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66화 (66/196)

# 66

새로운 스승 (4)

“복싱…… 이라고요?”

그 부분은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복싱이건 종합격투기건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단지 TV에서 종합격투기를 이따금 보는 시청자의 입장이었으니까.

그러다가 한동민 덕분에 ‘주먹이 운다.’에 출전한 것뿐이다.

“돈이 목적이라면 복싱이 훨씬 나을 겁니다.”

“그래요?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메이웨더나 파퀴아오 못 들어보셨어요? 특히 메이웨더는 파퀴아오와의 경기에서 무려 2억5천만 달러를 받은 적도 있잖아요. 우리나라 돈으로 2천5백억 원이 훨씬 넘어요.”

서유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 사이에 벌어진 세기의 대결. 그런데 대전료가 그렇게나 많았다니.

UFC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차원이 다른 수준인 것 같았다.

“제가 복싱을 그만둔 지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은 있어요. 서유림씨 정도 재능이면 세계챔피언 노려볼 만도 하겠는데요. 물론 조금 늦은 나이이긴 하지만, 재능이 너무 아까워요. 저라면 무조건 복싱 합니다.”

갑자기 복싱 쪽으로 관심이 확 간다.

사실 복싱이건 종합격투기건 상관없다. 어차피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니까.

그리고 실력도 자신 있었다. 누구와 싸운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복싱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서유림이 듣기에는 복싱선수도 ‘배고픈 직업’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많은 대전료를 받고 경기할 수 있죠?”

“당연히 인지도가 높아야 하겠죠. 그러면 프로모터가 돈 되는 경기를 추진해주는 거죠.”

“그럼 인지도가 없으면 복싱도 돈이 안 되겠군요.”

“물론이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종합격투기를 하건 복싱을 하건 연예인을 하건 인지도 싸움인 것이다. 인지도만 높으면 뭘 해도 돈이 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인지도를 빠르게 올리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 복싱으로 뛰어들면 유명한 사람들과 대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워낙 인지도가 낮으니.

“그럼 UFC에 진출해서 챔피언 한번 되면, 복싱으로 전환해서 돈 되는 경기를 할 수 있을까요?”

강종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조금 황당한 이야기이긴 하겠지. 겨우 아마추어 대회에 불과한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 한 번 했다고 UFC 챔피언을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쉽게 말하니.

하지만 강종범은 진중한 사람이었다. ‘꿈도 야무지다.’는 식의 말을 할 법도 한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답을 주었다.

“그렇긴 하겠죠.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겠습니까? 복싱으로 유명해지는 것보다 UFC 챔피언 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거야 해보면 알 일이고.

서유림은 앞날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일단은 MAN FC 토너먼트에서 우승한다.

그러면 그것만으로 MAN FC와의 7경기 계약은 끝날 것이다. 토너먼트 정식 경기가 64강부터 치러지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6경기가 소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곧바로 UFC와 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여름 쯤 되겠지.

UFC와의 계약도 비슷한 방식으로 할 것이다. 그러면 1년 안에 인지도를 높이고 복싱으로 전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 그거지?

그러자면 강종범의 저 현란한 스텝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호랑이 등에 날개 단 격이 되겠지.

서유림이 강종범의 손을 와락 잡았다.

“형님. 혹시…… 제 코치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강종범이 당장 곤란한 표정을 했다.

“하하, 제가 무슨 실력이 있어서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한 사람을 가르칩니까? 절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의 스텝과 위빙은 제가 만난 분들 중에서 단연 이거에요, 이거!”

도상국이 얼른 끼어들었다.

오! 스텝에 위빙까지 훌륭했어? 그럼 더욱 잡아야지.

서유림이 강종범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제가 비록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은 했지만, 사실 격투기 시작한지 겨우 넉 달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잠깐씩이라도 좋으니 코치 좀 해주십시오.”

“넉 달 밖에 안 되었다고요?”

강종범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서유림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궁한지 더욱 확실히 알겠지?

서유림이 다시 부탁했다.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강종범은 여전히 망설였다.

