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72화 (72/196)

# 72

한상민스러운 심부름 (3)

“원하신다면 제가 경찰청 신문고에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윤사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뭐야? 재수 없게? 시켜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따를 것이지. 주제파악도 못 하고.”

너야말로 뭐냐? 오늘 진짜 확 깬다!

TV에서 보던 윤사희는 청순함의 대명사였다. 오죽하면 국민소녀라는 애칭까지 붙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할 것 같고, 가장 착할 것 같고, 가장 맑을 것 같은 이미지가 바로 윤사희였다.

서유림도 윤사희를 그런 이미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이미지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윤사희는 천사의 탈을 쓴 악녀였다. 한 꺼풀만 살짝 벗겨내면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로만 가득 차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 가봐.”

한상민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놈이 가는 순간까지 턱짓으로 사람 성깔을 건드네.

그냥 가기 싫다. 한상민의 체력도 왕창 흡수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상민의 몸에 손을 댈 구실이 없다. 이 상황에서 악수 한번 하자고 손을 내밀수도 없고.

이야기라도 좋게 끝났다면 아부 떠는 척 안마라도 해줄 텐데.

“실장님께서 그만 가보라 하시잖아. 못 들었어?”

비서가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아! 답답하네. 어쩌지? 어쩌지? 저놈을 그냥 두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앞으로도 기회가 쉽게 올 것 같지가 않고.

그러다가 문득 윤사희가 들고 있는 컵이 보였다. 아까 냉장고에서 뭔가 음료수를 꺼내서 따라 마시는 듯했다.

그래, 꿩 대신 닭이다. 유치한 짓이긴 하지만 이대로는 억울해서 도저히 그냥은 못 가겠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도 될까?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서유림이 가볍게 예의를 차리고는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면서 정령 아리안에게 살짝 부탁했다.

아니, 부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정령 아리안이 서유림의 마음을 읽고 벌써 실행에 옮겼다.

마침 윤사희가 컵을 입에 대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순간 음료수가 철철 넘쳐서 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엄마야! 아잉, 난 몰라!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선녀의 옷처럼 깨끗하던 윤사희의 옷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것도 목에서부터 원피스 하단까지 주르르.

포도주스였군.

정령 아리안의 솜씨가 제법이다. 적은 양으로 최대한 넓은 부분을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그것도 지저분하게.

아쉽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친다.

웬만하면 다음부터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눈에 띄기만 하면 어떻게든 오늘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서유림이 귀빈실을 나왔다.

한상민의 비서가 서유림을 뒤따라 나왔다.

“오늘 들었던 말은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말도록. 알겠지?”

물론 그래야 하겠지. 누구에게 이야기한다고 달라질 게 있겠어? 그저 술자리 안주로 몇 번 씹히다가 잊히겠지.

물론 나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불필요한 고생을 해야 할 테고.

혼을 내주더라도 스마트하게 내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유림이 혹시나 싶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비서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이게 아닌데!’ 싶어서 손을 다시 회수하려 했지만, 서유림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덥석 잡았다.

그래. 꿩 대신 닭이라면 한 마리로는 부족하지. 너한테라도 분풀이 좀 해야겠다.

서유림이 손을 꼭 잡고 흔들면서 체력 흡수 스피드를 올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끄러, 새끼야. 인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넌 나한테 찍혔어! 그만 손 놓고 꺼져, 새끼야.”

너도 나한테 찍혔거든.

나의 마력은 이제 37이다. 처음 체력흡수 마법을 익혔을 때보다 능력이 두 배쯤 된 셈이지.

마음먹고 체력 빨아주면 한 번의 흡수로도 제법 영향을 줄 수 있지.

“제가 실장님께 반항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사실 간이 콩알만 한 놈이거든요. 그런 일은 무서워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럼 죽었다 깨어나던가. 아니면 콩알처럼 바닥 구르며 살던가. 이 손 못 놔. 새끼가 어디서······.”

비서가 손을 뿌리치듯 뺐다.

힘을 주면 놓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면 자칫 싸움이 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저것 봐. 벌써부터 효과가 나타나네. 눈이 침침한 사람처럼 심하게 깜빡이기 시작한다. 하품까지 하는군.

“하암. 씨발, 갑자기 피곤해지네. 지금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너 때문에 다 잡쳤잖아, 새끼야.”

나도 마찬가지란다. 너희 때문에 기분 다 잡쳤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알지? 닭은 닭이고 꿩은 꿩이라는 것.

비서와 헤어지고 다시 헬스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뒷맛은 여전히 씁쓸했다. 마치 몸에도 안 맞는 쓴 보약을 사발로 들이킨 기분이다.

기분 정말 더럽다. 운동할 맛도 안 날 정도로.

한상민이건 윤사희간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기분이 더욱 더럽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때 일그러진 얼굴을 펴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대리님.”

권진아의 목소리였다. 나보다 먼저 헬스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헬스장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권진아의 얼굴을 보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뭐가?”

“대리님 이름 팔아서······. 저 때문에 많이 시달리셨죠?”

괜히 장난치고 싶네.

“아휴, 죽는 줄 알았어! 눈 밑에 다크써클 생긴 것 안 보여? 오영훈 주임도 있고, 강철중씨도 있는데 왜 하필 나야?”

“정말 죄송해요. 너무 당황해서······. 대리님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어쨌건 권진아씨가 책임져. 난 이제 권진아씨 애인으로 소문나서 장가도 못 가게 생겼으니까.”

권진아가 피식 웃는다. 농담인 게 표가 확 났던 모양이다.

