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한상민스러운 심부름 (2)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권진아씨와 사귄다고?
갑작스러운 헛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에 한상민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후훗, 비밀연애중이라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괜찮아. 오히려 그런 건 더 소문을 내야지. 하마터면 내가 실수할 뻔했잖아.”
실수?
이 상황에서 한상민이 실수라고 말할만한 것은 하나뿐이다. 권진아를 불러서 ‘나와 사귀자.’ 하는 식의 이야기를 꺼낸 거겠지.
그런데 거기에 나를 왜 끼어 넣느냐고? 갑자기 웬 비밀연애냐고?
아, 그런 거였나?
잔머리를 굴려보니 대충 상황이 짐작이 된다. 한상민 실장의 노리개가 되기 싫은 권진아가 대충 둘러댄다는 것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다.
한마디로 권진아가 나를 가짜 애인으로 만든 거지.
이거 기분이 나쁘진 않은걸. 권진아 약점 하나 확실하게 잡은 느낌이야.
괜히 미소가 지어지려고 한다.
“뭐, 그것 때문에 널 부른 건 아니고. 심부름 하나 시킬까 하는데 해줄 수 있겠지?”
심부름?
그거야 어떤 심부름이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심부름의 대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겠고.
“말씀하십시오.”
“그리 어려운 건 아냐. 얼마 전에 내가 직접 운전을 하고 가는데, 깜빡 신호위반을 하고 말았어. 그런데 마침 경찰이 지키고 있지 뭐야? 어떻게 됐게?”
이놈도 고약한 취미가 있네. 그냥 한 번에 쭉 이야기할 것이지 중간에 왜 질문을 하고 그래?
하마터면 욕 나올 뻔했다.
그런데 정말 대답을 원하는 건가? 한상민이 말을 멈추고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서 대답해보라는 식으로.
그야 빤하겠지.
“신호위반으로 딱지…….”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귀빈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상민이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눈인사를 보낸다.
누구지?
서유림의 고개도 절로 돌아갔다.
그 순간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 예쁘다!’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군데군데 시원하게 노출된 순백의 원피스 차림인데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어디 하나 흠 잡을 구석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현실에서는 채희라가 가장 예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채희라보다 더 예쁜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가씨의 이름도 안다.
윤사희.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톱스타 여배우다.
나이는 23살밖에 안 되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데뷔해서 벌써 데뷔 7년차다. 첫 작품부터 주연급 조연을 맡았고, 드라마도 대박을 터뜨리면서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올해 초 스무 살 가까이 연상인 한상민 실장과 스캔들이 났고, 결국 그 스캔들은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졌다.
물론 둘은 지금까지도 완강하게 부인했다.
핑계는 그럴듯했다.
한상민은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다. 그리고 윤사희는 푸르름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톱스타이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함께 할 시간이 많았고, 그런 모습이 둘이 사귄다는 식의 엉뚱한 오해를 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데도 윤사희는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여배우였다. 아마도 한상민 실장이 씽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애가 둘이나 있는 아저씨이긴 하지만 3년 전에 부인과 이혼했으니까 씽글은 씽글이지.
윤사희가 귀빈실로 들어오자마자 한상민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조금 전에 여기에서 나온 애는 누구야?”
역시 목소리도 예쁘구나. 쏘는 말투인데도 불구하고 목소리에서 봄볕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눈과 귀가 한꺼번에 호강하니 조금 전에 한상민 실장이 뭘 물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온 애라니?”
“얼굴은 요만해가지고 불여우처럼 이상하게 웃는 애 있잖아.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해가지고.”
권진아를 말하는 거로군.
그런데 그 고운 얼굴과 목소리로 표현을 고따위로밖에 못 하겠냐?
권진아가 어딜 봐서 불여우 같아? 천성적으로 타고난 눈웃음 때문에 웃는 모습이 조금 자극적인 것뿐이지.
게다가 그 피부가 창백한 거냐? 우유빛깔처럼 고운 거지.
역시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게 말투고 표정이고 행동이지.
