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67화 (67/196)

# 67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다. (1)

“아, 그랬지! 나도 TV로 봤어. 그 친구가 여기 명진식품 다닌다고 했지?”

한명진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회장님. 제 아들놈이 팀장으로 있는 구매팀에 다니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동민이 그놈도 본지가 꽤 오래 됐군. 함께 불러봐.”

한명진이 얼른 인터폰을 눌렀다.

“아, 씨발. 몸이 대체 왜 이러냐?”

한동민이 연신 몸을 꼼지락댔다. 체력이 바닥을 친 것도 모자라서 땅속을 파고들 듯 떨어지니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은 시리듯 아프고, 귓속에서는 계속해서 위잉- 하는 이명이 들리고, 어깨도 결리고, 무릎도 쑤시고······.

차라리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빠르겠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사우나 가서 휴식을 취했겠지만, 오늘은 한유진 총회장님까지 오신 날이라서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

게다가 언제 호출될지 몰라서 바짝 긴장까지 하고 있으니 오늘따라 느껴지는 피로도가 평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갑작스럽게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도 짜증이 폭발한다.

디리리-

“깜짝이야! 씨발, 누구야?”

하지만 짜증도 잠시다. 인터폰에 대표이사 한명진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한명진은 지금 한유진과 함께 있다. 즉 총회장님의 호출인 것이다.

어쩌면 한유진이 직접 인터폰을 걸어왔을 지도 모른다.

“다들 조용히 해!”

큰 소리로 팀원들을 눌러놓고 얼른 인터폰을 들었다.

“예, 구매팀 대리 한동민입니다.”

- 지금 당장 서유림과 함께 올라와.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급히 강철중에게 지시했다.

“서유림 대리 빨리 튀어오라고 해. 아니, 시간 없다. 곧장 사장실로 오라고 해. 얼른!”

한유진 회장님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 한명진의 성격도 불같다고 하지만, 한유진과 비교한다면 태양 앞의 촛불일 뿐이었다.

성격만 잘 맞추면 그보다 좋은 사람이 없지만, 기다리는 느낌이 들게 하거나 뭔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사촌동생은 물론이고 아들조차도 가차 없었다.

하물며 5촌 관계인 한동민이겠는가?

‘오늘만 무사히 넘어가자. 제발.’

한동민이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회사 통계자료를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언제 어떤 돌발질문을 해올지 모르니 제품별 판매량부터 매출액, 순이익 등의 통계를 머릿속에 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총회장님이 한국에는 갑자기 어쩐 일이지?’

한유진은 1년 중 6개월 이상을 일본에서 거주한다. 중국에서도 3개월가량 거주하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은 겨우 2개월 남짓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중국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일명 얼나이라고 불리는 여러 명의 첩들 때문일 것이고.

그러고 보면 한유진은 체력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었다. 나이가 70에 가까운데도 젊고 파릇파릇한 얼나이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우리 총회장님처럼 살아야 해.’

한동민이 한유진을 부러워하며 사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서유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옷에 땀자국이 가득했다. 틀림없이 땀 냄새를 풀풀 풍길 것이다.

‘한 소리 듣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상관없다. 설마하니 서유림의 땀 냄새 때문에 한동민을 나무라지는 않을 테니까.

“들어가자.”

“예.”

문을 열고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들어갔다. 한유진 회장을 향해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래 오랜만이다. 이리 와서 앉아. 오랜만에 손 좀 잡아보자.”

한유진이 마치 친아들이라도 대하듯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직접 옆자리까지 내어주었다.

이럴 땐 절대 빼서는 안 된다.

한동민이 얼른 한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한유진의 표정이 이상하다. 한동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이상한 오물이라도 발견한 표정이다.

“동민아. 너 꼴이 왜 그러냐?”

“예? 제가 왜······?”

“왜 이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이야? 어디 아프냐?”

“아! 아닙니다. 그냥 좀 피곤해서······ 요즘 업무가 좀 많습니다.”

한동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한유진이 갑자기 노한 표정을 하며 딱! 소리가 날 정도로 한동민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한동민의 아버지 한명진이 옆에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놈이 어디서 구라를 쳐? 너 요즘도 얼나이들 치마속이나 들추고 다니는 거냐? 그 버릇 아직도 못 끊었어?”

한동민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요즘······.”

말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었다. 한유진이 듣기 싫다는 듯 다시 한동민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놈이 또 구라치네. 인마! 개가 똥을 끊어? 내가 널 몰라?”

한동민은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몸이 이렇게 엉망인데 어떻게 여자를 품겠는가? 여자 살맛을 본 지가 두 달도 넘은 듯했다.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그놈이 세워지지도 않는데 뭘 어쩌겠는가? 기껏 세워놓아도 거사만 치르려고 하면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버리니.

하지만 아무리 하소연해도 한유진 회장이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앞으로 당분간은 여자 근처에도 가지 마. 알겠어?”

“알겠습니다, 회장님.”

한동민이 움찔하며 아버지 한명진을 흘끔 바라보았다.

한명진 역시 한동민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몸 상태가 된 것이 여자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아! 억울해, 억울해!’

그러는 사이 한유진이 서유림에게 관심을 두었다.

“저 친구가 아까 말했던 그 친구인가?”

“안녕하십니까. 구매팀 서유림입니다.”

서유림이 적당한 시점에 다시 허리를 굽혔다. 무척이나 절도 있고 예의바른 인사법이었다.

“인물이 훤하네. 몸도 좋아 보이고. 맡은 업무가 뭔가?”

