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내일을 위한 투자 (4)
그래도 내색해서는 안 되겠지? 세상을 어떻게 기분대로만 살아?
“명진식품 구매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음 대회까지는 겨우 석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정말 경기할 수 있겠어?”
“석 달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제 잠재력을 믿거든요.”
“후회 없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캐물어? 당신이 김문홍 대신 내기 해주게?
그런 모양이다.
“좋아! 나와 내기 하지. 석 달 후에 강규정인가 뭔가 하는 선수 이겨봐. 그럼 내가 5천만 원 주지. 대신 패하면 알지?”
하긴, 그때쯤이면 MAN FC는 한상민의 것이 되어있을 거라고 했지?
잘됐다. 최소한 지금의 대표인 김문홍 보다는 통 크게 놀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패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5천만 원 준비해놓겠습니다.”
한상민이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좋았어! 마음에 들어! 일단 기사부터 멋지게 써야 하겠군.”
김문홍, 한상민과의 면담을 마쳤다.
서유림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관계자를 붙잡고 도상국의 상태부터 물었다.
아까 너무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 마음먹고 응징한다는 생각에 실컷 두들겨 패긴 했는데, 이전의 순진했던 모습들이 오버랩 되니 자꾸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 나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떻게 해?
“도상국 선수는 많이 다쳤나요?”
“아! 그 친구? 병원에 실려 갔어요. 하하, 얼굴도 엉망인데 갈비뼈도 두세 개 나간 것 같더라고요. 하하.”
사람 다친 이야기 하는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것일까?
하긴, 상대가 도상국이니 그럴 법도 하다.
“잘하셨어요. 그런 새끼는 아예 목뼈를 부러뜨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눈물 질질 짜는 모습 보니 속이 후련하더라고요.”
“눈물을 질질 짜요?”
“아예 소리까지 내면서 흐느끼던데요. 우승 못해서 분하고 억울하다 그거겠죠. 개새끼. 저 때문에 더 억울한 사람들도 있다는 건 생각 못하나?”
분하고 억울해서 흐느끼며 운다?
왠지 도상국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선입견이 중요한 모양이다. 나쁜 눈으로 보면 행동 하나하나가 다 나쁘게 보이는 법이니까.
하긴, 도상국 같은 흉악범을 좋은 눈으로 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억울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잖아.
물론 아닐 가능성이 훨씬 크겠지만.
에라, 모르겠다. 사실 내가 아는 게 전혀 없잖아. 뭘 근거로 도상국을 판단해? 단지 뭔가 모를 연민이 조금 느껴진 것뿐이다.
느낌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위험하겠지. 특히 도상국 같은 사람은.
도상국을 좀 더 깊이 알 때까지는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게 좋겠다.
지금은 그렇고, 나중에 병문안이나 한번 가봐야겠다.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을 나왔다. 그런데 채희라가 전화를 걸어왔다.
- 오늘도 나 못 찾았어?
혹시 채희라가 와있나 싶어서 슬쩍 찾아보긴 했다. 하지만 몰려든 인파가 워낙 많았다. 게다가 관중석은 조명이 어두운 편이라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왔었어?”
- 당연하지. 오빠 응원하느라고 목 쉰 거 안 들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목소리가 조금 걸걸한 느낌이 있다.
“고생했네. 고맙다.”
- 고마우면 오늘 술 사줘. 시간 내줄 수 있지?
그걸 말이라고 해?
“어디에서 볼까?”
- 동문으로 나오면 건너편에 국민은행 있어. 거기에서 서있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나 빨간색 투싼, 3927이야. 비상깜빡이 켜고 갈게.
복잡하기도 해라. 그냥 서유림이 있는 곳으로 오면 편할 텐데.
동문이면 마침 서유림이 빠져나가는 쪽이었다.
길 건너편에 국민은행이 보였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자 채희라의 차량이 도착했다. 선텐이 짙게 되어있어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3927번호판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유림이 차량에 탔다.
채희라가 곧바로 차량을 출발시켰다.
“오빠 오늘 너무 멋졌어.”
