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3)
“부탁? 뭔데?”
“전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요. 제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세요.”
“물론이지. 필요한 건 뭐든 한동민 대리한테 이야기해.”
한상민은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깟 지원금이 얼마나 들겠느냐 하는 식이었다.
어쨌건 잘됐다. 5억 원짜리 내기가 무산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번외 수입은 챙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럼 먼저 코치 비용으로 월 400만 원만 더 지원해주세요. 제가 토너먼트 우승하면 코치 비용을 월 600만 원으로 늘려주시고요.”
명진식품에서 월 100만 원씩 받고 있으니 총 500만 원이 될 것이다. 그러면 배복성 관장에게 100만 원, 도상국과 강종범에게 각각 200만 원씩 주면 적당하겠지.
“좋아. 그 정도는 지원해줘야지. 영수증만 잘 챙겨와.”
“알겠습니다.”
“서유림이는 그만 가서 일 봐.”
부장실을 나와서 다시 창고로 향했다.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려줘야겠지? 창고로 들어가자마자 먼저 도상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도상국이 무척 바쁜 듯했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는데 숨넘어갈 듯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게다가 목소리도 한껏 낮추어져있었다.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인 듯했다.
- 형님, 제가 이따가 전화 드릴게요.
서유림의 목소리조차도 덩달아 낮아질 정도였다.
“어? 그…… 그래.”
오늘만이 아니었다. 종종 전화를 걸곤 했는데, 이따금 이런 반응이 나왔다. 마치 숨어서 전화를 받는 듯했다.
이상하네. 낮에는 주로 막노동을 뛴다고 했는데. 막노동 뛰는 곳에서 전화를 이렇게 받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른 척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지.
자꾸만 깊이 파고들면 그만큼 인간적으로도 깊이 엮이게 될 것이다.
도상국은 아직은 조심하고 싶은 상대였다. 누명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고생 강간살인범이잖아. 그걸 잊으면 안 돼.
이번에는 강종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상국에게서 느꼈던 아쉬움을 강종범이 풀어주었다. 최대 200만 원까지 챙겨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마자 평범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기쁨에 넘치는 하이톤으로 치솟았다.
- 정말이야? 고마워. 하하.
그렇지. 이런 반응이 나와야지. 그래야 나도 기분이 좋고.
서유림도 덩달아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야간업소는 이제 안 나가도 되는 건가요?”
-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아. 거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적지 않거든. 대신 출근시간을 조절해볼게. 밤 열시까지는 그렇게 바쁘지 않거든.
그럼 하루 세 탕을 뛰겠다는 건가?
체력이 버틸 수 있으려나? 몸이 피곤하면 스텝 가르치는 것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텐데.
적당히 배워보다가 실망스럽다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지 뭐. 금액도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주면 되는 것이고.
막말로 내가 강종범 먹여 살리겠다고 이 짓 하는 건 아니잖아? 형님동생 부르는 사이라고 해도 아직은 그렇게까지 친한 것도 아니고.
그리 되면 강종범에게는 소탐대실이 되겠지.
어쩔 수 없다. 그것이 강종범의 선택이니.
“그럼 언제부터 시간 내실 수 있으세요?”
- 사무실에 전화해볼게. 가능하면 오늘부터 나가야지.
강종범과 통화를 마쳤다. 다시 도상국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통화하기 곤란한 상황일 것 같아서 말았다. 대신 문자로 소식을 알렸다.
[코칭비 월 200만 원까지 올릴 수 있게 되었어. 오늘 강종범 형님과 저녁이나 함께 먹자. 6시30분에 순대국집에서 봐.]
[네, 형님.]
문자로는 대답을 잘 해오네.
잠시 후, 강종범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 오늘부터 나갈게.
강종범이 돈이 궁하긴 궁한 모양이다. 서두르는 느낌이 역력하다.
“그럼 저녁이나 함께 먹죠. 여섯 시 반에 순대국집에서 봬요. 상국이도 그때 나올 겁니다.”
- 고마워, 동생.
강종범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덤벨을 들고 운동을 시작했다.
퇴근시간을 앞두고 사무실로 향했다. 배기열 팀장과 한동민 대리는 자리에 없었다.
“두 분은 회의 들어가셨습니다.”
서유림이 순간 움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영훈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알아서 보고하듯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표정은 또 뭐야? 꼬랑지 흔들며 주인 반기는 애완견의 모습이잖아.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선수라도 빼앗길까봐 얼른 냉장고로 가서 음료수를 꺼내와 건네준다.
“시원하게 한 병 드세요.”
이놈이 유통기한 지난 비타500이라도 먹었나?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사람 불안하게.
오영훈뿐만이 아니다. 강은영도 권진아도 강철중도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빛에 호감이 가득하다. 마치 눈빛으로 ‘우리 원래 이렇게 친한 사이였잖아요.’ 하고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권진아나 강철중이야 원래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강은영도 최근에 사이가 좋아졌다. 그러니 크게 어색하진 않다.
하지만 오영훈 이놈은 어색함이 너무 심한걸. 갑자기 왜 이래?
아! 알 것 같다.
유진그룹 총회장인 한유진과 독대한 것 때문에 그렇구나. 내가 회장님께 확실하게 눈도장 받아놓았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제부터 승승장구할 테니 미리 점수 좀 따놓겠다는 생각일 테고.
쯧쯧. 그러게 진즉부터 잘할 것이지. 그렇게 잠깐 아부 떤다고 그동안 깎인 점수가 만회가 되겠냐?