이거 너무 싱겁잖아. 이렇게 끝내면 재미없는데.

나도 짓궂은 놈인가 보다. 자꾸만 권진아를 놀려주고 싶다.

“일단 특명부터 수행해야겠다. 안 그러면 앞으로 나 회사생활 피곤해질 수도 있어.”

“특명이라뇨?”

“저기 CCTV 보이지?”

서유림이 손가락을 뻗었다.

권진아가 바라보니 정말로 CCTV가 있었다.

“한상민 실장이 지켜보고 있어. 둘이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거야.”

권진아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한다.

“그래서요?”

“간단해. 저 앞에서 키스 5초만 하면 돼.”

“예에?”

성공이다. 권진아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서유림을 바라보는데,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후훗, 고것 참 귀엽네.

이런! 들킨 모양이다. 권진아가 서유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서유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깜짝 놀랐잖아요.”

아 놔, 난 왜 이렇게 연기력이 없지?

게다가 입꼬리까지 씰룩씰룩 춤을 춘다. 거짓말인 게 너무 드러나고 말았다.

그제야 권진아도 맑게 웃는다.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낫겠다. 사실 권진아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권진아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보다 좋은 핑계는 없었을 테니까.

물론 보상은 받아야지.

“나중에 밥 사. 맛있는 거로다가.”

“알겠어요, 대리님.”

그런데 그때 분위기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서 뭐가 좋아서 그렇게 알콩달콩이야?”

한동민이었다. 목소리가 거칠었다. 내가 권진아와 가깝게 지내는 것 같으니 샘이 났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투가 저게 뭐야? 권진아 덕분에 간신히 회복되었던 기분이 다시 악화되었다.

게다가 한동민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다.

“나왔으면 나왔다고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냐? 실장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거야?”

보고는 개뿔이.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결자해지다. 너 때문에 다시 기분 꿀꿀해졌으니까 네가 체력 간식 제공해서 기분전환 좀 시켜다오.

서유림이 한동민의 손을 살짝 잡았다.

“실장님께서 제 손을 이렇게 잡으면서 부탁하더라고.”

“오, 그래? 뭐라고?”

한동민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권진아보다는 한상민의 반응이 훨씬 중요하다는 거겠지.

“제가 MAN FC 흥행의 키를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번 대회에서 꼭 이기랍니다.”

“아, 그랬구나!”

하여튼 단순한 놈이라니까.

그런데 한동민이 서유림을 찾아 헬스장까지 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대충 정리하고 나가자. 오늘 나하고 병원에 같이 가야겠다.”

“병원에요?”

“한 실장님께서 종합검진 예약해주셨다. 서 대리는 이제부터 내 라인이니까 내 옆에 바짝 붙어 다녀야지. 그러면 앞으로 회사생활 편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아, 종합검진? 그거 백날 받아봤자 소용없을 텐데.

그나저나 한동민 라인이라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냐? 조그마한 기업 대표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도 없는 놈이.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MAN FC에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힐 때까지만 참자. 그러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내가 갑질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한동민에게 고마운 점도 많다. 요즘 들어서 자기 라인이랍시고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준다. 게다가 이렇게 체력까지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지 않은가?

나의 고마운 체력 포션 같으니라고.

앞으로도 많은 희생과 봉사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권진아씨 수고해.”

하루 동안 한동민의 개인비서 역할을 해주었다. 그냥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물론 줄을 대신 서주거나 원무과 처리를 대신 해주는 등의 귀찮은 일도 있긴 했지만.

한동민에게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앞으로 받을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봉사해줄 수 있다.

그런데 며칠 후.

명진식품에 갑자기 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한참 운동하고 있는데 밖에서 조용히 들려온 소리였다.

“한동민 대리, 고자 됐다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친구, 소문이 늦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얼마 전에 종합검진 받았다잖아. 그런데 성기능장애 나왔다던데. 더는 그걸 세울 수가 없대.”

“아, 그랬어? 그럼 평생?”

“글쎄. 그것 까지는 모르겠네. 설마하니 치료가 안 될까? 그 젊은 나이에?”

“쯧쯧, 물건 좋다고 너무 함부로 휘둘러대다가 탈이 난 모양이지. 하여튼 남자는 자고로 X방망이를 조심해야 한다니까.”

“근데 난 왜 이렇게 고소하지?”

“큭큭. 사실은 나도 그래.”

창고 안에서만 살다보니 역시 소식이 많이 늦구나. 같은 구매팀 직원인데, 게다가 그 병원을 데려간 사람이 바로 나인데, 오히려 생산팀 직원보다도 소식이 늦다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 한동민의 표정.

어차피 창고 일도 끝냈고, 사무실에서 할 일도 조금 있다.

오늘은 일찍 사무실로 복귀해볼까?

창고를 대충 정리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서유림이 이른 시각에 들어왔는데도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한동민도 마찬가지다. 표정이 무척 침울했다. 마치 나라라도 잃은 표정이다. 그것만 봐도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런데 그런 소문이 어떻게 퍼져나갔지? 한동민이 밖에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을 테고.

그나저나 한동민 불쌍해서 어떻게 해?

내가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정신 차렸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그럼 이제부터 누구 체력을 빨아준다? 이건 그냥 썩혀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능력인데.

한상민 실장과 윤사희가 딱 좋은 대상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몸에 손 대기도 힘들고.

한 10m쯤 밖에서 체력을 흡수할 방법은 없나?

어쨌건 대상은 천천히 물색하기로 하고 일단은 코앞으로 다가온 MAN FC 42대회나 집중하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격투기 팬들 사이에 서유림이라는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남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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