그 예쁜 윤사희도 말을 저렇게 내뱉으니 조금은 달리 보인다. 예쁘기만 하던 턱은 갑자기 인위적으로 깎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은 코는 TV만 틀면 나오는 흔해빠진 복제품 같다.
눈도 그렇다. 대충 보면 크고 맑은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앞트임을 너무 심하게 해서 오히려 징그럽게 보인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윤사희 보다는 오히려 권진아가 훨씬 예쁘다는 생각도 든다.
“아! 그 아가씨? 이 친구 애인.”
한상민 실장이 턱짓으로 서유림을 가리켰다.
거 참 기분 거시기하네. 왜 자꾸 사람을 턱짓으로 가리켜?
나중에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언제가 되었건 내가 꼭 되갚아주마.
“아, 그랬어? 오빠가 말했던 그 사람인가보네? 싸움 잘한다는.”
이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 상대라고 해도 예의는 갖춰야 한다.
개를 상대한다고 해서 나까지 똑같이 개가 될 수는 없잖아.
“명진식품 구매팀 대리 서유림입니다.”
“대리? 어머나. 아저씨는 복도 많네요. 대리 주제에 우리 오빠와 독대까지 하고. 그 일 때문에 부른 거야?”
그년 참 천박하게 구네. 말 좀 예쁘게 하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나? 아니면 돈이 들어?
한상민 실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신호위반에 걸렸을 때 둘이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잘 해보세요. 그쪽한테는 천재일우의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선입견 때문인지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고깝게 들린다.
‘그쪽’이 뭐냐? 이런 상황에서는 ‘서 대리님’이라고 불러줘야 부모님 욕을 안 먹이는 거란다.
역시 윤사희는 싸가지가 없는 걸로.
그런데 천재일우의 기회라. 거 참 말이 거창하네. 이번일 잘하면 대통령이라도 시켜주는 거야?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심부름을 시키려는 건데? 자꾸 궁금증만 커지네.
윤사희는 자기 할 말만 마치고는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팔뚝만한 크기의 작은 애완견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온 정성을 애완견한테만 쏟았다.
“우리 쮸디 배고프지? 아줌마. 우리 쮸디 밥 다 됐어?”
“예. 여기.”
아주머니가 조금 전까지 구워대던 고기를 내놓았다.
냄새가 구수한 것이 틀림없이 최고급 쇠고기였던 것 같은데, 저게 사람 먹을 게 아니라 개밥이었다니.
“아이 씨. 이건 좀 탔잖아. 우리 쮸디한테 탄 고기를 먹이라는 거야? 그건 아줌마나 먹어.”
윤사희 저거 갈수록 가관이네. 마치 ‘내가 이만큼 막돼먹은 년이다.’라고 보여주려고 일부러 지랄하는 느낌이다.
보고 있으려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런 윤사희의 태도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듯했다. 윤사희가 시키는 대로 조금이라도 탄 고기는 옆으로 빼내고 아주 잘 익은 고기만 예쁜 그릇에 담아주었다.
윤사희의 지랄 같은 행동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우리 예쁜 쮸디. 밥 먹자.”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애완견 예뻐하는 거야 나무랄 일 아니지만, 일하는 아주머니를 애완견 발톱의 때만큼도 못하게 대우하는 건 좀 아니잖아?
“에이, 지지. 바닥에 떨어진 건 먹는 것 아냐.”
가지가지 한다. 개밥그릇에 있는 고기나 바닥에 떨어진 고기나 뭐가 다르다고 저렇게 호들갑이야?
개 팔자가 상팔자가 아니라 정승판서 팔자 같았다.
그런데 한상민은 저 모습이 예뻐 보이는 건가? 윤사희를 지켜보는 얼굴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담겨있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라니 이놈들도 그런 건가?
“아 참.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별로 이야기한 것 없단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쭉 얘기해라. 아!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아 맞다. 짭새. 이놈이 신호위반 딱지를 끊으려는 척하면서 나한테 돈을 요구하더라고.”
