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61화 (61/196)

# 61

내일을 위한 투자 (3)

서유림이 강규정을 지목하자 장내가 일순간 술렁였다. 강규정이 비록 탑 랭커는 아니지만, 그래도 격투기 전적이 20전이 넘고 랭킹도 12위나 되는 제법 이름값 있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서유림이 제아무리 파죽지세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겨우 아마추어일 뿐이다. 강규정은 서유림 같은 햇병아리가 쉽게 도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회자 역시 강규정을 잘 알았다.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격투기 경력이 제법 오래되었으니까.

사회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강규정 선수는 MAN FC 미들급에서 나름대로 입지가 있는 강자인데, 그를 첫 번째 상대로 지목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 있지.

서유림이 마이크를 건네받고는 강규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예선전 때 대기실에서 잠깐 마주쳤는데 말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격투기 선배님인데 밖에서 혼내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링 안에서 화끈하게 혼내주려고요.”

와아-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당찬 신인의 겁 없는 도전에 대한 응원의 함성이었다.

카메라는 다시 김문홍 대표를 향했다.

그러자 관중들이 대결 성사를 강요하기라도 하듯 김문홍을 향해 구호를 위치기 시작했다.

“붙여라. 붙여라. …….”

김문홍은 화끈하고 시원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팬이 즐거워하는 격투기가 진정한 격투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김문홍 대표가 피식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한번 붙어봐!”

그러자 관중들이 다시 와! 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주먹이 운다.’가 시작된 후로 아마 지금 함성이 가장 뜨거웠을 것이다.

강규정을 흘끔 바라보니 가볍게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겠지.

과연 그 비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서유림이 관중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케이지 아래로 퇴장했다.

이어서 헤비급과 무제한급 경기가 차례로 치러졌다.

경기가 모두 끝나자 김문홍 대표가 각 체급별 우승자들을 따로 불렀다.

서유림도, 페더급 챔피언 최영만도 함께 김문홍 대표를 만났다. 옆에는 조만간 MAN FC의 새로운 대표가 될 유진그룹의 한상민 실장도 함께 있었다.

한상민 실장은 크게 나서지 않았다. 그저 거만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껌만 질겅질겅 씹었다.

대신 김문홍 대표가 선수들을 격려하듯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김문홍은 입담이 거친 사람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함부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악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딴에는 오히려 친근감을 주겠답시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도 50대 초반으로 모든 선수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서유림 차례가 되자 김문홍이 흥미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 아까 그 또라이 아냐? 너 이름이 서유림 맞지?”

“예, 대표님.”

서유림이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격투기 시작하고 겨우 두 달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MAN FC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첫 번째는 실력일 것이다. 실력만 뛰어나다면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이미지 관리다.

격투기 팬을 향한 이미지 관리, 그리고 대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인사들을 향한 이미지 관리.

그들에게 기대심을 갖게 해야 한다. ‘이놈 재미있는 놈이네.’ 하는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

신비주의도 좋겠지. 그래야 더 좋은 기회가 만들어질 테니까.

밥상을 수북하게 차려놓아야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김문홍 대표와 면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가지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MAN FC의 차기 대표가 될 한상민 실장까지 함께 와있었다.

게다가 그는 명진식품의 모회사인 유진그룹 회장의 아들이 아니던가? 서유림이 명진식품 소속이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언제 또 만나?

이참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야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격투기를 경험해본 적이 없고?”

“격투기는커녕 여자한테도 맞고 다니는 약골이었습니다.”

서유림이 가능한 한 자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허허, 참! 나도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도무지 믿어져야 말이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유림도 정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이 됐잖아? 그게 중요한 거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특히 한상민 실장에게.

한상민은 유진그룹의 감찰실장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예기획사 사장이기도 하니까. 그것도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푸르름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한상민 실장의 눈도장만 확실하게 받아놓는다면 있다면 나중에 연예계에 진출할 때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격투기 선수라면 착하고 고분고분한 이미지는 피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건방지고 당돌한 게 낫겠지. ‘무난한 놈’이라는 인상보다는 ‘골 때리는 놈’이라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제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주눅 들지 않는 대범함. 오히려 주제도 모르고 거칠게 들이받는 똘끼.

오늘은 그 똘끼만 보여주면 대성공일 것이다.

물론 예의는 갖춰야 하겠지만.

“저는 제 미친 잠재력이 폭발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친 잠재력?”

“저도 제가 이렇게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워낙 약골이라서 아예 노력도 안 했었죠. 운동도 전혀 안 했고요. 그런데 계기가 되어서 막상 운동을 시작하고 보니 제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네?

말이 되는 걸 떠나서 내 입으로 나를 띄우는 식으로 이야기하려니 솔직히 닭살 돋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나를 봐줘? 아니면 누가 나를 띄워주겠어? 나 혼자서라도 고개 삐쭉삐쭉 내밀고 손을 흔들어야지.

자기 PR시대가 된 게 언제인데.

덕분에 김문홍 대표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옆에 앉은 한상민 실장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고 계속 지켜보았다.

