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새로운 스승 (3)
“교도소에서 만난 형님입니다. 특수폭행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얘기 들어보니까 저만큼이나 사연이 억울하시더라고요. 정말 좋은 분인데.”
응? 저만큼이나 억울한 사연?
서유림은 그 한 마디로 도상국의 사연을 어렴풋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상국은 그것에 대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꾸만 도상국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주장일 뿐이다. 100%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은연중에 흘리듯 나온 말이라서 그런지 괜히 믿음이 갔다.
혹시 ‘형님’이라는 사연을 묻다 보면 도상국의 사연도 은연중에 튀어나오지 않을까? 슬쩍 도상국의 넋두리를 유도해보았다.
“어떤 사연인데?”
“예? 아닙니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저도 그렇고 그 형님도 그렇고, 없는 자리에서 자기 얘기 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해요.”
이런, 말을 슬쩍 피하네. 저렇게 원천봉쇄해버리면 캐물을 길이 없잖아.
하지만 싫다는 사람 붙잡고 계속 캐묻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억울한 사연’이 밝혀졌다고 해서 내가 그 억울함을 풀어줄 것도 아닌데.
괜히 오지랖 떨지 말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리고 발차기 스승은 도상국 하나면 충분했다. 실력이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도상국을 버리고 새 코치로 바꿀 수도 없잖아.
“그랬구나.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 * *
‘주먹이 운다.’가 끝나고 벌써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TV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주먹이 운다. 시즌 4’가 시작되어서 본선이 치러지고 있었다.
사람의 일은 역시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지루하기만 하던 삶에 갑자기 예상치도 못했던 격랑의 파도가 밀려올 수도 있고, 반대로 엄청난 쓰나미를 겪은 것 같은데 막상 지나고 나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서유림이 그랬다.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만 하면 삶이 크게 바뀔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케이블TV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지도가 높은 프로그램에서 우승자가 되지 않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뀔 지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삶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제 같은 어제였고, 어제 같은 오늘이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마찬가지겠지.
새벽같이 일어나서 운동하고, 출근부터 퇴근까지는 창고에서 운동 겸 일하고, 퇴근하면 다시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잠이 들면 정령계로 들어가서 아리아나와 함께 능력을 키우고, 요정무술도 배우고.
물론 달라진 점이 분명히 있긴 했다. 길거리에서 이따금 서유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났으니까. 드물게나마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뭄에 콩 나듯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여성팬은 서유림을 만나자 극성스러울 정도로 좋아해준 적도 있었다.
다른 스타들은 그런 걸 무척 귀찮아하던데, 난 그게 왜 그리 좋던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가?
TV에서도 서유림의 사진과 이름이 종종 나왔다.
서유림이 유명인사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깟 ‘주먹이 운다.’ 우승 한번 했다고 해서 인지도가 얼마나 높아지겠는가?
다만 MAN FC측의 홍보 때문이었다. 11월 초에 예정된 대회 홍보 영상물에 서유림과 한상민의 내기 이야기를 꼭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11월 대회도 어느새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대회 홍보영상이 TV에서 더욱 자주 보였다.
제법 많은 격투기 팬들이 그 내용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그 관심의 중심에는 강규정이 아닌 신인 서유림이 있었다. 과연 서유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어쩌면 미들급 챔피언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얍삽이 권이슬의 아성을 무너뜨릴 무서운 신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랄까?
홍보전략 만큼은 확실하게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크게 변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아마도 기대감이 워낙 컸던 탓이겠지. 그리고 그런 변화조차도 시간이 더 지나면 더욱 흐릿해지겠지.
그러면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될 것이다.
서유림은 오늘도 도상국의 지도 아래 발차기 연습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욕심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도상국도 서유림의 진도가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의 발차기를 볼 때마다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워요.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해요.”
“그래? 다시 해볼게.”
서유림이 다시 스텝을 밟으며 발차기를 해보았다. 통통 튀는 스텝이 아니라 이리저리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비정형적인 스텝이었다.
그런데 서유림이 느끼기에도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도상국과 똑같이 움직이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다른 걸까?
규칙을 없애기 위해서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도상국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제가 형님 몸속으로 들어가서 대신 움직여줄 수도 없고.”
내가 더 답답하거든. 이놈의 몸뚱이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느냐고? 정령의 힘으로 신체능력이 이렇게까지 좋아졌는데도 별 소용이 없다니.
한방에 문제점을 고칠 수 있는 극약처방은 없을까?
그런데 도상국이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를 해주었다.
“종범이 형님이 보고 싶네요. 종범이 형님라면 형님의 문제점을 금방 짚어낼 수도 있을 텐데.”
아, 맞다. 강종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다시 들으니 가슴이 설렜다.
도상국의 스승님이라잖아.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다면 만나봐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그분은 지금 뭐 하고 지내시지?”
“처자식 거느린 가장이시잖아요. 저보다 일주일쯤 먼저 출소하셨는데, 가족 먹여 살리려고 밤낮으로 뛰어다니시는 모양이더라고요. 얼굴 뵙기도 힘들어요.”
하긴, 먹고 살려면 돈은 벌어야 할 테니.
“무슨 일 하시는데?”
“저처럼 막노동 뛰고 계시는 것 같더라고요. 밤에는 업소 나가고요. 정말 아까운 분이에요. 그 실력이면 체육관에서 코치 같은 것 하면 틀림없이 성공하실 분인데.”
도상국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자꾸만 마음이 끌린다.
게다가 도상국이 먼저 멍석을 깔아준다.
“한번 만나서 봐달라고 해볼까요?”
