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그곳엔 특별한 OOOO이 있다. (1)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다.
한동민이 1호로 퇴근하고, 2호가 서유림이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퇴근하자마자 곧장 강성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생활패턴이 지나칠 정도로 단조롭다. 회사, 체육관, 집!
아주 가끔 채희라를 만나는 게 생활의 유일한 일탈인 듯싶다.
그런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오히려 하루하루 강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서 짜릿하기만 했다.
도상국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종범은 당연히 없었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은 이른 저녁부터 손님이 많아서 업주가 시간을 절대 못 빼주겠단다. 그래서 일주일에 4일만 가르치기로 했다.
그런데 도상국도 내일은 다른 약속이 있는 모양이다.
“형님, 내일 하루 쉬겠습니다.”
“무슨 일 있어?”
“보육원에 좀 가보려고요.”
보육원? 서유림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도상국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걸 몰라서 물어? 네가 보육원에 간다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
물론 보육원 출신이 자신이 살았던 보육원을 가본다는 게 이상할 일은 없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도상국의 경우는 특별한 상황이잖아.
인터넷을 검색해서 간신히 찾아낸 사실인데, 도상국이 강간살해 했다는 여고생이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일로 누가 가장 분노하고 있을까? 당연히 가족 같은 보육원 관계자들일 것이다.
제아무리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그게 쉽게 묻힐 상처이던가? 도상국을 보면 당장 씹어 먹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런데도 보육원을 간다고?
그럼 둘 중 하나겠지.
도상국이 사실은 실제 범인이 아니고 보육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거나, 아니면 도상국이 용서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러 가거나.
궁금했다. 과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참에 나도 가볼까?
그러면 보육원 관계자에게 도상국과 관련해서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보육원, 나도 함께 가보면 안 될까?”
“형님도요? 왜요?”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니 답이 궁하네.
“상국이가 살았던 곳이라니 궁금해서 그러지. 그곳 애들은 어찌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내가 함께 가면 곤란해?”
역시 이럴 땐 역공이 최고다. 가야 할 이유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
“곤란할 거야 없죠. 하지만 시합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렇다고 매일 훈련만 할 수야 있나? 가끔 기분전환도 해줘야 능률이 오르지.”
“그러면 함께 가시죠.”
됐다. 내일이면 도상국과 관련한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리겠다.
도상국이 살았다는 참사랑 보육원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었다.
제법 산골로 들어가서 한적한 시골마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시골길을 오가는 차량이 제법 많았다.
“여기 뭐가 있나?”
“관광단지나 마찬가지잖아요. 민속박물관도 있고, 야구장도 있고, 놀이동산도 있고, 조각공원도 있고.”
그렇군.
그러고 보면 너무 얌전하게만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집, 학교, 도서관만 오가며 살았던 것 같다.
모험심이 부족한 것인지 집 주변도 매일 오가는 길 외에는 골목길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니 서울 외곽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지금부터라도 많이 다녀봐야겠다. 이왕이면 가족과 함께.
그러는 사이 참사랑 보육원에 도착했다.
슬쩍 도상국의 눈치를 보았다. 긴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런 기색은 전혀 없다. 무덤덤하기만 하다.
오히려 도상국보다 내가 더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함께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보육원이 생각보다 컸다. 아이들 수가 70명가량 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도상국을 발견했다. 그런데 반응이 애매했다. 반가워하는 내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서워서 달아나는 아이도 없었다.
몇몇 아이만이 약간 경계의 눈빛을 할 뿐이고 나머지는 한번 흘끔 바라보고는 관심을 접는 식이었다.
하지만 보육원 관계자는 달랐다. 도상국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얼른 달려와서 손을 잡았다.
“상국이 왔구나. 잘 왔다!”
다른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활짝 웃는 얼굴로 도상국을 반겼다.
분노나 증오를 보이는 관계자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도상국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밥은 먹었니?”
“예, 원장님. 이거…….”
“아휴, 생활하기도 부족할 텐데, 이런 걸 사오고 그래?”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 얼마 전에 ‘주먹이 운다.’에서 준우승해서 상금 받았잖아요. 게다가 이분께서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주셔서 돈을 제법 벌고 있습니다.”
그제야 보육원 관계자들이 서유림에게도 관심을 두었다.
“안녕하세요. 서유림이라고 합니다.”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하신 분이에요. 식품회사 다니시는 분인데, 저와 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도상국이 추가로 설명해주었다.
서유림도 미리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이런 곳에 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는 없잖아.
“아휴, 감사합니다. 잘 오셨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적어도 보육원 사람들은 도상국에게 분노나 원한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점. 어쩌면 도상국이 흉악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널찍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원장님은 서유림이 소외되지 않도록 이따금 서유림에게 맞는 대화를 유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여고생 강간살인과 관련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도상국도, 보육원 관계자도 일부러 그 이야기는 피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겠지.
물론 분위기를 잘 봐서 물어야 할 것이다. 이왕이면 도상국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하지만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도상국이 자리를 비워야 말이지.
게다가 자리를 이동해야 할 일까지 생겼다.
“그런데 혹시 두리랜드 아저씨 소식은 들었니?”
“두리랜드 아저씨가 왜요? 무슨 일 있나요?”
“못 들었구나. 간암에 걸려서 수술을 크게 했잖니. 며칠 전에도 방사선 치료 받으려고 서울 큰병원에 며칠 다녀왔어.”
“예에? 아저씨가 간암에요?”
도상국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두리랜드 아저씨와 무척이나 특별한 관계인 듯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렴. 아저씨도 너 보면 반가워하실 거야.”