“고마워. 이대로만 쭉 나가면 연예인 될 수 있겠지?”
“충분히 가능해. 미리 싸인이나 실컷 받아놔야 할까봐. 호호.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좋지.”
운전대를 대신 잡아줄까 했는데, 채희라의 운전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채희라도 자신이 직접 운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차량을 어디로 몰고 가는 거지? 가까운 곳에도 영화관은 많은데 차량은 멈추지 않고 성남시까지 곧장 달렸다.
더욱 이상한 것은 성남시에 도착해서였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지금 써.”
채희라가 선물이라며 내민 것은 알이 큰 선글라스와 챙이 긴 모자였다.
채희라 본인도 챙이 넓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스크까지 썼다.
자신을 무슨 특급 연예인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옷도 무척 수수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 모습이 역력했다.
물론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채희라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다보니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집중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채희라는 그런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너 무슨 죄 지었냐?”
“미안해. 요즘 내가 몸을 사려야 하거든. 나 때문에 오빠까지 위험해지면 안 되잖아.”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호호, 많이 알면 다쳐.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셔. 부탁이야. 그냥 묻지 말고 해줘. 나보다는 오빠를 위한 거야.”
까짓 어려울 거야 없다.
채희라가 원하는 대로 모자에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려주었다.
이렇게 하고 밖으로 나가니 오히려 사람들이 더 쳐다보는 듯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심하게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리고 쳐다본다고 해도 누구인지 모르겠지.
채희라는 그 꼴을 하고도 할 건 다 했다. 영화를 보고 맛집을 찾아가서 저녁을 먹고, 술도 마셨다.
물론 룸으로 되어있는 곳만 찾아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얼굴이 노출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금 이른 시간에 야외의 무인모텔로 들어가서 실컷 욕정을 풀었다.
기진맥진해진 채희라가 서유림의 어께를 베고 옆으로 누웠다. 습관처럼 서유림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만졌다. 마치 글씨라도 쓰는 듯했다.
“나 드디어 가게 냈어.”
채희라가 툭 던지듯 이야기했다.
자기 이름으로 낼 거라고 하더니 정말 낸 모양이군.
“축하해. 대박나라.”
“근데 깡패새끼들 때문에 걱정이야. 벌써부터 돈 뜯으려고 달려드네. 어제도 그 새끼들한테 한참 시달렸어.”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별일은 없었는지 조금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채희라를 만나면서 그 부분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유흥쪽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폭력적인 일과 관계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일에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첫 발을 집어넣는 순간 점점 더 깊이 엮이게 될 것 같았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채희라와는 그냥 엔조이로만 머물고 싶다.
선은 넘지 말자.
“그렇다고 오빠한테 도와달라는 건 아니고.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서유림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짓 그만두고 지금부터라도 평범한 여자로 살라고 조언하고 싶었지만, 괜한 오지랖이 분명했다.
채희라도 그런 것은 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냥 조용히 듣기만 했다.
채희라는 그저 혼잣말처럼 주절대기만 했다.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아. 잘 될지 모르겠어.”
자장가 소리 같았다. 너무도 평온한 느낌이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평온할 때도 있어야지.
“잘 되겠지.”
무의식중에 가벼운 대답 정도는 해주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다음 주말에는 가족하고 외식이나 해야겠다.’는 식의 혼자 생각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명진식품 대회의실에서 포상행사가 열렸다.
부장급 이상 핵심 간부들만 참여한 약식 행사였다. 물론 한동민도 포상행사에 참여했다.
이번 포상행사는 오직 서유림 한 사람만을 위한 행사였다. 명진식품 이름을 달고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했으니 그럴만한 자격은 충분했다.
홍보효과가 엄청났잖아.
대표이사 한명진이 직접 표창장과 함께 상금과 상품 등을 전달했다. 애초에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
그럴수록 한동민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표시내지 않으려고 무척 애는 썼지만, 서유림의 눈에는 그 불편한 마음이 모두 보이는 듯했다.