“사실…… 제가 밤낮으로 계속 일을 해서 주기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별 문제가 아니다. 옆에 딱 붙어서 가르쳐달라는 게 아니니까.

“아무 때건 시간 나실 때 봐주시면 됩니다. 오늘처럼 핵심만 콕콕 찔러주시면 제가 나름대로 고민해보겠습니다. 보수는 시간당으로 계산해드리고요”

보수 이야기 덕분인지 강종범이 비로소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그럼 일요일과 월요일 저녁에 한두 시간씩 봐드리겠습니다. 그때라면 제가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주 일요일부터 강성체육관으로 나와 주세요. 물론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에 나오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놓으세요. 제가 열 살도 넘게 어립니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될까? 하하. 그나저나 시간이 많이 흘렀네. 난 이만 가볼게. 저녁 먹고 또 출근해야 해서…….”

그럴 수야 없지.

“저녁은 저희와 함께 드시고 가시죠. 혹시 순대 드세요?”

“에이, 봐준 것도 없는데 어떻게 얻어먹어?”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혹시 순대 좋아하세요. 가까운 곳에 괜찮은 순대집이 있는데.”

“좋아하지. 나는 음식 안 가려.”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그럴 줄 알고 미리 식당을 알아봐두었다. 비록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지만, 바쁜 도상국을 위해서 미리 전화주문을 해놓았다.

덕분에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순대전골이 나왔다.

반주로 소주도 한잔 곁들였다.

도상국도 강종범도 애주가라서 소주가 나오자 서둘러 잔을 채웠다.

그러다가 문득 강종범의 휴대폰 메인화면을 보았다.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아드님이세요?”

서유림이 툭 물었다. 그러자 강종범이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들어서 서유림에게 보여주었다.

“고3입니다. 절 닮아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요. 그래도 성격은 절 닮지 않아서 순한 편입니다.”

강종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부모님이 서유림을 바라볼 때 짓던 그 미소와 똑같은 온도의 미소였다.

저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밤낮으로 일하며 돈을 버는 거겠지.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런데 어쩌다가……? 상국이한테 얼핏 듣기로는 억울한 사연이 있으셨다고 하던데…… 자세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해서요.”

강종범이 속상했는지 소주를 시원하게 털어 넣었다.

“재수가 없었죠. 급발진 사고로 학생을 쳤거든요. 그것도 우리 아들 같은 반 학생.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데 크게 다쳤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런데 그것 때문에 교도소에서 3년이나 살았다고? 그건 너무 과한 처벌 아닌가?

“그런데 하필 그 친구가 우리 아들과 소문난 앙숙 관계였어요. 그날도 학교에서 대판 주먹다짐을 했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결국 제가 화풀이를 위해서 고의로 쳤다고…….”

맙소사. 그게 말이 돼?

아무리 정신 나간 부모라고 해도 단지 화풀이를 위해서 학생을 자동차로 밀어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억울하시겠습니다.”

“억울하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 같이 힘없고 빽 없는 놈이 무슨 수로 힘 있는 사람을 이겨요? 자동차 회사는 차량은 문제없다고 하고, 있는 집 사람도 고의라고 주장하니 제 말은 씨도 안 먹히더라고요.”

서유림이 생각해봐도 막막했다. 만약 서유림이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당장 자동차 회사를 찾아가서 뒤집어엎었을 것이다. 아니면 경찰 멱살이라도 잡고 따지던가.

“그래도 상국이 사연보다는 덜 억울하죠. 저야 그런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상국이는 아예 대놓고 함정에 빠진 꼴이 되었으니.”

함정?

순간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건 억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잖아.

서유림이 기회다 싶어서 도상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씀은 안 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아, 그랬지. 미안. 하하.”

이런! 다시 분위기가 흐지부지해졌네.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면 안 되나? 그런다고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억울함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긴, 내가 그만큼 도상국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지 못했지. 정 붙이지 않으려고 오히려 일부러 거리를 두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당사자도 아닌 내가 왜 난리야?

강종범과 헤어지고 곧장 강성체육관으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강종범의 코치 비용과 관련한 생각뿐이었다. 그리 큰돈이 아니기 때문에 서유림의 호주머니에서 나가도 되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송민호 관장이 체육관에 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얼른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반겼다.

