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새로운 스승 (2)
아가씨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헛갈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거 진담이거든.
그러면 계약금도 안 받을 거면서 계약은 왜 하느냐고?
그거야 내가 MAN FC와 계약하는 목적이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지.
솔직히 MAN FC 경기 치러서 돈 얼마나 벌겠어? 나 같은 무명이 경기 해봤자 파이트머니 1천만 원을 받겠어? 끽해야 1백만 원 받기도 힘들잖아.
내가 그 정도 돈에 질질 끌려 다닐 사람으로 보여?
내가 MAN FC와 계약하는 것은 단지 연예계로 진출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라고.
물론 연예계도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단지 돈과 인맥, 권력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겨우 계약금 1천만 원 가지고 3년 동안이나 내 목줄을 움켜쥐려고 해?
서유림은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나갔다.
계약기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 전에 경기 수를 채우면 되는 거니까.
문제는 7경기를 얼마 만에 끝낼 수 있느냐 한 건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별 문제 없었다. 앞으로 치러야 할 일정을 계산해보니 5경기나 7경기나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냐고?
후훗, 그건 지금 이야기하면 곤란하지. MAN FC측이 그 사실을 알면 당장 계약서를 불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 할 테니까.
“좋습니다. 계약기간은 그렇게 바꾸도록 하죠.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볼까?”
계약서를 눈빛으로 뚫어버리겠다는 듯 보고 또 보았다.
여기 또 있네. 하여튼 이런 식이라니까.
“이 부분도 바꿔주세요.”
[······특별한 부상이 없다고 해도 갑은 을에게 1개월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
“이 부분은 또 어떻게······?”
1개월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주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언급이 없잖아.
서유림에게는 오히려 그 부분이 더 필요하다.
“전 가능한 한 많은 경기를 뛰고 싶습니다. 선수가 희망할 경우 5개월 이내에 경기를 잡아준다는 내용을 넣어주세요.”
그 외에도 무려 다섯 군데나 손보았다.
아! 눈 아파! 무슨 계약서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MAN FC와의 계약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렇게 도장을 찍었고, 계약서 사본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왔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빨리 도장 찍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계약서 내용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이 시간에 사람 불러놓고 밥도 안 사주네. 아, 배고파!
혼자 뷔페집 가서 실컷 배 채우고 강성체육관으로 향했다. 거기에서도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거든.
마침 송민호 관장이 체육관에 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주인 반기는 강아지처럼 얼른 다가온다.
“유림씨 왔어? 축하해!”
송민호도 여우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허락한 적도 없는데 은근슬쩍 말 놓기 시작하네.
뭐 나보다 한참 연장자니 큰 거부감은 없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런데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제가 전담 코치 한명 둘까 하는데 관장님께서 채용해주세요. 대신 월급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코치? 월급을······? 그게 무슨 말이야?”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도상국한테 영수증 받을 수 없으니까 관장님이 대신 영수증 처리 좀 해달라는 거지.
좀 더 쉽게 말해줘?
카드깡 좀 해달라고.
아, 분명히 말하지만 이거 불법은 아니야. 코치 채용이라니까.
토요일 오후.
사방 천지에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앞 뒤 옆 어디를 둘러봐도 싱그러운 녹음이 가득하다.
몸도 마음도 함께 정화되는 기분이다.
그런 곳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니 맛이 없을 수가 있나?
“와! 이런 곳에서 먹으니까 진짜 맛있다. 숯불에 직접 구워서 그런가?”
여동생 서미진의 젓가락이 멈출 줄을 모른다.
저러니 잔소리를 듣지.
“오빠도 좀 싸서 주고 그래. 고기 굽느라 하나도 못 먹잖니.”
“또, 또! 엄만 만날 오빠만 편들어.”
하여튼 톰과 제리라니까. 모녀지간 맞아? 가끔 보면 꼭 다리 밑에서 주워온 딸 같다니까.
그래도 끝은 늘 해피엔딩이다.
“자, 오빠! 입 크게 벌려!”
“야, 그렇게 크게 싸주면 어떻게 먹······ 어어!”
서미진이 커다란 상추쌈을 내 입에 마구잡이로 집어넣는다.
