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한상민스러운 심부름 (1)
이게 무슨 소리야? 둘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야?
하지만 강종국도 도상국도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도상국은 그것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했다.
“그냥 모른 체 해달라니까요.”
그제야 강종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궁금해서 미치겠네. 뭐가 위험한 일인데? 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인데? 경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은 또 누군데?
참다못한 서유림이 넌지시 물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실망스러웠다.
“아셔서 좋을 것 없습니다. 모르는 게 나아요. 그나저나 월급을 200만 원씩이나 주신다고요? 어떻게 된 겁니까?”
도상국이 분위기를 바꾸자는 듯 화제를 돌렸다.
이것 참 답답하네.
더 캐묻는다고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고.
하기나, 도상국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할 정도라면 꼬이고 꼬인 사건일 것이다. 괜히 잘못 걸려들면 인생 피곤해져.
궁금해도 참자.
서유림도 못 이기는 척 화제 전환에 동참해주었다.
“MAN FC와 이야기가 잘 됐어.”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 덕분에 당분간은 돈 걱정 안 하고 살겠네요.”
“나도 고마워. 정말 고마워.”
도상국도 강종범도 진심어린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서유림도 괜히 기분이 흐뭇해졌다.
‘잘하면 정령소환력도 제법 올랐겠는걸. 후훗.’
강종범은 바쁜 사람이었다. 가족을 위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하루를 무척 알차게 쪼개 쓰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니 맞춰주는 수밖에.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강성체육관으로 향했다.
마침 송민호 관장이 나와 있었다. 서유림이 거침없이 다가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300만 원 결제해주세요.”
“웬 300만 원?”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도상국과 강종범의 코칭비였다. 한마디로 도합 월 400만 원의 코칭비 카드깡을 해달라는 거였다.
그러자 송민호 관장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세금도 생각해야 하거든.”
이 사람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어차피 인건비로 다 지출되는데 세금 문제가 왜 나와?
굳이 입씨름할 이유 없다. 나도 굳이 강성체육관을 이용해야 할 이유는 없거든.
다시 카드를 회수했다.
“곤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른 체육관······.”
“에헤~이. 내가 언제 안 해준다고 했어?”
송민호 관장이 깜짝 놀라서 서유림의 손을 잡았다.
“내가 이만큼 서유림씨를 생각해준다는 것을 알아 달라 그거지.”
여전히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네. 나를 그만큼 생각해주는 거라고? 한마디로 해주기 싫은데 나 때문에 억지로 해준다는 이야기잖아.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군!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관장님께 조금이라도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에헤~이. 사람 참. 우리 사이에 부담은 무슨. 이봐? 이거 가지고 가서 얼른 300만 원 결제하고 영수증 끊어와.”
하여튼 꼭 뒷북을 친다니까. 아무래도 머리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뭐, 잘 해결되었으니까.
자리로 돌아가서 도상국, 강종범과 함께 발차기와 스텝 훈련을 시작했다.
사흘 후.
충북 음성군에 있는 유진그룹 연수원이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룹 차원의 체육행사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연수원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한유진 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운동장은 널찍하고, 연수원 곳곳에 체육시설이 잘 배치되어있다. 등산로도 있고, 헬스장도 있고, 사우나시설도 잘되어있다.
한마디로 잘만 활용하면 서유림에게는 오히려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는 이야기지.
한유진 회장에게 눈도장만 찍고 바로 헬스장으로 달려가면 되겠다.
그런데 한유진 회장은 언제 도착하려나?
서유림이 목이 빠지라고 기다리는데, 한상민 실장이 먼저 도착했다.
한상민도 그룹 내에서 위상이 대단했다. 유진그룹에서 가장 강력한 대권후보니까. 본사, 계열사 할 것 없이 수많은 인사들이 서로 먼저 인사하겠답시고 앞 다투어 달려 나갔다.
“실장님 오셨습니까?”