대표이사 한명진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듯 행사는 무척 짧았다. 겨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념사진을 끝으로 대회의실을 나왔다.
한동민과 나란히 구매팀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한동민이 갑자기 서유림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웬일이야? 한동민이 어깨동무를 다 해오고.
“같은 대리 되셔서 좋으시겠어요.”
허허, 존댓말까지 써주고.
그런데 참 듣기 거북하네. 같은 말을 해도 어쩜 저렇게 듣기 싫게 할까? 그러니 자꾸 체력이 쭉쭉 빠지는 거지.
가볍게 체력을 흡수해주면서 한동민을 향해 웃어주었다.
“아이, 대리님 또 왜 그러세요. 저 좀 그만 미워하세요. 제가 대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그럼 5천만 원은 퉁 치는 걸로?”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것 때문에 어깨동무 했던 거였어?
“친한 사이일수록 돈거래는 확실하게 하라고 했잖아요. 내기는 내기니까 받을 건 받아야죠.”
“서유림씨 차~암 사회생활 못하네. 그런 식으로 세상 살면 피곤해진다니까. 그걸 꼭 받아야 하겠어?”
걱정해주는 건 고맙다만 난 아주 잘 살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지금 나 걱정해줄 때가 아니잖아? 네 체력 걱정이나 하시지?
“그러게 왜 소문을 내셨어요?”
“소문? 내가 무슨 소문을 내?”
“이미 전 직원이 다 알던걸요? 우리 내기 한 것. 그거 대리님이 일부러 소문내신 것 아닙니까? 제가 지면 빼도 박도 못 하게 하려고.”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얘기를 왜 해?”
물론 그랬겠지. 사실은 내가 소문을 낸 거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몰아가면 몰리게 되어있는 거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야.
“대리님 그러는 거 아닙니다. 소문 다 내놓고 인제 와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제가 어떻게 받아줍니까? 다른 사람들 눈을 봐서라도 전 꼭 받아야겠습니다.”
“난 진짜 소문 안 냈다니까?”
“아무튼 이번 주 안에 주세요. 안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소문낼 겁니다.”
한동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어깨에 올렸던 손도 내렸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어디 한번 보자고.”
한동민이 토라졌는지 거친 발걸음으로 먼저 사라졌다. 아직도 저런 체력이 남아있었나?
어쩌면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짜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유림이 혼자서 구매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구매팀 직원들이 와!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주었다. 오영훈은 표정이 조금 미지근하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와, 축하드려요, 서유림 대리님!”
“고마워, 강은영씨.”
이상하네. 그깟 대리 직급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 듣기가 좋지? 강은영 목소리가 좋은 건가?
누가 다시 한 번만 들려줘.
“축하해, 서유림 대리. 정말로 해낼 줄은 몰랐네.”
배기열 팀장도 축하해주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제야 오영훈도 마지못해 축하의 말을 주었다.
“축하합니다, 서 대리님.”
그런데 오영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하긴, 하루아침에 위치가 역전되었으니 속이 쓰릴 법도 하지.
하지만 겨우 이것 가지고 그렇게 속이 쓰리면 어떻게 해? 본론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오영훈씨. 잘 생각해봐. 정말 이게 전부일 것 같아? 내가 오래 다닐 생각도 없는 회사에서 굳이 대리 승진을 조건에 넣으려고 했던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
가만 보니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네.
나라도 나서서 슬쩍 힌트를 흘려야 하나?
그런데 배기열 팀장이 비로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듯하다. 역시 팀장은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니라니까.
“가만있어봐. 이렇게 되면 연말 정기인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연말 정기인사라뇨?”
“한 해에 같은 팀에서 대리 두 명이 동시에 승진할 수가 있나?”
순간 오영훈 주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영훈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안 된다는 사규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왜 그래? 불쌍하게. 배기열 팀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저것 봐! 배기열 팀장이 안절부절못하잖아.
“사규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역대로 그런 전례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동민 발바닥 열심히 핥아봐. 네가 이번에 전례를 만들 수도 있잖아.
오영훈 파이팅!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