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새로운 스승 (1)
오늘 할 구경은 다 한 것 같다. 이제 가뿐한 마음으로 운동이나 하러 가볼까?
“저는 그만 창고로 가보겠습니다.”
“업무 안 바꾸세요? 대리 승진도 하셨는데······.”
미쳤니? 이런 노다지를 왜 포기해?
명진식품을 그만두면 그만 두었지, 창고 업무는 포기할 수 없다.
“강철중씨 아직도 한의원 침 맞으러 다닌다며. 그렇다고 오영훈 주임한테 맡길 수도 없고.”
“이제 많이 나았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대리님.”
강철중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제발 그러지 말라니까. 그건 날 위하는 게 아니라고.
착한 건 참 마음에 드는데, 답답하게 굴지는 말자.
“그러다 허리 다시 삐끗하면 이번에는 6개월이에요. 나도 이젠 창고 업무가 몸에 익었으니까 아무 부담 갖지 말고 사무실 업무나 빨리 배워요.”
“정말······ 면목 없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니까요. 내가 딱 석 달만 더 봐줄 테니까 그때까지 허리 완치시키세요.”
석 달이면 충분하다. 그때쯤이면 많은 것이 변해있을 테니까.
MAN FC는 한상민 실장의 것이 되어있을 것이고, 나는 강규정과 상대해서 프로 첫 승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명진식품에 다닐 이유가 없겠지. 내 가능성을 보고 이곳저곳에서 스폰서 계약을 제안해올 테니까.
그때까지는 명진식품 창고가 내 체육관이다.
창고로 향했다.
“어! 서유림 대리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대리님. 한턱 쏘셔야죠.”
특별승진하고 나니 인사하는 것도 일이네. 걸어오는 인사를 안 받아줄 수도 없고.
빨리 창고 안으로 숨는 게 상책이다.
대충 인사를 받아주다가 얼른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이 포근한 느낌.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다.
30kg짜리 덤벨을 각각 양 손에 들고 운동을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능력 올랐다는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필요 없었다. 운동 자체가 너무도 즐거우니까.
오늘도 칼퇴근.
이건 한동민과의 계약과 무관하다. 대표이사인 한명진이 직접 보증한 서유림만의 특권이었다.
무조건 칼퇴근 보장. 원한다면 언제든지 외출이나 휴가도 가능하다. 물론 사전 허락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표이사가 직접 보장한 일인데 감히 누가 불허하겠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운동에 필요한 경비 지원도 약속했다.
지원금액은 한 달에 100만 원 수준. 영수증만 제시하면 그날 통장에 입금해준다고 했다.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타격 코치는 지금 상태에서는 배복성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배복성의 실력 자체는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서유림과 궁합이 무척 잘 맞았다.
서브미션도 요정무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발차기였다. 아직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누구에게 배워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결승전 상대였던 도상국!
타격도 뛰어나고 그래플링도 뛰어나고 변칙공격도 뛰어났지만, 도상국의 최대 강점은 역시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뿜어지는 기습적인 발차기였다. 그 발차기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도상국을 내 발차기 코치로 채용하자.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갈비뼈 부상? 그거야 금방 낫겠지. 그쯤 못 기다려줄까? 그리고 그냥 가르치기만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여고생 강간살인범이라는 과거?
물론 그 부분은 조금 찜찜하긴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철저하게 사무적인 관계로만 만날 거니까. 단물만 쪽 빨아먹고 빠이빠이 하면 그만이다.
코치 비용 적당히 쥐어주면 도상국도 별 불만은 없겠지.
그보다 큰 문제는 영수증 처리였다. 도상국에게 영수증을 발급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겨우 이것 때문에 개인사업자 등록하라고 할 수도 없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 그러면 되겠구나!”
역시 정령 아리안의 힘은 대단하다. 잔머리가 이렇게 팍팍 돌아가다니.
해결 방법을 찾으니 마음까지 홀가분해지는 것 같다.
이제 남은 문제는 도상국이 코치직을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이참에 도상국 병문안이나 가볼까?
도상국이 입원한 정형외과로 향했다.
도상국은 6인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있는데 도상국만 혼자서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고아 출신이라지 않았던가? 성인이 되자마자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게다가 흉악범이다 보니 그나마 아는 사람도 거리를 두겠지.