서유림도 얼굴도장 좀 찍을까 했는데, 일찌감치 포기했다. 도저히 저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럴 의욕이 안 생기고.
잠시 후 피구경기가 열렸다.
피구경기장 주변은 관중들로 가득 찼다. 한상민 실장이 피구경기를 관람했기 때문이다.
한상민에게 눈도장을 받고 싶은 인사들이 한상민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서유림도 한쪽에서 피구 경기를 구경했다.
물론 한상민 때문은 아니다. 권진아가 피구 경기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같은 팀원이 경기를 뛰는데 응원 정도는 해줘야지.
그런데 이거 뜻밖인걸! 권진아가 저렇게 날렵했었나?
오! 날아오는 배구공을 잡아버렸어!
다른 사람들도 권진아의 날렵한 움직임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대체선수로 참여한 것뿐인데 순식간에 에이스로 등극한 것 같다.
게다가 오늘따라 왜 저렇게 예뻐 보여?
권진아도 몸매가 보통이 아니었구나!
평소에는 정장 차림이라서 몸매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는데, 몸에 착 달라붙은 운동복을 입고 힘차게 움직이니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뒤로 질끈 묶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이 마치 여고생의 상큼함을 보는 듯하다.
얼굴도 피구선수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데도 오직 권진아의 얼굴만 돋보였다.
역시 명진식품의 퀸카 소리는 괜히 듣는 게 아니구나.
그러다가 문득 한상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한상민도 권진아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저 눈빛과 웃음이 마음에 걸리는 거지?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하이에나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괜히 불안하네.
가만? 그런데 내가 왜 불안해해야 하는 거지?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조금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 회장님 오셨다!”
역시 그룹 총회장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한상민 실장을 비롯해서 모든 관중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한유진 회장을 향해 달려갔다.
너도나도 서로 허리를 더 깊이 숙이려고 난리다.
한창 진행 중이던 피구경기가 단번에 중단되었다.
한유진 회장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았다.
“피구 하고 있었나? 나 때문에 멈추지 말고, 계속 해.”
한유진 회장이 가벼운 말투로 툭 던졌다.
하지만 그 가벼운 말투도 회장님을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명령이었다.
그치라면 그치는 것이고, 계속 하라면 지진이 일어나도 계속 해야 하는 것이다.
“경기 속개합니다. 빨리빨리 진행하세요.”
다시 피구경기가 속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새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각 계열사의 핵심 간부들의 머릿속에는 피구경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회장님 눈에 들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한유진 회장이 VIP관람석에 자리 잡고 앉자 핵심 간부들이 줄줄이 찾아가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한유진 회장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게 곧 자신의 권위를 의미하니까. 핵심 간부들이 인사를 건네올 때마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한 번씩 끄덕여주었다.
‘출세하기 참 힘들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동민 대리가 서유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기에서 뭐 하고 있어? 사장님께서 너 때문에 기다리고 계시잖아.”
응? 사장님이 나를 왜?
아 맞다. 나를 얼굴마담으로 세우려고 데려온 거였지?
결국 나도 저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인사를 하고 와야 하겠구나.
그래, 차라리 빨리 끝내자. 얼굴도장만 찍으면 곧바로 헬스장으로 달려갈 수 있을 테니까.
얼른 한명진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유진 회장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래도 명색이 계열사 사장인데다가 사촌지간이라서 사람들이 순서를 양보해주었다.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오, 한 사장 왔나? 동민이도 왔군.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쌩쌩합니다.”
좋아지긴 뭐가 좋아져? 요즘도 내가 체력을 쪽쪽 빨아주고 있거든.
그래도 오늘은 얼굴이 조금 좋아 보이긴 한다. 몸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생기가 있어 보이도록 화장을 해서다.
“다행이군. 오, 그래. 자네도 왔군. 이름이 뭐였더라?”
“서유림입니다.”
“대회가 보름도 안 남은 것으로 아는데. 몸 관리해야 할 때 아닌가?”
