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2)
“예? 수작이라뇨? 뭐가요?”
“왜 있지도 않은 말로 날 포장해주는 거야?”
아! 그것 때문에 따로 부른 거였어?
그런데 정말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바보냐? 그 자리에서 널 흉보게. 너희는 한 핏줄이잖아. 나는 남남이고.
한유진이 한동민의 여성편력을 나무라긴 했지만, 그건 진짜로 나무란 게 아니다. 오히려 한동민의 건강을 걱정해준 것이다.
왜? 아무리 못나고 미워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이 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그런 게 없다면 얼굴이 상하건 말건, 몸이 병나건 말건 무슨 관심을 두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한동민을 고자질하라고? 비난하라고?
그건 자살행위다. 제아무리 큰 잘못을 고자질한다고 해도 피로 연결된 가족인 이상 ‘왜 그랬어?’ 한 마디로 끝날 것이다.
반면 고자질한 사람은?
‘감히 내 가족을 욕보여?’
괘씸죄로 바로 아웃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어?
가족 이야기를 할 때에는 무조건 칭찬해줘야 한다. 잘했다, 훌륭하다, 존경스럽다 하는 식으로 좋은 말만 해줘야 하지.
한동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한동민을 1만 원어치 칭찬 해주면 내가 얻는 좋은 이미지는 10만 원어치도 넘을 테니까.
그건 아주 기본적인 세상 이치잖아.
물론 이런 일을 계기로 한동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넘어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볼 필요는 있다.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서유림이 활짝 웃어주었다.
“우리 구매팀은 가족이잖아요. 대리님은 우리 가족의 가장이나 마찬가지시고. 가장의 권위가 서야 가족도 어깨에 힘 좀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동민은 여전히 의심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서유림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겠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유림이 한동민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대리니~임. 저 좀 그만 미워하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그러자 한동민이 피식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이어지는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좋았어. 내가 서유림 대리의 마음을 알았으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어? 뭐야? 이건 ‘넌 이제부터 내 라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
설마 나한테 넘어온 거야?
뭐가 이렇게 쉬워? 이놈, 단순하기가 아메바 급이네!
“감사합니다, 대리님!”
“그럼 수고해.”
한동민이 아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창고로 향하는 서유림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다시 덤벨을 잡고 운동을 시작했다. 요즘 주로 하는 운동은 동영상을 보며 강종범의 스텝을 따라하는 훈련이었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법이다.
도상국의 말만 들었을 때에는 강종범이 발차기 분야에서 엄청난 고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종범의 발차기는 그렇게까지 위력적이지 못했다. 발차기만 놓고 보면 도상국이 두세 수 위였다. 파워를 떠나서 기술적인 면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도상국은 강종범을 스승이라며 추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도상국의 발차기가 강종범의 스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스텝뿐만이 아니었다. 강종범은 코치로서 굉장한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강종범은 원래 복싱 선수였다. 그러다가 킥복싱 선수로 전환했고, 다시 입식격투기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선수로서 빛은 보지 못했다. 펀치력과 맷집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빠른 스피드와 현란한 스텝, 물 흐르는 듯한 위빙으로 버텨나가곤 했지만, 그나마도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인 문제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익혔던 현란한 스텝과 위빙이 강종법의 주특기였다.
그것을 도상국에게 가르쳐주었고, 도상국이 자신의 특기인 발차기에 스텝을 멋지게 접목시키면서 지금의 기술을 얻게 된 것이다.
서유림 역시 강종범의 스텝과 위빙이 너무도 탐났다. 두 가지만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면 가드를 올리지 않아도 상대방의 주먹을 모두 피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법.
일단은 스텝부터 익히고 그 다음 위빙을 배우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이렇게······.’
서유림은 강종범의 스텝을 그대로 따라 해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스텝이었다. 순간순간 상황에 맞게 변칙적으로 밟은 스텝이니까.
하지만 일단은 따라 해봐야 그 느낌을 알 수 있고, 그래야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일단은 똑같이 따라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호출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한상민 실장의 호출이란다.
역시 윗대가리에 있는 놈들은 효율성을 모른다니까. 아까 불렀을 때 한꺼번에 말했으면 좀 좋아?
그래도 조만간 MAN FC의 주인이 될 사람 아닌가? 부른다고 하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한상민은 VIP 휴게실에 있었다. 한동민도 호출 당했는지 벌써 와있었다.
“이리 와 앉아.”
한상민이 자리를 정해주었다. 황송하게도 한동민과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긴, 겨우 세 명뿐인데 이렇게 오순도순 앉는 게 낫겠지.
그런데 소파가 너무 푹신해서 오히려 불편하다. 한상민이나 한동민이야 편안하게 몸을 묻고 앉을 수 있겠지만, 나까지 그럴 수는 없잖아?
조금은 긴장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히려 몸이 묻히다 보니 바른 자세를 취하기가 더 어렵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MAN FC는 이미 내가 넘겨받았어. 대외 발표는 며칠 후에 있을 42대회서 있을 거고.”
42회 대회란 11월 대회를 말하는 것이다.
“서유림. 알고 있겠지만, 네 홍보에 제법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 그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다. 흥행 때문이잖아.
“격투기 대회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스타가 필요해. 특히 기존의 스타를 위협하는 새로운 스타가 나타나야 하지. 네가 그런 스타가 되어라.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이겨.”
이기라고 한다고 이길 수 있다면 누구나 다 챔피언이 되게?
물론 난 이기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리고 11월부터 시작될 토너먼트 대회에도 참여해라. 네 실력으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진표를 잘 조절하면 준결승까지는 진출할 수 있을 거다. 특히 중국과 일본 시장을 겨냥한 대회니까 중국어와 일본어 공부도 조금 해놓고.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순간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진표를 조작해?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어차피 토너먼트 출전을 계획하고 있었고, 목표 역시 우승으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진표 조작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하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괜히 나대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까.