그런 선입견 때문일까? 아니면 엉망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망가진 얼굴의 상처 때문일까?
도상국의 표정에서 외로움이 팍팍 뿜어지는 듯했다.
“허험. 몸은 좀 어때요?”
서유림이 인기척을 흘리며 물었다.
도상국은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설마 누가 자신을 찾아오겠느냐 싶었던 모양이다.
“도상국씨.”
서유림이 이름을 불어주고 나서야 움찔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가슴에 통증을 느꼈는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냥 누워 계세요. 지나다가 들른 것뿐이니까.”
“그래도······.”
서유림이 만류했지만,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거 참 이상하네. 행동 하나하나를 보면 도무지 그런 흉악범 같지가 않단 말이야.
물론 살인범이 ‘나 살인범이다.’ 하고 얼굴이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서유림이 등을 잡아서 일어나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많이 다쳤나요?”
“별 것 아닙니다. 살짝 금이 갔대요. 입원해있을 일도 아닌데. 이틀 후에 퇴원하려고요.”
“얼굴도 생각보다 상처가 심하네요. 괜히 미안해지게.”
“이까짓 거야 며칠이면 금방 낫죠. 그런데 어쩐 일로······?”
“그냥 들렀다니까요. 그런데 대회관계자 말로는 갈비뼈 두세 개는 부러진 것 같다고 하던데.”
도상국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되길 바랐던 거겠죠. 다들 날 싫어하니까. 근데 펀치 정말 좋으시던데요. 가볍게 치는 것 같은데 몇 방 맞으니까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하하.”
웃네! 뭐가 좋다고. 그럴 거면서 그땐 왜 그렇게 울었던 거야?
“제가 밉죠?”
서유림이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도상국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밉죠. 왜 하필 저랑 거기에 만나서 우승도 못하게 만드시고. 게다가 이렇게 실컷 패놓고. 하하. 농담입니다.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는 거죠. 우승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다른 감정은 없어요.”
우승 못해서 분하고 억울하진 않았다는 얘기네. 물론 그런 감정이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펑펑 울 정도는 아니었겠지.
그럼 대체 왜 울었던 거야?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차라리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볼까? 그래. 괜한 오지랖 같긴 하지만,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궁금증이잖아.
어쩌면 도상국도 그런 걸 물어주기를 바랄 수도 있고.
게다가 도상국을 코치로 채용할 계획 아닌가? 이 정도 문제는 짚고 넘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소문은······ 정말인가요?”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굳이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도상국은 무엇을 묻는 건지 금방 알아챘다.
오히려 서유림에게 되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래요?”
순간적으로 대답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망설임이 길지는 않았다.
“49%는 믿어드리죠.”
49% 농담에 51% 진담이 섞인 듯한 대답이었다.
도상국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만큼이라도 믿어주신다니 감사하네요. 하지만 그다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네요. 우리가 그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고.”
뭐야? 김빠지게. 이왕 말 꺼낸 거니 다시 기회를 줘볼까?
“말씀하시기 곤란한 사연이라도 있으세요?”
“그렇다고 치죠.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이 없네. 말하기 싫다는데 어떻게 해?
그럼 조금 조심해야겠다. 도상국을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
괜히 정 붙지 않게 조심하자.
그런데 도상국이 자꾸 정이 들게 만든다.
“근데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세요? 결승전에서 제가 지면 형님이라고 불러드리기로 한 것 같은데.”
그거 진담이었어?
서유림이 잠시 머뭇거리자 도상국이 피식 웃는다.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거죠. 형님이라고 부를 테니까 말씀 놓으세요. 나이도 제가 어리잖아요.”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망설일 이유가 있나?
“그러면 나야 좋지. 그런데 얼굴에 칼자국은 어쩌다가 생긴 거야?”
도상국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서 얼굴에 나있는 커다란 칼자국을 어루만졌다. 칼자국이 무려 세 개나 되었다.
“교도소에서 싸우다가 그랬죠 뭐. 제가 교도소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랬군. 자업자득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고생은 참 많았겠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볼까?
“그런데 퇴원하면 직장은 있어?”
“배운 것도 없고, 교도소 나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직장이 있겠습니까? 직장 잡으려고 해도 흉악범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받아주는 곳도 없어요. 막노동이나 뛰며 살아야죠.”
“그럼 아르바이트나 해볼래?”