정말? 요즘에도 그런 경찰이 있다고? 그거 10년도 훨씬 전에 완전히 사라진 풍경 아니었나?
“이런 비리경찰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하지 말고 그냥 혼자 쭉 지껄이라니까 자꾸 그러네.
그렇게도 내 답을 듣고 싶어? 그거야 빤하지.
“제가 경찰청 신문고에 신고해드릴까요?”
어? 이게 아닌가? 한상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놈은 벌이야 받겠지만,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리겠어? 안 그래?”
뭐야 이거? 말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네가 그놈 좀 따끔하게 혼내줘. 최소 전치 4주정도가 좋겠군. 조금 더 길면 더 좋고.”
아 놔, 이거!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지는 느낌이네.
한상민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대충 눈에 그려진다.
한상민 실장이 신호위반으로 경찰에 걸린 것까지는 맞다. 하지만 경찰이 한상민에게 돈을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겠지. 한상민이 돈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겠지. 경찰은 당연히 거절했을 테고.
분위기가 좋게 끝날 리가 없겠지. 한상민은 온갖 욕을 다 퍼부었을 것이고, 그런데도 경찰은 막무가내로 딱지를 끊었겠지.
그래서 나보고 그 경찰을 테러하라는 거잖아.
이거 완전히 개새끼 아냐?
게다가 그런 걸 왜 나한테 시키는데? MAN FC 대회까지 보름도 채 안 남은 시점이라고. 나보고 지금 엿 먹으라는 거야?
그런데 한상민의 개인비서로 보이는 자가 슬며시 다가왔다.
“서유림이라고 했나? 실장님께서 자네를 특별히 불러서 기회를 주시는 이유를 잘 생각해.”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 따위 지시가 기회라고?
아, 자꾸 뒷목이 당긴다. 이러다가 꼭지 돌겠네.
“일종의 통과의례지. 실장님께서 널 힘껏 밀어주시려면 먼저 네 충성심부터 확인해야 할 것 아냐? 이참에 네가 실장님을 위해서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드려. 그러면 앞으로 네 인생은 승승장구, 탄탄대로다.”
아! 뭔지 알겠다!
그런 거였어?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
내 답이 필요해?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래도 경찰을 폭행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시하신다면 경찰청 홈페이지 신문고 같은 곳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이 새끼.”
한상민의 비서가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근데 이놈은 뭐야?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에 욕지거리야? 나이 좀 먹으면 그렇게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아니면 자신이 내 상관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한상민이 손을 들어서 비서를 만류했다. 그리고는 서유림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잘 생각해봐.”
여러모로 기분이 조금 착잡하다.
한상민 정도면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1% 안에 드는 유력자 아닐까? 1%가 뭐야? 0.01% 안에 들 정도로 대단한 존재지. 대한민국 10대 재벌그룹의 가장 유력한 차기 회장이니까.
그런 놈의 사고방식이 이따위라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참으로 암울하다.
한편으로는 한상민과 이런 식으로 틀어지게 된다는 점이 착잡하다.
MAN FC의 대표인데, 앞으로의 대진표는 모두 이놈의 손을 거쳐야만 완성될 텐데. 그래서 한상민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던 거였고.
그런데 그게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됐다 싶었다. 이제 방향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사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생각해보면 MAN FC 흥행의 열쇠는 서유림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정식경기는 한 경기도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상민이 그걸 못 느끼고 있는 모양인데, 11월 대회가 끝나고 토너먼트가 시작되면 곧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서유림을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가 MAN FC 흥행의 열쇠라는 것을.
그러면 당연히 서유림이 갑이 되겠지.
물론 지금 그걸 이야기한다고 믿어주진 않겠지. 저렇게 둔감한 놈은 막상 닥쳐봐야 ‘아, 이게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니까.
그때까지만 살짝 숙여주는 척하자.
그렇다고 그런 나쁜 짓을 해줄 수는 없지.
한상민은 서유림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한상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서유림이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서유림이 비로소 입술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