“적정단가산출 업무와 창고 물품관리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창고에서 일하다가 왔나 보지?”

한유진이 서유림의 옷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땀이 가득했다. 30kg짜리 덤벨을 들고 죽어라고 운동하다 보니 옷은 늘 이렇게 변했다.

“예, 회장님. 씻고 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난 그런 모습을 더 좋아해. 남자는 자고로 저렇게 몸으로 부딪치며 일해야지. 안 그래, 한 대표?”

“물론입니다, 회장님. 저 친구가 우리 명진식품의 보물입니다. 하하.”

“그렇군. 그렇게 서있지 말고 자네도 저리 가서 앉아.”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이런 불편한 자리는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는 일이고.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소파 끝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대충 얘기는 들었네. 격투기 시작한지 몇 달 안 됐다고?”

“이제 넉 달쯤 됐습니다.”

“드디어 몰랐던 잠재력을 터뜨렸다면서?”

한상민 실장이 내 이야기를 제법 많이 한 모양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한 거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 참 재미있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격투기는커녕 운동도 제대로 안 해봤다는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했다? 무슨 계기라도 있었나?”

그 말을 묻는데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지? 마치 ‘거짓말만 해봐라.’ 하며 추궁하고 있는 듯하다.

한유진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괜히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다.

근데 갑자기 물으니 답이 궁하다. 뭐라고 얼버무려야 하지?

그러다가 문득 한동민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시초가 한동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좋은 핑계거리가 생각났다. 이 모든 일을 한동민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사실 한동민 대리가 제 잠재력을 알아보고 발굴해주었습니다.”

“응? 우리 동민이가?”

한유진이 뜻밖이라는 듯 한동민을 바라보았다.

한명진과 한상민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한동민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실을 말하라고 추궁하듯이.

하지만 그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한동민이었다. 어깨를 움찔할 정도로 놀라며 크게 떠진 눈으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내가 멍석 깔아줬잖아. 춤까지 대신 춰주랴? 그건 네가 알아서 춰야지.

그런데 한동민 표정을 보니 이것이 춤판인지 살얼음판인지 구분을 못 하는 듯했다. 저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해서야 나중에 어찌 기업을 이끄나?

아무래도 슬쩍 등을 떠밀어줘야 할 것 같다.

“한동민 대리는 팀원들을 가족처럼 대해줍니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관찰하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저의 재능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느닷없이 ‘주먹이 운다.’에 도전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네가 시킨 거였냐?”

한유진이 다시 한동민에게 물었다.

한유진은 휘발유 같은 사람이었다. 질문을 던졌는데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당장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한동민이었다. 어물쩍거리다가는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게다가 한유진의 표정을 보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마치 ‘기특한 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분위기를 맞춰줘야 한다. 서유림이 왜 갑자기 자신을 띄워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몸은 조금 약하지만 운동신경이 무척 좋더라고요. 그래서 농담 반 해본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어쭈! 겸손도 떨 줄 알고. 제법이네!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더 띄워주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서유림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냥 발굴만 해준 게 아닙니다. 개발도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마음껏 운동할 수 있도록 1년 치 체육관비도 대주고, 일찍 퇴근해서 운동할 수 있도록 여건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랬어? 그놈 참 재주도 좋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인재에게 투자할 줄도 알고. 우리처럼 기업하는 사람한테는 그게 제일 큰 재산이지. 안 그래, 한 대표?”

한명진은 그냥 웃기만 했다. 아들 자랑한답시고 너무 띄워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이럴 땐 그저 조용히 있는 게 최고다.

한동민도 겸손을 떨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부끄럽습니다, 회장님.”

한동민이 저러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세상 좋은 사람 같잖아.

다른 건 몰라도 윗사람 기분 맞춰주는 능력은 인정해주마.

한유진이 대충의 궁금증을 해소한 모양이다. 다시 한명진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한 대표는 내가 한국에 왜 왔는지 알지?”

“사흘 후에 있을 체육행사 때문 아닙니까?”

한유진은 다른 건 몰라도 그룹 차원의 체육행사에는 꼭 참여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직원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것도 있고, 또 이번에 이놈이 MAN FC인가 뭔가 하는 걸 인수했잖아. 그것 때문에도 왔고. 동민이가 격투기를 제법 안다고 해서 한자리 맡겨볼까 했는데······.”

한유진이 다시 한동민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동민의 거무튀튀해진 얼굴을 볼 때마다 한심해 죽겠는 모양이다.

칭찬할 건 칭찬할 거고, 한심한 것은 한심한 것이니까.

“저 꼴로 MAN FC 일에 나서면 모양이 우습겠어.”

“최대한 빨리 회복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됐어, 인마. 그런 얘기는 몸을 회복한 후에 하는 거야. 나는 나중에 뭐뭐 하겠다는 놈의 말은 절대 안 믿어. 내 성격 몰라? 난 무조건 현장박치기야.”

한유진이 듣기 싫다는 듯 한동민의 말을 끊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밖으로 내쫓기까지 했다.

“너희는 그만 나가봐. 이러고 있을 시간에 일해야지.”

“예,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한동민이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서유림이 한동민을 뒤따랐다.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한동민이 서유림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유림 대리, 잠깐 나 좀 봅시다.”

어쩐 일이야? 그렇게 인색하던 대리라는 호칭도 불러주고. 거기에 존댓말까지 써주고.

서유림이 웃음을 감추며 따라나섰다.

사장실에서 조금 멀어지자 한동민이 서유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

“서유림 대리. 무슨 수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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