“서유림씨 왔어? 참 열심히 한단 말이야. 저러니 나한테 배우고 한 달 만에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할 수 있지. 하하.”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이다.

혼잣말도 아니고 서유림에게 하는 말도 아니다.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는 다른 관원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강성체육관이 이만큼 좋은 체육관이라고 홍보하는 거지.

상관없다. 그러라고 강성체육관 이름을 유니폼에 새기고 경기에 뛰어준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에도 사후관리라는 게 필요한 거란다.

알지? 우리의 계약관계는 이미 끝났다는 것.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체육관을 옮길 수 있는 놈이라고.

뭔가를 흥정할 때 그게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모른단다.

서유림이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관장님. 저 코치 한 명만 붙여주세요.”

“웬 코치?”

그럴 줄 알았다. 표정이 대번에 달라지네. 이제부터는 앓는 소리를 하겠지. 경기가 안 좋다느니 하는 식으로.

하지만 해줄 수밖에 없을걸.

“강종범 코치라고 스텝 전문가가 한 명 있습니다. 한 달에 70만 원만 투자해주세요.”

“아…… 그건 조금 곤란한데. 알겠지만 이미 코치가 많아서…….”

송민호 관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서유림이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하면서 강성체육관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더는 수강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체육관이 붐볐다.

즉 새로운 코치 한 명을 영입한다고 수강생을 더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다 그거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서유림이 곧바로 히든카드를 꺼냈다. 송민호 관장에게는 이거 한 방이면 끝이거든.

“알겠습니다. 그러면 체육관을 옮기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뭐…… 뭐라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지. 내가 강성체육관과 계약된 것도 아닌데 체육관을 왜 못 옮겨?

“강종범 코치님께 꼭 배우고 싶어서요. 그러니 강 코치님을 채용해주는 체육관으로 옮겨야죠.”

송민호가 ‘앗 뜨거!’ 하는 표정을 했다. 서유림이 체육관을 옮긴다면 많은 관원들도 함께 우르르 체육관을 옮길 테니까.

그 돈이 얼마인데.

“아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우리 체육관에도 도움이 되겠지.”

싱겁기는. 그렇게 쉽게 굽힐 거였으면서.

곧바로 강종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 70만 원이라는 이야기에 강종범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일주일에 많아야 6시간 일할 것이니 시간당 3만 원 정도 받는 셈이었다.

전화기에 대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도상국도 오랜만에 표정이 밝았다.

그래서인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뛰어오는 발걸음이 무척 홀가분했다.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 일찍 강성체육관에서 아침운동하고, 정시에 명진식품에 출근했다.

그런데 오전부터 명진식품에 비상이 걸렸다. 모든 직원들이 출근하자마자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유진 회장님께서 지금 오고 계신대.”

한유진 회장? 국내 10대 재벌그룹인 유진그룹의 총회장 말인가?

그렇다면 비상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기습적인 방문인데다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첫 행보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한유진 회장만의 스타일이었다. 본사 계열사 가리지 않고 사전연락 없이 시찰하듯 방문하는 것.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만 그 회사의 정확한 실태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래야 모든 계열사가 ‘회장님께서 언제 방문하실지 몰라.’ 하는 식으로 늘 긴장할 수 있을 테니까.

당연히 아들 한상민도 한유진과 동행했다.

한유진은 명진식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공장, 창고, 사무실에 화장실까지. 마치 HACCP 인증심사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 명진식품 대표 한명진조차도 쩔쩔맬 수밖에. 그 뒤를 졸졸 뒤따르는 명진식품 핵심 간부들은 똥줄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행히 별다른 지적은 없었다. 한유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들 하고 있네. 한 대표가 고생이 많아.”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명진이 비로소 진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겨우 사촌형일 뿐인데 왜 이렇게 대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비로소 간략한 브리핑을 받고 핵심 간부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제야 한상민이 입을 열었다. 비록 아버지이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절대로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회장님, 혹시 ‘주먹이 운다.’ 우승자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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