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76화 (76/196)

# 76

이유가 분명한 도전 (2)

“아니요. 조금 더 통 크게 놀아보고 싶습니다.”

사회자의 눈이 다시 커졌다.

조금 더 통 크게 놀아본다고?

이번 토너먼트에서 웰터급과 미들급을 제외한다면 무제한급만 남았다.

그렇다면 서유림이 무제한급에 출전한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그런데 서유림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무제한급에 도전해보겠습니다.”

순간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웅성거림이 커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굳이 들어야만 내용을 알겠는가?

내용이야 빤하지 뭐.

“미친 것 아냐? 미들급 선수가 무제한급에 도전한대.”

“무모한 도전인데.”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VIP석에 앉아있는 유력인사들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유림은 오히려 그런 반응이 만족스러웠다.

만약 모두가 ‘서유림 정도라면 당연한 도전이지.’ 라고 생각한다면 설령 무제한급에서 우승한다고 해도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반전의 맛이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을 짠! 하고 이뤄내야 그 짜릿한 반전의 맛에 관중들이 흥분할 것이다.

서유림이 그 짜릿한 반전의 드라마를 써볼 작정이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사회자가 다시 물었다.

“조금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파격적인 도전인데 무리하면서까지 무제한급에 도전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유? 당연히 있지.

상금이 훨씬 더 크잖아. 똑같은 경기 치르고 5억 원을 더 받을 수 있는데 당신 같으면 그런 기회를 포기하겠어?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재미가 없겠지. 격투기는 관중들의 기대감이 곧 돈이라니까.

이런 기회에 기대감을 키워야 할 것이다.

서유림이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어디 있지? 분명히 왔을 텐데. 아, 저기 있구나!’

서유림이 관중석 한쪽을 향해 손가락을 쭉 뻗었다. 그곳에 미들급 챔피언 권이슬이 앉아있었다.

“권이슬 선수와 빨리 붙어보고 싶습니다. 무제한급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중간과정 다 생략하고 바로 챔피언벨트에 도전할 수 있겠죠?”

그러자 관중들이 ‘와!’하고 소리쳤다.

제대로 먹혔군!

하지만 지난번처럼 카메라가 한상민을 비추지는 못했다. 한상민이 오늘 경기장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중들과 시청자들은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상민은 언제가 되었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줘야 할 것이다.

조금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아줄까?

서유림은 장내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관중들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토너먼트 우승하면 챔피언벨트 도전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내 얼굴이 이렇게 두꺼웠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관중들을 향해 마이크를 넘기듯 뻗었다.

그러다가 아무 반응 없으면 그 쪽팔림을 어쩌려고?

다행히 호응이 뜨거웠다. 크로스 카운터로 강규정을 쓰러뜨렸을 때보다 더욱 뜨거운 함성이 장내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와아!”

다행이군. 분위기는 대충 만들었어.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케이지를 나왔다.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대회 관계자가 급히 다가왔다.

“한상민 대표님께서 보자십니다.”

한상민 대표? 경기장에 나왔었나? 왜 안 보였지?

“어디에 계시는데요?”

“푸르름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연락 왔습니다. 지금 바로 오시랍니다.”

사무실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오라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니 곧바로 답이 나왔다.

무제한급 출전 선언을 본 거겠지. 어쩌면 취소하라고 강요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다고 취소할 내가 아니지만. 우승상금이 무려 5억 원이나 차이 나는데 어떻게 포기해?

그리고 미들급보다는 무제한급을 평정해줘야 서유림의 인지도가 훨씬 더 빠르게 치솟겠지. 아마 토너먼트 우승하자마자 UFC에서 서유림과 계약하려고 안달하게 될 걸.

WBC나 WBA, IBF 같은 복싱단체에서 곧바로 접근해주면 더 좋겠다.

그나저나 한상민과 마주할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오다니. 오늘은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한상민 손 한번 잡아봐야겠다.

이놈 체력도 한동민의 것만큼이나 맛이 좋을까?

그런데 무슨 구실을 어떻게 만들지?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하자마자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뿜어져 나왔다. 회사가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디자인이 예술이었다.