“그러면 봐주실까?”
“제가 부탁하면 봐주시겠죠.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필요하다면 개인적으로 보답해도 되겠지. 깨달음은 한순간이라지 않는가? 벽을 뚫을 수만 있다면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 상국이가 부탁 좀 해주겠어? 보답은 섭섭잖게 해드린다고 해.”
닷새 후, 월요일. 늦은 오후.
강종범을 만난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서유림이 먼저 도착하고, 잠시 후 도상국이 강종범과 함께 도착했다.
그런데 저 사람이 강종범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170cm나 될까? 제법 작은 키에 몸도 삐쩍 말랐다. 얼굴도 무척 곱상하다. 조금 날렵해 보이기는 하지만 싸움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다.
게다가 무척 동안이었다. 도상국 말로는 45세라고 했는데, 어두컴컴해서 그런지 3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겠다.
서유림이 먼저 다가가서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유림입니다.”
“강종범입니다. TV에서 봤습니다. 펀치력 좋으시던데요.”
돈 버느라 바쁘다면서 ‘주먹이 운다.’는 언제 챙겨보셨대?
“운이 좋았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자 강종범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도상국이 미리 이야기를 다 해놓은 듯했다.
“저보고 발차기를 봐달라고 하셨다고요?”
“예, 제가 부족한 게 많아서······.”
강종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죠? 저는 복싱을 하던 놈이라서 발차기는 잘 모르는데.”
“에이, 형님도 참. 스텝을 봐주시면 되죠.”
도상국이 적당한 시점이 끼어들었다.
“그냥 스텝이라면 제가 봐드릴 수 있는데······. 그럼 지금 한번 볼까요?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저녁에 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여기에서? 뭐 서둘러주면 나도 고맙지.
공원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서유림이 자세를 잡고는 스텝을 밟으며 발차기를 해보였다.
“상국이처럼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움직임이 어색합니다.”
강종범이 매의 눈빛으로 자세히 살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식 웃었다.
“후훗, 뭐가 문제인지 알겠습니다.”
오! 벌써? 역시 실력자는 다른 모양이군.
“아, 그래요? 문제가 뭔가요?”
서유림이 귀를 바짝 열고 들었다. 하지만 답변은 조금 허무했다.
“너무 조급하시네요. 그 스텝 시작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두 달 조금 넘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상국이는 그거 완성하는데 2년 넘게 걸렸습니다. 스텝 자연스럽게 밟는 데에만 몇 달은 걸렸죠. 그렇지?”
“그랬죠, 형님.”
강종범의 물음에 도상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스텝과 동작이 어색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게 자연스러워지려면 많은 시간과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씨를 자연스럽게 쓰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의 힘을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강종범의 말대로 지나치게 조급했다. 전혀 다른 스텝을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데 두 달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그 정도 움직이시는 것도 엄청난 일이에요. 서유림씨는 운동신경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서유림이 겸손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력도 일천하고 지식도 얇아서 조언을 드릴 수 있는 게 겨우 그 정도뿐이네요.”
겨우 그 정도뿐이라니. 그 조언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세상을 살다 보면 착각하는 부분이 많다.
훌륭한 의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볼까?
흔히들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최고로 친다. 하지만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의사야말로 진정 최고의 의사가 아닐까?
수학자도 마찬가지다.
꼭 어려운 공식을 풀어내야만 위대한 수학자인가? ‘이것은 풀이가 불가능한 공식.’을 증명해내는 수학자도 위대한 법이다.
덕분에 다른 수학자들이 불가능한 공식을 풀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강종범의 조언도 그랬다.
애써 문제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왜? 문제점이 없으니까.
덕분에 ‘나는 왜 안 되지?’ 하는 자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너무 잘 되고 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조언을 ‘겨우 그 정도 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강종범의 가르침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복싱 자세 좀 볼 수 있을까요?”
실례가 되다니. 봐주면 오히려 고맙지.
서유림이 재빨리 복싱 자세를 취했다. 평소에 혼자 연습하듯이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크로스 카운터 동작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강종범이 유심히 지켜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복싱 배우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오래 되셨나요?”
서유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습니다. 단지 크로스 카운터 한 동작만 속성으로 배웠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어쩐지······.”
왜? 그렇게 말을 끝내면 뒷말이 궁금하잖아.
“무척 어설프죠?”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어설플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직 복싱만으로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했다는 거죠. 발차기나 서브미션 사용하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맞죠?”
그랬지. 발차기는 실력이 없어서, 서브미션은 실력을 감추기 위해서.
“맞습니다.”
“그렇다면 복싱 재능이 엄청나신 것 같은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공격해볼 테니 한번 피해보시겠어요? 그냥 공격하는 흉내만 낼게요.”
자꾸 ‘실례’라고 그래?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니까.
“실제로 때리셔도 됩니다.”
서유림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강종범도 서유림 앞에서 복싱 자세를 취하며 펀치를 뻗었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서유림은 최선을 다해서 회피했다. 순발력은 펀치력이나 맷집처럼 확연하게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서 마음껏 능력을 동원했다.
강종범의 펀치는 번번이 빗나갔다.
그러자 강종범이 특유의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어느 타이밍에 펀치가 나올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운 스텝이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주먹이 뻗어 나왔다.
서유림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도 간신히 피했을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강종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엄청난 순발력과 반사신경입니다. 스텝도 위빙동작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제 주먹을 다 피하네요.”
“운이 좋았던 거죠.”
“아뇨. 천재적인 재능을 갖추신 겁니다. 종합격투기 그만두고 복싱으로 전향해볼 생각은 없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