눈치를 딱 보니 ‘이놈 또라이네.’ 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번데기가 부화하면 나비가 되고, 달걀이 스스로 껍질을 깨면 병아리가 나옵니다. 저도 이번에 그런 껍질 하나가 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재미있네. 그래서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한 건가?”

무모한 도전? 미들급 랭킹 12위 강규정을 첫 상대로 지목한 걸 두고 말하는 건가?

물론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잘한 상대 여럿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그 정도 되는 사람을 꺾어줘야 돈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도 이왕이면 화끈하게.

“저는 이번 우승을 두고 어떤 사람과 5천만 원 내기를 했습니다. 당연히 다들 미친 짓이라고 했습니다. 여자한테도 맞고 다니는 저에게는 무모한 도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강규정 선수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할 자신 있습니다. 혹시 의심나시면 대표님도 저와 내기 한판 하시겠습니까?”

“내기? 정말 재미있는 친구네! 캐릭터가 독특해. 또라이야 또라이. 하하.”

김문홍 대표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기에 응하겠다는 말은 쉽게 하지 못했다.

내 말을 농담으로 듣는 건가?

그런데 이걸 어째? 나는 농담이 아닌데. 그리고 김문홍 대표가 내기에 응해야 할 이유도 가지고 있는데.

물론 선택은 김문홍 대표의 몫이겠지만.

“대표님. 이왕 이야기 나온 김에 저와 내기 한판 하시죠. 그러면 장담하건데 그것의 두 배가 넘는 돈을 버실 수 있을 겁니다.”

서유림이 당돌하게 제안했다. 어찌 보면 싸가지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유림은 오히려 그런 인상이 심어지길 바랐다. 이렇게 톡톡 튀어줘야 ‘그때 그 또라이.’ 하는 식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테니까.

그제야 김문홍 대표도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고 느낀 듯했다. 웃음기를 거두고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눈빛이 조금 날카로웠다. 이제 갓 격투기 세계에 들어온 애송이 주제에 너무 깝죽거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어떻게? 날 설득해봐.”

“아주 간단한 논리입니다. MAN FC는 사람들의 관심이 커질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겁도 없는 애송이 신인이 감히 MAN FC 대표와 내기를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당연히 화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만 해도 대표님은 내기한 돈 이상을 챙기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내기에서 이기시면 그 돈은 덤이겠죠.”

“소문을 낸다? 흐음…….”

좋다 싫다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한상민은 왜 아직도 안 끼어드는 거야?

난 사실 김문홍보다는 한상민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언제쯤 경기가 가능하겠나?”

“오늘이라도 가능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붙여주실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빨리 챔피언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하하,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군.”

당연하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무제한급 챔피언과 싸워도 질 것 같지가 않다.

“제 미친 잠재력을 믿는 것입니다. 상황이 저를 압박할수록 제 잠재력은 더욱 폭발할 테니까요.”

김문홍 대표가 옆에 앉아있는 한상민 실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가까운 경기가 석 달 후에 있는데, 그때쯤이면 한 실장님이 대표로 계실 것 같군요.”

“재미있겠는데요. 말릴 이유가 없잖아요. 경기 하나 추가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한상민이 거드름 가득한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그제야 김문홍 대표가 결심을 내렸다.

“좋아, 내기하지. 그런데 홍보효과가 살려면 내기 금액이 천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때? 부담돼?”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조금 전에 5천만 원 내기 했다는 이야기는 콧구멍으로 들으셨나?

1천만 원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너무 가소롭지.

사실 나도 MAN FC 계약금이나 파이트머니가 얼마나 짠지는 잘 알고 있거든? 계약금은 끽해야 1천만 원 넘기 힘들 거고, 파이트머니도 1백만 원 수준일 것 아냐?

어차피 그런 걸로 돈 못 벌 거라면 내기로라도 돈 벌어야지.

이참에 내가 어느 정도 통이 큰 사내인지 보여줄까?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푼돈으로는 내기하지 않습니다.”

김문홍 대표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1천만 원을 푼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푼돈 맞지. 아마추어 대회 우승 한 번으로 챙긴 돈만 2억 원인데, 프로 경기에 1천만 원이 웬 말이야?

“5천만 원은 되어야 할 맛이 나죠. 만약 1억 원쯤 걸리면 잠재력이 미친 듯이 춤을 출 수도 있고요.”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한상민 실장이 갑자기 몸을 세우며 관심을 두었다.

“하하, 이 새끼 볼수록 또라이네. 재미있는 놈이야. 너, 명진식품에 다닌다고 했지?”

한상민이 왜 이렇게 안 끼어드나 했다. 그래도 명색이 유진그룹 계열사 소속 직원 아닌가?

그런데 기분이 조금 묘하네. 김문홍 대표의 반말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데 한상민 실장의 반말은 기분이 조금 더럽다. 한상민도 나보다는 나이가 열 살 정도는 많은 것 같은데 왜 그렇지?

눈빛 때문에 그런가?

김문홍 대표의 반말은 형이 동생에게 하는 친근한 반말 같은데, 한상민의 반말은 왠지 모르게 아랫것들 무시하는 것 같은 반말로 느껴졌다.

첫 인상이 안 좋아. 이런 놈은 뒤도 별로 안 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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