게다가 입구에는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스타들의 사진이 주르륵 걸려있었다.

이곳에 소속된 스타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서유림이 두리번거리자 젊고 세련된 옷차림의 경비가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상민 대표님 호출 받고 왔습니다.”

경비가 무전기로 확인해보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냥 혼가 가도 되는데. 그래야 길 잃은 척하며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을 텐데.

경비를 따라서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에는 비서는 안 보이고 한상민 혼자 있었다.

뭔가 고민이 많은 듯했다. 소파에 앉아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유림이 들어오자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이야?”

하여튼 입이 걸레라니까.

주둥아리 세탁해주는 마법은 없을까? 있으면 저놈 주둥아리에 슈퍼타이에 옥시크린까지 듬뿍 넣어서 돌려주고 싶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서유림이 능청을 떨었다.

“누구 마음대로 무제한급에 도전하래? 너 미쳤어, 새끼야?”

누구 마음대로? 그야 물론 내 마음대로지.

내가 MAN FC와 계약한 것은 단지 게임 수와 계약기간뿐이다. 어느 체중에서 경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없다는 내용도 없다.

한마디로 무제한급 도전에 대한 것은 온전히 내 자유라는 거지.

“제가 무제한급에 도전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왜? 내가 물어보면 안 될 질문이라도 했어? 왜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데?

물론 내용이 조금 당돌하긴 했지만, 대신 말투가 공손했잖아.

서유림이 잠깐 끊었던 말을 다시 이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없었고, 계약서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전한 것뿐입니다.”

“인마, 가능성이 있는 걸 도전해야지. 네가 몸무게가 얼마야? 자신감 넘치는 건 좋은데 그 체구로 무제한급이 말이 돼?”

당연히 말이 되지.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은 기를 살려주면 안 된다니까. 제 잘난 맛에 분수도 모르고 날뛰어요. 넌 그냥 내가 하라는 것만 하면 돼. 그게 네가 이 바닥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야. 알겠어?”

하여튼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게다가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뭐야? 나를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쯤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착각이다.

아무래도 한상민은 나와 MAN FC간의 계약서를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내가 그 계약서 엄청나게 바꿨는데.

그중 가장 신경 써서 바꾼 게 뭔지 알아?

바로 계약기간이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게 되면 그 즉시 계약기간이 만료되도록 해놓았단다.

그러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되지.

게다가 그때쯤이면 난 격투기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서있을 거다. UFC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서 서로 끌어가려고 하는 귀하신 몸이 되는 거지.

난 그렇게 만들 자신감이 차고도 넘치거든.

과연 그때도 네가 슈퍼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군. 네 앞에서 계약서 북북 찢고 그걸 면상에 뿌려주고 말테다.

하지만 지금은 참고 기다려야 할 때다. 고기를 낚으려면 인내가 필요한 법이니까. 떡밥도 뿌리고 미끼도 쓰고 주둥이가 완전히 걸릴 때까지 기다려줘야지.

특히 한상민 같은 대어를 낚으려면 더욱 큰 인내가 필요하겠지.

서유림이 한상민을 바라보며 도발하듯이 물었다.

“제가 무제한급에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8강은커녕 예선통과도 힘들어, 인마.”

서유림의 입꼬리사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럼 저랑 내기 하실래요?”

요즘 들어 말끝마다 ‘내기’라는 단어를 붙이고 사는 듯하다. 이러다가는 별명이 ‘서내기’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 있는 걸 어떻게 해?

게다가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다. 내기도 할 수 있을 때 빨리빨리 해서 돈을 모아야지.

이왕이면 통 크게.

“한 10억 원쯤 어떻습니까?”

서유림의 눈빛에도 말투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 바람에 오히려 한상민이 움찔할 정도였다.

“대표님께 10억 원은 대수롭지 않은 액수일지 몰라도 제게는 평생 벌어도 만져보기 힘든 돈입니다. 만약 제가 패한다면 그 돈 때문에 영원히 대표님의 노예가 되겠죠. 어떻습니까?”

한상민이 ‘노예’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살며시 흔들리는 눈빛이 내면의 갈등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상민에게도 10억 원은 제법 무게가 느껴지는 액수인 듯했다.

