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그곳엔 특별한 OOOO이 있다. (2)
“안으로 들어가자.”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임채모와 도상국, 거기에 원장님이 끼어서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나같이 ‘옛날에 이렇게 즐겁게 놀았는데.’ 하는 추억의 나눔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도상국의 학창시절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었다.
도상국은 이런저런 말썽은 많이 피웠지만, 무척 밝고 성실한 아이였다. 태권도 국가대표선수를 목표로 운동도 무척 열심히 했다.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많았고, 특히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기어이 민감한 이야기까지 꺼냈다. 보육원 관계자들은 그토록 꺼리던 이야기를 임채모는 전혀 거리낌 없이 꺼내놓았다.
“나는 네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믿는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네 길을 당당하게 가거라.”
“감사합니다, 아저씨.”
임채모가 도상국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서유림은 대화를 가만히 들으면서 나름대로 도상국을 평가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었다.
함께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만큼 도상국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서유림은 사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도상국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임채모만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보면 볼수록 가슴을 찌릿하게 울리는 뭔가가 느껴졌다.
그런데 임채모 역시 서유림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처음에는 도상국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서유림에게는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서유림에게 더욱 눈이 가는 듯했다.
서유림에게 자꾸 시선을 주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서유림이 그 틈을 노려서 슬쩍 끼어들었다.
“정말······ 선생님 혼자서 이 두리랜드를 만드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딱 한번뿐인 인생인데 이 정도는 만들어놓고 가야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지 않겠나? 하하.”
“그런데 입장료도 없고, 요금도 그렇게 저렴하게 받으시면 운영이 됩니까?”
“좀 손해 보면 어때? 아이들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하하.”
임채모가 다시 활짝 웃었다.
역시 보통 사람과는 생각하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 남들은 돈을 많이 못 벌어서 걱정인데······.
원장님이 서유림을 대신해서 임채모를 걱정해주었다.
“그래도 최소한 본전치기는 하셔야죠. 작년 비수기에는 직원들 월급 주려고 빚까지 지셨다면서요.”
“걱정 마세요, 원장님. 성수기가 되면 빚 갚을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임채모가 말을 멈추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유지할 자신이 있는데······.”
말끝에 ‘내가 죽은 후’의 일이 생략되어있었다. 그 말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도 숨어있었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이중에 임채모의 건강을 위해서 힘써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서유림은 궁금한 게 많았다.
특히 임채모와 관련해서.
분위기도 전환시킬 겸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은 어쩌다가 두리랜드를 만들게 되셨습니까?”
“어쩌다가가 아니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이지. 배우가 된 것도, 돈을 벌었던 것도 모두 이 꿈을 위해서였다네.”
사실 임채모는 두리랜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 주변사람들로부터 많은 비웃음을 샀다. 동료 연예인들도 무척 만류했다.
그런 곳은 놀이동산보다는 모텔 같은 게 훨씬 어울린다고. 모텔을 세우면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그런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돈을 벌려고 놀이동산을 세운 게 아니었거든.”
거기까지 이야기한 임채모가 서유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서유림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듯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서 사람들의 관상이 조금씩 보이네. 딱 보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될 사람인지가 대충은 보여.”
저는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될 사람인 것 같습니까?
서유림이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임채모가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대답해주었다.
“자네는 정말 크게 될 관상이로군. 후광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니 꼭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아.”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령의 힘을 가졌기에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자가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세우기는 했지만, 사실 서유림 본인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냥 재미삼아 상상해보는 정도랄까?
그런데 임채모가 저렇게 이야기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는 듯했다.
“사실 자네 같은 젊은이를 보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네. 잔소리로 들을까 무서워서 삼가고 있긴 하지만.”
잔소리라도 좋다. 듣고 싶다.
“열심히 사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 목표가 돈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돈은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현실과는 괴리된 이상주의적인 마리.
하지만 그 이상주의적인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와 닿았다.
사실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돈과 권력, 그 자체가 꿈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나도 돈과 권력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도 막연한 욕심일 뿐이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히 그런 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임채모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은 생각이 움직이는 듯했다.
힘과 권력은 진정한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꿈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거다!’라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난 첫 번째 꿈은 이뤘네. 하지만 아직 두 번째 꿈이 남아있지. 그게 뭔지 물어봐주겠나?”
“그게 뭡니까?”
서유림이 물어주었다.
그러자 임채모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난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해. 길어야 한 2년이나 살까? 어쩌면 올해를 못 넘길 수도 있겠지.”
도상국이 임채모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약한 말씀 마세요.”
“아냐. 난 오래 사는 것에 미련 없어. 주어진 생을 다하면 누구라도 가야 하는 거야.”
임채모가 도상국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단지 죽기 전에 내 모든 것을 다 불태우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네. 아주 작은 거라도 남겨놓으면 저승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아.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꿈이라네!”
서유림은 임채모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쿵! 하는 울림을 느꼈다.
임채모의 꿈!
‘죽는 순간까지 아주 작은 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태우고 싶다.’
너무 멋진 말이었다. 그렇게 세상과 이별한다면 너무도 홀가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움켜쥐려고만 하지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으니까.
내게 남은 내일이라는 시간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남겨놓은 가족을 위해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하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은 재산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니까. 물론 범인들의 생각에서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임채모는 진정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런 불확실성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지 않은가?