이럴 때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동민이가 옆에서 확실하게 지원해주고. 너도 조만간 MAN FC에서 한자리 해야지.”
“예, 실장님.”
확실하게 지원해줘?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유림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크로스 카운터 타이밍을 가르쳐준 배복성.
기습적인 발차기를 전수해주고 있는 도상국.
현란한 스텝을 가르쳐주는 강종범.
서유림의 격투기는 그 세 사람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물론 요정 아리아나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인간계의 존재가 아니니까 논외로 하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그들에게 적당한 보상은 했다.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고.
그들도 보상에 불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서유림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야 할까? 조금 더 많이 주고 조금 더 많이 받고 싶었다.
특히 강종범이 그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땅한 직장을 잡을 수가 없어서 룸살롱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룸살롱이 빠릿빠릿한 청년이 아닌 강종범 같은 중년인을 채용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그의 싸움실력 때문이다. 즉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폭력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들 보기에도 창피하다고 하고.
그래서 시간만 나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한상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종범을 정식 코치로 채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서유림이 이때다 싶어서 끼어들었다.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제가 원하는 코치를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이번 42대회는 물론이고 토너먼트에서도 우승해 보이겠습니다.”
한상민이 서유림을 조금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우승? 이 자식이 건방지게······. 오냐오냐 해줬더니 주제를 몰라? 인마, 내가 네 각오나 듣자고 부른 건줄 알아?”
“그래. 이번에는 서유림씨가 실수했어. 책임지지 못할 말은 쉽게 하는 게 아냐.”
한동민도 얼른 서유림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런데 한동민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 톡톡 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이제 서유림은 자신의 라인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거지.
아까 총회장님 앞에서의 일 때문이다. 서유림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에 불과한데, 엉뚱한 곳에서 파급효과가 있네.
그래.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데 왜 책임지지 못할 말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토너먼트 우승하는 건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서유림이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한상민을 바라보았다. 한상민의 눈빛이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서유림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럼 저와 또 내기 해보시겠습니까? 제가 토너먼트 우승하는지 못 하는지? 이번에는 통 크게 5억 원 정도 어떻습니까?”
저것 봐. 왜 움찔하는데? 토너먼트 우승은 건방진 이야기라며? 주제파악도 못한 이야기라며?
그러면 내기 해봐. 왜 망설여?
“5억 원이 좀 부담스러우시면 1억 원만 하시던가요.”
“서유림씨!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한동민이 깜짝 놀라서 서유림을 나무랐다.
그런데 한상민이 손을 들어서 그런 한동민을 만류했다. 그리고는 서유림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너······ 사람의 신체부위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딘지 알아?”
답이 빤한 걸 묻는군. 설마하니 주먹이나 발이 답은 아닐 테고.
분위기상 ‘세치 혀’가 정답이겠군.
그렇다고 답을 말하지는 않았다. 한상민도 정답을 맞혀보라고 물은 건 아닐 테니까.
“바로 세치 혀야. 사람이 주먹 잘못 놀리면 끽해야 어디 부러지고 말지만, 세치 혀를 잘못 놀리면 자칫 인생 쫑 나는 수가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서유림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한상민이 뒷말이 궁금하다는 듯 서유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와 5억 원 내기 하시죠. 그러면 제가 책임지고 실장님이 원하시는 MAN FC의 스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깟 5억 원 날리셔도 전혀 아깝지 않으실 텐데요.”
말투가 조금 건방졌나?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주먹이 운다.’가 끝난 직후의 면담에서 당돌하고 건방진 꼴통 이미지를 충분히 주었으니까.
그래서 사람은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착한 이미지가 굳은 사람은 작은 잘못에도 큰 비난을 받는다.
‘저놈이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나를 무시해서 저러는 거다.’ 또는 ‘그동안 착한 척을 한 것뿐이지 알고 보면 음흉한 놈이라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대로 처음부터 건방진 꼴통 이미지를 가진 놈은 조금 건방지고 꼴통 짓을 해도 무난하게 넘어간다. ‘쟤는 원래 그런 놈이잖아.’ 하는 식으로.
한상민도 더는 건방지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분은 전혀 관심도 없는 듯했다.
한상민의 관심은 ‘MAN FC의 스타’였다.
“지금 한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막말로 제가 감히 대표님께 농담 따먹기 할 군번은 아니지 않습니까? 배운 것 없이 무식하긴 하지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인생 쫑 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려니 조금 힘드네.
막말로 인생이 왜 쫑나는데? 네가 돈 많은 집 자식이라는 점 빼고 나보다 잘난 점이 뭔데? 계급장 떼고 붙으면 바짓단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놈이.
물론 요즘 시대는 돈이 곧 권력이고 힘이고 능력이긴 하지만.
“좋아! 만약 네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우승상금 외에 별도로 1억 원을 보너스로 주도록 하지. 하지만 만약 우승하지 못하면······ 그땐 알지?”
뭐야? 왜 5억 원이 아니고 1억 원인데?
이거 완전히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다. 내가 우승해서 MAN FC의 스타가 되면 MAN FC의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그로 인한 추가수입은 십억 원도 넘을 텐데.
한상민 이놈, 배포가 좀 큰 줄 알았더니 좀생이였네! 실망이다!
두고 봐라. 오늘 크게 쏘지 못한 걸 후회할 날이 올 테니까.
그래도 1억 원이라도 챙겼으니 다행이다.
물론 뽑아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뽑아먹어야지. 기회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이다.
서유림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땐 제가 1억 원을 드리죠.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