“그래야죠. 아저씨께 맞아죽는 일이 있더라도 가서 인사드려야죠.”
“그게 무슨 소리니? 아저씨도 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굳게 믿고 계시니까 아무 걱정 말고 다녀와.”
이제야 그 이야기가 살짝 나왔다.
당연히 여고생 강간살인과 관련한 이야기일 것이다. 즉, 보육원 관계자들은 도상국이 진범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행이다.
내가 왜 그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라고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보육원 관계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묻는 것도 한결 부담이 적어질 듯하다.
“형님도 함께 가보시겠어요?”
당연히 함께 가봐야지. 도상국에게 특별한 인연이라면 누구라도 만나보고 싶다. 그러면 도상국을 조금이라도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럴까?”
“나도 함께 가마.”
원장님까지 포함해서 세 명이 함께 두리랜드라는 곳으로 향했다.
보육원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천천히 걸어서 이동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서유림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런데 두리랜드 아저씨라는 분은 어떤 분이세요?”
이런 질문이야 전혀 부담 없을 테니.
“천사죠, 천사. 세상에 그런 분도 없죠.”
원장님이 잘 물어주었다는 듯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조금은 뜻밖의 인물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혹시 배우 임채모씨 모르세요? 한때 굉장히 유명했던 분이신데. 지금도 그 이름 대면 많이들 아시던데.”
내가 아무리 연예인을 모른다고 해도 설마하니 임채모를 모를까? 과거에는 늘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최고의 배우였고, 지금도 임채모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스타중의 스타였고, 지금은 최고의 원로스타 중 한 명이겠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최근에 임채모를 본 기억이 없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어림잡아 5년도 넘은 듯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기에서 갑자기 왜 튀어나와?
“물론 알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이 운영하는 놀이동산이에요. 벌써 30년 가까이 됐네. 연기해서 번 돈을 몽땅 투자해서 세웠죠.”
그런 일이 있었어?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운영을 어떻게 했기에 보육원 원장님으로부터 ‘천사’라는 칭찬까지 받는 것일까?
“그동안 입장료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특히 우리 보육원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시죠.”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놀이동산인데 입장료를 안 받아? 그럼 무슨 돈으로 운영을 한단 말인가? 혹시 말만 놀이동산이고 규모는 단순한 놀이터 수준이 아닐까?
하지만 2km를 걷고 두리랜드에 도착하고 보니 그런 생각은 말끔히 지워졌다.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규모였다.
아무리 배우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개인이 세울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여느 중소도시에 이런 게 있다면 단번에 최고의 관광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입구에 비치된 안내도를 보니 없는 게 없었다.
미니기차, 회전목마, 우주전투기, 스윙거, 바이킹, 점프보트, 시뮬레이션, 범퍼카, 난타체험, 에어바운스, 해골왕국, 슬라이딩 자동차, 거기에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청룡열차까지 있었다.
비탈에는 물놀이장과 눈썰매장도 만들어놓았다. 물론 지금은 계절이 아니라서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좁은 공간을 참 알차게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 놀이기구마다 이용요금이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운영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가격도 다른 놀이동산과 비교해서 무척 저렴했다. 바이킹은 3천 원, 회전목마는 2천 원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모든 이용요금이 무료라고 했다.
규모가 작거나 놀이기구가 조잡한 걸까?
놀이동산 안쪽을 흘끔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른 곳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박리다매 상술이라고 해도 저 금액으로 직원들 월급이나 챙겨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저쪽에 계시는군. 몸도 안 좋으신데 저렇게 나와 계셔도 되나 모르겠네.”
원장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노인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저분이 내가 아는 배우 임채모라고?
전혀 다른 외모였다. 임채모는 얼굴도 잘생기고 풍채도 좋았다. 연기력 못지않게 외모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명배우였다.
나이도 아직 60대 초반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저 모습 완전히 삐쩍 말라서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70세는 넘어보였는데,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해보였다.
암 투병중이라더니 그래서 저렇게 변한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원장님이 임채모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제야 임채모가 이쪽을 바라보고는 활짝 미소 지었다. 병색은 완연하지만 미소는 무척이나 밝았다.
“원장님 오셨군요.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상국이 왔구나! 고생 많았지? 어디 한번 안아보자.”
임채모가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자식이라도 만난 것처럼 도상국을 반겼다.
도상국도 마치 아들처럼 임채모의 품에 살짝 안겼다.
뭐지? 왜 저 모습에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는 거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코끝이 시큰해진다.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요. 바람이 찬데 이렇게 나와 계시면 어떻게 해요?”
“안에만 있으면 더 병난다. 난 바깥 체질이야. 하하.”
목소리는 딱 임채모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도 임채모의 모습이 비로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도상국이 서유림도 간략하게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임채모의 관심은 도상국뿐이었다. 서유림을 반겨주긴 했지만, 이내 다시 도상국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유림 역시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임채모가 무슨 말을 걸어온다고 해도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채모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다. 충격이랄까?
저렇게 다 죽어가는 사람이 이런 엄청난 놀이공원을 세워서 운영하고 있다고?
저 초라한 모습의 임채모가 왠지 모르게 거대해보였다. 그것은 외적인 거대함이 아닌 내적인 거대함이었다.
오히려 위풍당당하게 변한 서유림 본인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임채모와 자신이 너무도 비교되었다.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이런 대단한 일을 이뤄낸 임채모.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얻었는데도 평범한 삶에만 안주하고 있는 서유림.
그 점이 자꾸만 서유림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