뭐, 그렇다고 매몰차게 걷어찰 수야 없지. 즐길 건 즐기자고. 이런 거 주고받았다고 영수증 끊어놓는 것도 아닌데 뭐.
“고마워요, 오영훈 주임님.”
그런데 오영훈이 쓸데없이 오버한다.
“강철중씨. 허리 아직 안 나았어? 서 대리님 언제까지 창고업무 시킬 거야?”
저 주둥이를 그냥 콱!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그래서 넌 안 된다는 거다.
“오영훈 주임님. 제가 전에 분명하게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석 달 동안은 제가 창고업무 책임진다고.”
“아, 그랬던가요? 맞다, 맞다. 강철중씨. 고맙게 생각하고 허리 빨리 완치하세요.”
이놈이 내 고등학교 동창이라니. 창피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출세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티가 나게 아부를 떨까? 그것도 하루아침에 태도를 돌변해서.
오영훈이 기회주의 아부꾼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다.
이런 아부를 좋다고 받아주는 한동민도 똑같은 놈일 테고.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배기열 팀장과 한동민 대리가 나란히 사무실로 들어왔다.
배기열 팀장이 다짜고짜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우리 구매팀에서 이번 체육행사에 추가로 차출된 사람이 있어.”
팀원들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해졌다.
체육행사 참여. 그거 무척 귀찮은 일이거든. 음성에 있는 본사 연수원까지 가야 해서 일단 참여하면 주말 하루를 꼬박 보내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온종일 뙤약볕에서 고생해야 하거든.
물론 일부 출세욕 높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서 오히려 기를 쓰고 참가하려고도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 직원은, 특히 직급도 낮고 특별히 잘하는 운동도 없는 평사원은 ‘제발 걸리지 말아다오.’ 기도를 할 정도로 기피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의무적인 참여 비율이 높지는 않았다. 그룹 차원의 체육행사이기 때문에 전체 직원의 20%도 채 되지 않았다.
명진식품은 계열사 중에서도 작은 기업에 속하기 때문에 참여 비율이 더욱 낮았다. 그래서 서유림도 아직까지 체육행사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서유림 대리는 무조건 참석이야.”
아 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하지만 마침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빠질 수 있다면 빠지는 게 상책 아니겠는가?
“MAN FC 대회까지 보름도 안 남았습니다. 지금부터는 부상관리 해야 해서 조심해야 하는데…….”
“빠져나갈 생각하지 마. 사장님께서 서 대리 이름을 콕 찍은 거니까. 참고로 경기는 참여하지 않아도 돼. 그냥 총회장님 눈도장만 찍고 오면 돼.”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겠다.
한마디로 명진식품을 대표해서 얼굴도장 찍으라는 거잖아.
어쩌겠는가? 명진식품에 몸담고 있는 이상은 이 한 몸 희생할 수밖에.
그런데 배기열 팀장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시선을 옮겨서 다른 팀원을 찍었다.
“권진아씨도 이번에 추가로 차출됐어.”
“예? 저도요?”
권진아가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 어깨를 움찔했다.
배기열 팀장이 피식 웃었다.
“권진아씨 자기소개서에 피구 잘 한다고 썼다며? 피구선수 한 명이 몸이 좋지 않아서 대체선수가 필요하대.”
“어머! 그거는…… 쓸게 없어서 그냥 쓴 건데…….”
풋!
팀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감정이 섞여있었다.
하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주의다.
한동민은 당연히 참여할 것이고, 거기에 서유림과 권진아까지 참여하면 구매팀에서만 참석자가 벌써 세 명이다.
그러면 팀장인 배기열조차도 열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안도의 웃음을 지을 수밖에.
한편으로는 권진아라는 인물 자체가 만드는 미소였다.
권진아가 비록 입사 때부터 명진식품의 퀸카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빼어난 미인은 아니다.
하지만 권진아에게는 권진아만의 매력이 있었다. 마치 보면 볼수록 숨겨져 있던 매력이 하나씩 튀어나오는 것처럼.
왜 그런 것 있잖아. 아무리 예뻐도 자꾸 보면 질리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평범한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자꾸만 예뻐지는 얼굴.
권진아가 딱 후자에 속했다.
외모도 예쁘지만 그보다는 표정이나 행동, 말투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러니 보면 볼수록 더 예뻐질 수밖에.
세상 여자를 연애하고 싶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로 나눈다면 권진아는 연애도 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훨씬 가까웠다.
어떤 남자가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축하한다. 당신은 복 받은 남자야.
아차! 벌써 퇴근 시간이 다 되었네!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퇴근하자마자 순대국밥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강종범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런데 약속시각이 되어도 도상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연락도 없이 늦을 친구가 아닌데.”
조금 더 기다려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미 약속시각을 10분이나 넘겼는데 모습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원래 자주 늦는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시간관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라서 의아함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기다리다 못한 서유림이 전화를 걸어보려는데 마침 도상국이 순대국밥집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휴우, 제가 조금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냐, 평소에 안 늦던 친구가 늦으니까 조금 걱정됐던 것뿐이야.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별일 아닙니다.”
서유림의 물음에 도상국이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일부러 숨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강종국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도상국을 바라보는 눈빛에 약간의 근심이 섞여있었다.
“꼬리라도 밟은 거야?”
“아주 조금은요. 잘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야?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알면 안 되는 이야기고?
굳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캐묻기도 그렇고.
서유림은 궁금해서 입술이 달싹달싹 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강종범이 조금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거 하지 말라니까. 너무 위험해.”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입니다. 그냥 아무 말씀 마세요.”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지. 경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놈이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거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