 처음이야.”
솔직히 그 거짓말은 못 믿겠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텐프로라는 걸 내가 아는데. 너한테 순결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짠! 하고 부딪치자 크리스털 특유의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솔직히 와인 맛은 잘 모른다.
정령의 힘 덕분에 오감이 극도로 발달해서 맛을 세밀하게 느낄 수는 있지만, 어떤 맛과 향이 고급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냥 채희라가 주는 와인이니 고급 와인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마셨다.
“그런데 여기는 회원만 들어올 수 있나 보지?”
“비회원도 들어올 수는 있는데, 그러면 입장료가 조금 비싸.”
“얼마인데?”
“하루 50만 원.”
“냐하하.”
서유림이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채희라도 저런 아재 개그를 하는구나. 하루 50만 원이라니.
그런데 하루 입장료가 얼마라는 거지?
5천 원인가? 그럼 보통 5천만 원으로 농담을 하는데. 50만 원이라고 하니까 애매하다.
아무리 그래도 무슨 놀이동산도 아닌데 하루 입장료가 5만 원이나 되진 않겠지.
“5천 원?”
“50만 원이라니까?”
채희라가 왜 사람 말을 못 믿느냐는 듯 다시 이야기했다.
자꾸 저러니 농담 같지가 않네.
하긴, 말솜씨가 없어서 농담을 진담처럼 재미없게 하는 친구들이 이따금 있긴 하지. 하지만 채희라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닌데.
어! 근데 채희라의 저 표정은 뭐야?
그럼 설마······!
“진짜 50만 원이야?”
“그렇다니까.”
채희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말이 돼?
“그럼 연회비는 얼마인데?”
“1천만 원. 월 회비는 200만 원이고.”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금액을 생각하면 농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없는데, 채희라의 표정을 보면 농담이 아니었다.
일단 진담이라고 속아주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뭐가 그렇게 비싸?”
“이런 곳은 원래 비쌀수록 잘 되게 되어있어. 있는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는 특권의식을 자극할 수 있거든.”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더 진담 쪽으로 가고 있다.
확실히 실내가 고급스럽긴 했었다. 여느 스포츠센터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얼마나 돈 많은 바지사장을 잡았기에 이런 곳을 가게로 가지고 있어?
에이, 상관하지 말자. 깊이 알아서 좋을 것 없다.
“그런데 집 구경 좀 해도 돼? 무슨 옥탑방이 이렇게 근사해? 여기가 희라 집인 거야?”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임시숙소.”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넓고 깔끔했다. 책장에 책도 가득했고, 화분의 화초들은 하나같이 싱싱했다.
채희라의 외모와 너무도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책상도 근사했다.
그런데 책상 위에 서류철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서류철의 제목이 서유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YJY 활동계획서]
“이게 뭐야? YJY하고 무슨 관련이라도 있어?”
“아, 그거? 사실 우리 스폰서가 이번에 연예기획사도 새로 차렸거든. 첫 번째로 영입한 게 바로 YJY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