서유림은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한상민은 서유림이 던진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제대로 걸렸다.

“너 진짜 패가망신 한번 해보고 싶어?”

“패가망신하게 될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스타가 될지는 경기를 치러봐야 알겠죠.”

서유림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뜨거운 맛을 보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지. 나야 쓸 만한 노예 하나 얻는 셈이니 손해 볼 것 없지. 월요일에 내 사무실로 와. 법률대리인 세워서 정식으로 계약해주지.”

이것으로 상황 종료다. 토너먼트만 끝나면 누가 진짜 갑이고 을이었는지가 확실하게 가르쳐주마.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이제 소소한 복수를 시작해볼까? 조금 유치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더란 말이지.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리고 이거······ 대표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준비한 게 있습니다.”

서유림이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고는 주먹을 쥔 채 뻗었다.

역시 한상민은 평소에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선물이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손부터 뻗을 텐데, 한상민은 오히려 피하기 바쁘네.

그만큼 주변에 적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게 뭔데?”

“장담하건데 실장님께 행운을 가져다드릴 겁니다.”

“무슨 수작이야? 뭔데 그래? 손 펴봐.”

쉽게 걸려들지 않네.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

하지만 그렇게는 못하지.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둘 뿐이다. 나에게 체력을 빨리거나, 아니면 선물을 포기하거나.

사실 한상민이 이런 식으로 나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준비해온 시나리오도 있었다.

한마디로 넌 무조건 걸려들게 되어있다는 뜻이지.

“대표님이 보기에는 제가 몇 달 만에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잠재력이 폭발한 거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하지만 잠재력이 왜 폭발했는지가 중요하죠. 저는 이것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게 제게 행운을 주고 있거든요.”

한상민의 눈빛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하긴,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서유림이 그동안 보여준 변화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으니까.

기적이라는 말을 붙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걸 말씀드리면 행운이 날아가죠. 제 딴에는 지난번 일 만회하려고 제 전부나 마찬가지인 걸 드리는 건데······. 실장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서유림이 내밀었던 주먹을 회수했다.

그제야 한상민이 손을 내밀었다. 한상민의 눈빛에 호기심이 넘실넘실하다.

“알았어. 줘봐.”

그놈 참 낚기 힘드네.

하지만 낚은 후가 더욱 중요한 법이지. 앞으로도 계속 이용해먹으려면 사후관리가 편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거든.

서유림이 주먹을 건네주면서 두 손으로 한상민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한상민이 테러라도 당하는 줄 알았다는 듯 움찔하며 손을 뺐다.

하지만 그리 쉽게 놓아줄 수야 없지. 결과보다 중요한 게 과정이거든.

“행운은 남에게 보여주거나 발설하면 사라지는 법입니다. 제게도 보여주지 마시고, 꼭 혼자만 간직하세요.”

“그놈 참······. 알았다니까.”

한상민이 마뜩찮은 표정을 하면서도 서유림을 재촉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한 번 더 분위기를 잡았다.

“말씀드렸지만, 제 전부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번 일은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제가 그만한 깜냥이 못 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힘껏 밀어주십시오. 책임지고 MAN FC 흥행시켜보겠습니다.”

“알았다고. 그러니까 얼른 줘봐. 나 바쁜 사람이야.”

그제야 서유림이 슬그머니 주먹을 풀었다. 손 안에 들어있던 동글납작한 작은 금속성 물건 하나가 한상민의 손에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한상민의 체력을 왕창 흡수해주었다.

그러자 한상민이 약간 현기증을 느끼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한꺼번에 너무 강하게 흡수했군. 어쩌지?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핑계가 있었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잔머리 하나는 무지하게 좋아졌다니까.

“혹시 이 동전을 받는 순간 현기증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도 그랬거든요.”

한상민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로 손안의 무엇인가를 받는 순간 짜릿할 정도의 현기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소에 이런 현기증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데.

그래서인지 서유림의 말에 갑자기 신빙성이 팍팍 느껴졌다.

‘정말 이것 때문에 그런 건가? 이게 그렇게 특별한 건가?’

한상민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아······ 알았어. 그만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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