“좋은 자리 있나요? 소개해주면 저야 좋죠.”
“나한테 그 발차기 좀 가르쳐줘. 일주일에 세 시간 정도씩만. 그러면 한 달에 100만 원 줄게.”
“제가 가르칠 실력이 되나요?”
되고말고.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본 발차기 중에서는 도상국의 것이 최고였거든.
“그럼 퇴원하자마자 내 코치 해주는 거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맙지.”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도상국의 과거는 조금 더 친해지면 알게 되겠지. 왠지 모르겠지만 억울한 누명을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냐, 아냐! 이런 선입견 가지면 안 된다니까. 적어도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하게 판단하자. 다른 사람의 의견도 좀 들어보고.
난 그냥 발차기만 배우면 되는 거야.
병원을 나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MAN FC 계약과 관련해서 전화······.
생각보다 일찍 전화가 걸려왔다. 하긴, 기본적인 계약서는 이미 예전부터 만들어져 있었겠지. 단지 계약금이나 파이트머니 같은 걸 정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겠지.
그럴 필요 없는데. 그깟 돈 얼마나 된다고 욕심내겠나?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빨리 계약서 도장 찍고 나와야겠다.
그대로 MAN FC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른 선수들도 우르르 몰려와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다. 각개격파 식으로 계약하겠다는 건가?
김문홍 대표는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여직원이 맞은편에 앉았다. 외모는 남자 홀리기 딱 좋을 정도로 예쁘장한데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냉정하다.
지적인 직업여성이 이상형인 남자라면 가슴이 설렐 수도 있겠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나도 이런 냉정한 분위기 좋아한다. 그만큼 나도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계약서 좀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적인 관계 다 생략하고 업무적으로 시작해서 업무적으로 끝내자 그거지.
“물론이죠. 여기 있습니다.”
계약서 내용이 무척 길었다. 무려 일곱 장이나 되었다. 게다가 글씨 크기도 작았다. 대체 무슨 내용을 이렇게 많이 적어 넣은 거야?
마치 보험 약관 보는 느낌이다.
“천천히 보세요.”
당연하지.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게다가 내용을 이렇게 길게 만들었다는 것은 뭔가 함정이 있다는 뜻이다. 진짜 중요한 내용을 다른 글자들 속에 숨겨놓기 쉽거든.
그걸 놓치고 그냥 계약하면 낭패다.
어! 이것 봐, 이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런 중요한 독소조항은 꼭 이렇게 숨겨놓는 식으로 작성하더라니까.
“여기 이 조항은 좀 바꾸고 싶은데요.”
“어느 부분요?”
서유림이 손가락으로 내용을 짚었다.
[······을은 경기 5회 이상과 3년의 약정기간을 모두 이행해야······]
“그 부분을 어떻게······?”
“AND가 아니라 OR로 바꾸고 싶습니다. 5경기를 이행하거나 3년 약정기간을 채우거나 둘 중 하나만 완료해도 계약 이행하는 것으로요.”
“이 계약금으로 그건 좀 곤란 ······.”
이것 봐 아가씨. 계약금이 겨우 1천만 원이라고. 내가 그깟 1천만 원 때문에 3년씩이나 묶여있어야 하겠어?
“대신 계약금을 줄이면 되잖아요.”
“그럼 계약금을 500만 원으로 내릴게요. 의무적으로 치러야 할 경기 수도 7경기로 늘리고요. 그래도 될까요?”
뭐야 이거? 그것 좀 바꿨다고 계약금을 절반으로 뚝 잘라? 게다가 의무 경기 수는 왜 오르는데?
그런 식으로 나온다 그거지? 얘가 날 너무 띄엄띄엄 보네!
근데 그걸 잘 알아둬야지. 서류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야. 이런 식으로 마음 빼앗기면 나중에 누가 손해일까?
서유림이 가볍게 웃었다.
“계약금 필요 없으니까 0원에서 시작하죠. 저 계약금 때문에 계약하러 온 것 아니거든요.”
그러자 아가씨가 어깨를 움찔하며 놀란 표정을 했다. 칼자루를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유림이 뜻밖에 강하게 나오니 뒤통수 맞은 기분이겠지.
“······예?”
“계약금 한 푼도 안 받겠다고요. 그러면 계약서 내용은 제 마음대로 고쳐도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