어! 근데 뭐야? 마늘 하나를 통째로 다 넣은 거야? 입이 가득 막혀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남자는 마늘 많이 먹어야 한 대. 그게 그렇게 좋대.”
여기서 얼마나 더 좋아지라고. 난 그만 좋아져도 된다니까.
그래도 여동생이 싸주니 맛은 좋네.
“그런데 이런 곳은 어떻게 잡았니? 여기 비싸지 않아?”
“비싸긴요. 하루 숙박에 8만 원밖에 안 해요.”
“어머머. 너무 싸고 좋다.”
나도 만족스럽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고 해서 엄청나게 깊은 산속인줄 알았는데 교통도 나쁘지 않고, 주변 풍경도 괜찮다.
단지 예약이 힘들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지.
그래도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예약할 수 있다. 이번에도 한 달 전에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초고속으로 홈페이지 접속하니 어렵지 않게 예약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올 여름 휴가는 제대로 보내네.”
“올해뿐이겠어요? 앞으로 쭉 제대로 보내게 해드릴게요.”
“말만 들어도 좋네. 호호호. 그런데 미연아. 너는 남자친구 소개 안 시켜줄 거니?”
갑자기 화살이 서미연에게 향한다.
하지만 서미연이 얼마나 불여우인데.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닌다.
“조금 더 지켜보고. 일단 내 기준부터 통과해야지.”
“뭐 하는 사람인데?”
“엄마느~은. 스무고개 해? 나중에 한 번에 가르쳐줄게.”
“뭐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잖니.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그렇게 입을 꾹 다물어?”
“경찰이야, 됐지?”
서미연이 결국 슬쩍 정보를 흘렸다.
어머니가 알아봤다는 듯 서미연을 장난삼아 흘겨보았다.
“그래서 네가 경찰 되려고 그렇게 기를 썼던 거구나?”
“아니거든. 경찰 공부는 오빠 만나기 전부터 했었거든.”
“그래? 어쩌다가 만났는데?”
아무래도 어머니가 경찰 하는 게 낫겠다. 은근슬쩍 정보를 빼내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셔.
하지만 서미연도 만만찮았다.
“많이 알면 다쳐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비싸게 굴기는. 그만 먹어 얘. 살쪄.”
“유치하게 먹는 것 가지고 복수야?”
이쪽도 톰과 제리네.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이 재미있다.
그 모습을 보니 행복이 느껴진다.
행복이 별거야? 이런 게 행복이지.
이제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이런 시간 만들어야겠다. 돈도 있겠다, 시간도 충분하겠다. 못할 이유가 없잖아?
“산책이나 할까요?”
“그럴까?”
함께 산책로를 걸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녹음 덕분에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침소리 때문에 조금은 슬픈 산책이기도 했다.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책로인데 겨우 500m를 넘기지 못하고 기침을 심하게 하셨다.
“그냥 내려갈까요?”
“아니다. 숨이 좀 차서 그래. 천천히 걸으면 괜찮아.”
볼수록 안쓰럽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건강하셨던 분인데.
그놈의 담배와 술 때문이다. 적당히 즐기셨어야지.
폐가 너무 많이 손상돼서 병원에서도 치료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나마 당장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와, 저 새 좀 봐. 예쁘다.”
막내 동생 서미진이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슬픈 생각 할 필요 있나? 좋은 생각만 하자.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산책을 이어갔다.
리솜 포레스트라는 곳에 들어가서 스파도 즐겼다. 비용이 조금 비싸긴 했지만, 가족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지. 한동민한테 5천만 원도 추가로 받았는데. 후훗.
덕분에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겨본 것 같다.
* * *
강성체육관.
“도상국씨입니다. 이번에 주먹이 운다에서······.”
“알지! 내가 왜 몰라?”
서유림이 도상국을 소개하려고 하자 송민호 관장이 얼른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반가움과 걱정스러움이 교차했다.
서유림과 도상국은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아닌가? 그런 두 사람이 모두 강성체육관에서 운동한다고 하면 그 자체로 홍보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상국의 과거와 관련한 소문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무려 여고생 강간살인범이 아닌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뜨거운 감자랄까?
하지만 도상국을 쉽게 뱉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서유림도 함께 놓쳐야만 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미안한데 소문나지 않도록······.”