서유림은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얼마나 용감한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범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힘을 가졌는데도 자꾸 도망치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채희라의 일과 관련해서도 그랬고, 도상국의 일과 관련해서도 그랬다. 부담스러운 일에 엮이지 않으려고 애써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인생을 너무 안전하게만 가려고 했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워서 그랬던 것일까?
무엇을 그렇게 지키려고 그랬던 것일까?
“신이 인간에게 능력을 주었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네. 능력에 맞는 역할을 하라는 거지. 자네도 마찬가지일 걸세.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능력에 맞는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하네.”
내 능력에 맞는 역할이라.
사실 내가 가진 능력은 임채모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엄청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까?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죽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그리고 남김없이 발휘하여 세상에 뿌리고 싶었다.
그러면 생을 다하고 죽어가는 그 순간 임종을 지켜보는 자손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지.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워서 내 능력에 맞는 역할을 해냈다.]
갑자기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뭐가 두려워서 그토록 움츠리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토록 강한 힘을 얻고도 뭐가 두려워서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부터라도 목표를 세우겠다. 내 모든 것을 던져서 이루고 싶은 목표.
새로운 각오 때문일까? 서유림의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임채모와 헤어지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비로소 도상국과 따로 떨어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도상국이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했다.
서유림은 그 틈에 보육원 관계자들에게 도상국과 관련한 질문을 마음껏 던질 수 있었다. 물론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위주였다.
보육원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상국이가 한 일이 절대 아니에요. 상국이와 미연이가 어떤 사이였는데.”
김미연.
강간살인으로 희생된 여고생의 이름이었다. 공교롭게도 서유림의 여동생과 이름이 같았다.
도상국과 김미연은 사건이 있기 전부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곳도 아주 깊이. 육체적인 관계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김미연이 너무 예뻤다는 점이었다.
아름다운 꽃에 벌과 나비가 모이듯 김미연 주변으로도 남자들이 꼬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유혹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고 했던가?
김미연은 남자들에게 수십, 수백 번을 찍혔다. 게다가 보육원이라는 빈곤한 현실이 겹치다보니 조금씩 좋지 않은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옥희경이라는 친구 등과 함께 성매매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고가 난 것이다. 자세한 경과는 모르겠지만, 성매매 과정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국이가 누명을 쓴 것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어요.”
원장님의 말씀이었다.
그제야 서유림도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도상국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다.’
도상국은 그때까지도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농구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왜 내 귀에는 그것이 도상국의 울음소리로 들리는 거지?
집으로 돌아온 서유림은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도상국과 관련한 생각은 제법 정리되었다. 더는 도상국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임채모와의 대화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히 두 번째 소원이.
[죽기 전에 내 모든 것을 모두 불태우고 싶다. 하나도 남김없이.]
서유림을 반성하게 하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특히 채희라에게.
채희라가 흘려보내듯 털어놓았던 고민이 다시 생각났다.
[깡패새끼들 때문에 걱정이야. 벌써부터 돈 뜯으려고 달려드네. 어제도 그 새끼들한테 한참 시달렸어.]
[그렇다고 오빠한테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채희라는 서유림을 생각해주고 있었다. 괜히 자신의 일 때문에 서유림이 곤란해질까 봐 걱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괜히 엮일까봐 두려워했었지.’
물론 쓸데없는 오지랖은 사양한다.
게다가 채희라의 일에 잘못 엮이면 조폭과의 싸움으로 확대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도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오지랖과 책임감은 구별해야지. 채희라는 나를 그만큼 배려해주는데, 내가 채희라의 위험을 나몰라라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만약 일이 불필요하게 확대될 것 같다면,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잘 조절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나는 정령의 힘을 가진 특별한 존재잖아. 그 정도 능력은 스스로 갖춰야겠지. 그리고 능력에 맞는 책임감도 느껴야 하고.
그게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휴대폰을 열었다.
아직은 이른 오후였다. 전화받기 곤란한 시각은 아니겠지.
곧바로 채희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머! 오빠가 먼저 전화를 다 걸어주고. 어쩐 일이야?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때 깡패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그 일은 어떻게 되었지?”
- 아, 그거? 오빤 신경 쓰지 마. 괜히 엮이면 오빠만 곤란해져.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이것 봐. 채희라는 이만큼 날 생각해주고 있다니까.
아무리 엔조이 관계로 만나는 사이라고 해도 받는 게 있으면 그만큼 줘야지. 그게 사람 된 도리 아니겠는가?
“혹시 가게 찾아와서 행패부리고 그러는 거야?”
- 그건 아냐.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니까. 근데 그건 왜 물어? 오빠가 나서서 깡패들 때려주기라도 하게?
“우리 희라가 원한다면 뭐······.”
서유림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채희라를 도와주겠지만, 그전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가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채희라가 밝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 호호호.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알았어. 오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할게. 하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마.
채희라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당장은 별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 필요하면 꼭 얘기해.”
통화를 마친 서유림은 혼자서 속으로 다짐해보았다.
‘이제부터는 망설이지 않겠다. 죽기 전까지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남김없이 세상에 쏟아 붓겠다. 임채모 어르신보다 훨씬 더 통 크게 놀아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