“그래서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응원만 하러 왔습니다. 경기보다 더 중요한 게 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럼. 응원이 훨씬 중요하지. 수고해.”
‘수고해.’라는 말은 그만 귀찮게 하고 가보라는 뜻이었다. 아직도 인사 받아야 할 사람이 많으니까.
한명진 사장이 대표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회장님.”
함께 한유진으로부터 멀어졌다.
이제 된 거지? 한동민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전 헬스장 가서 운동 좀 해도 되겠습니까?”
한동민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대신 휴대폰 잘 받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곧바로 헬스장으로 달려갔다.
헬스장에 사람이 제법 있었다. 역시 사람은 생각하는 게 대부분 비슷하다니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 공개된 장소에서는 마음껏 운동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유명세를 탄 사람은 더더욱 그랬다.
서유림이 그랬다. 밖에 나가면 그렇게까지 유명인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유진그룹 내에서는 제법 유명인사였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꾸 말을 걸어온다.
“어! 명진식품의 서유림 대리님 아니세요?”
“아하하, 네. 안녕하세요.”
이거 진짜 귀찮네. 걸어오는 말을 무시할 수도 없고.
“이야, 역시 몸 좋으시구나. 그런데 무슨 음악 들으면서 운동하시는 건가요? 저는 운동할 때는 트위이스 노래 주로 듣는데.”
이거? 노래 아니거든. 중국어 회화거든.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은 운동을 할 때는 음악 대신 영어나 중국어, 일어 회화를 공부하면서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괜히 잘난 체 하는 느낌이다.
“그냥 가리지 않고 듣습니다. 전 운동을 좀 해야 해서······.”
“아, 예. 실례했습니다. 파이팅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나마 다행히 다들 말을 길게 끌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운동을 멈춰야 했다.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한동민의 호출이 왔다.
- 한상민 실장님께서 찾으신다. 빨리 가봐. 귀빈실 705호다.
한상민 실장? 그놈은 아까 얼굴 봤잖아. 할 얘기가 있으면 그때 할 것이지. 하여튼 사람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런데 언제 귀빈실로 갔대?
혼자서 한상민 실장을 찾아갔다.
연수원에는 귀빈들을 위해서 호텔급 객실도 몇 군데 마련되어있었는데, 한상민이 그곳에 있었다. 꼴에 중요인사라고 귀빈실 앞에 경호원도 한 명 세워놓았네.
그런데 귀빈실 문이 열리더니 엉뚱한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어, 권진아씨!”
“어머, 대리님!”
서유림도 당황했지만, 권진아가 더욱 크게 당황했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달싹했다. 하지만 옆에 서있는 경호원 때문에 말을 못하는 듯했다.
경호원도 서유림을 재촉했다.
“실장님이 기다리시잖아. 어서 들어가 봐.”
뭐야? 경호원이 실장님 손님한테 이렇게 막말해도 되는 거야?
권진아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결국 듣지 못했다. 권진아는 귀빈실에서 멀어지고 서유림은 귀빈실로 들어갔다.
귀빈실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저쪽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한상민의 개인비서로 보이는 자는 소파 옆에 서있었다.
그런데 비서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다.
어디에서 봤었지? 나중에 생각나겠지 뭐.
한상민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앉아있다.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 세상 편해보였다. 마치 ‘이 방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다 내 밑이다.’ 라고 거드름 피우는 느낌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한상민이 턱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서유림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소파가 너무 불편하다. 앉자마자 밑으로 푹 꺼져버린다.
한상민처럼 저렇게 몸을 완전히 묻어버리면 세상 편한 소파일 텐데 그렇게 앉을 수도 없고.
그냥 확 해버려? 그랬을 경우 한상민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다.
앉자마자 이런저런 잡생각부터 든다.
그런데 한상민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서유림의 잡생각을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엉뚱한 질문이었다.
“권진아씨하고는 언제부터 사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