서유림도 도상국도 거기까지만 들어도 송민호 관장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상국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람들이 저 알아보는 것 원치 않습니다. 가능한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있다 가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럼 저희는 운동 좀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송민호를 떼어놓고 체육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발차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도상국은 약속대로 가능한 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챙이 긴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람들을 등지고 섰다.
일부러 와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은 도상국을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서유림이 부러운 것은 도상국의 기습적인 발차기 타이밍이었다.
발차기는 동작이 무척 큰 공격이다. 무거운 발을 힘껏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큰 준비동작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간결하게 한다고 해도 상대방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다.
그런데 도상국은 대체 어떻게 했기에 상대방의 눈을 속이는 게 가능한 것일까?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그것이 준비동작인지 아닌지를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평소 움직임을 발차기 준비동작처럼 하면 되죠. 제가 시범을 보여 볼게요.”
“아직 무리하면 안 돼.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그냥 말로만 설명해줘.”
“실제 발차기는 하지 않고 가볍게 스텝만 밟아볼게요. 이 정도 움직이는 건 괜찮습니다.”
도상국이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다. 가벼운 위빙동작이 섞인 스텝이었다. 갈비뼈 부상 때문에 매우 느리고 소극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느낌은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눈을 혼란시키듯 앞뒤로 오가며 스텝을 밟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스텝이었다.
보통 사우스포나 오서독스 중 하나의 자세를 선택해서 잡고 스텝을 밟는다. 물론 경기 중간에 스텝을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도상국은 그런 것이 없었다. 통통 튀는 스텝은 많지 않았고, 대신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스텝이 많았다. 그러면서 몸을 사방으로 움직이니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보통 이런 식으로 스텝을 밟으면 본인 스스로 타이밍이 꼬이기 쉽다. 스텝이 전환되는 순간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서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기 쉽다.
그런데 도상국은 스텝을 수시로 바꾸는 데도 부자연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물 흐르듯 스텝이 이어지니 공격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상국이 어느 동작에서 딱 멈추었다.
“제가 지금 뭐 하는 자세 같아요?”
“앞으로 치고 나가려고 준비하는 자세 같은데?”
“상대방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죠. 훼이크로 보일 수도 있고, 기습적으로 다가가며 주먹을 뻗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저는 이 자세가 발차기 준비자세입니다.”
“······아!”
순간 느껴지는 게 있었다.
야구배트를 휘두르기 위해서는 백스윙이 필요하듯, 발을 차올릴 때도 비슷한 준비동작이 필요하다.
도상국은 단지 앞으로 걸어가는 스텝 자체가 그런 백스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냥 다가오는 척하다가 갑작스런 발차기가 가능한 것이다.
상대방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다.
도상국이 실제로 발차기해보이듯 다리를 살짝 들어보였다.
“이러다가 상대가 대비한다 싶으면 이렇게 몸을 숙이면서 뒤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론은 알 것 같다.
물론 이론과 실제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한번 해볼게.”
서유림이 기존의 스텝 방식을 버리고 도상국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처음이라 그런지 영 어색했다. 리듬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도상국도 지적을 멈추지 않았다.
“형님은 규칙을 참 좋아하시네. 그 안에서도 자꾸 규칙을 만들려고 하고 계세요. 싸움에서는 규칙이 있으면 불리해요.”
맞는 말이다. 규칙은 곧 패턴이자 습관이고, 그것이 읽히는 순간 상대방에게 공격 타이밍을 내어주는 꼴이 되니까.
그런데 내가 규칙을 만들려고 했나?
“꼭 그렇게 어슬렁거리기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흐름에 몸을 맡기세요. 더 좋은 건 상대방의 움직임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듯 움직이는 거고요.”
어렵다. 그걸 어떻게 몸으로 실현하지? 이론으로만 가능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도상국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
하긴, 첫술에 배부르랴? 처음부터 잘하고 싶어 한다면 날도둑놈이지.
아직 시간은 많다.
“정말 대단하네. 상국이는 이런 스텝을 혼자 터득한 거야?”
“그럴 리가요. 사실 제 움직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아는 형님께 배워서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이죠.”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도상국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가 있다는 말 아닌가?
“아는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