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58화 (58/196)

# 58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라. (2)

대꾸하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트러블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는다.

조만간 케이지에서 붙으면 그때 주먹으로 대화하면 되니까.

못 들은 척하며 TV만 보았다.

“타이밍도 잘 잡고, 펀치력도 좋고, 스피드도 빠르고. 잘하면 날 30초 만에 끝낼 수도 있겠어.”

저것 봐. 내가 한 멘트 가지고 시비 걸어올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도상국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놈이었나? 아니면 대회 관계자에게 무슨 지시라도 받았다.

상관하지 말자. 혼자 떠들다 지치면 주둥이 닫겠지.

서유림은 여전히 묵묵부답했다. 누가 봐도 도상국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도상국이 머리를 이쪽으로 가까이 붙이면서 들릴락 말락 할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도 내가 강간살인범이라서 거리를 멀리하는 거냐?”

도상국도 이곳에서의 모든 일이 카메라나 마이크를 통해서 밖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하면 누구도 엿듣지 못하겠지.

“그래. 현명한 판단이다. 난 아직도 죽여야 할 놈이 더 남아있거든. 그러니까 나하고 친하게 지내서 좋을 건 없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듣자듣자 하니까 너무하네.

제아무리 여고생 강간살인범이라고 해도 나름의 사연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영 싸가지가 없는 놈이네.

아무래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면 내가 무서워서 꼬리 말고 있다고 오해할 것 아냐?

서유림이 도상국을 바라보았다. 조금 화난 눈빛으로.

도상국도 서유림을 마주보았다. 눈빛이 평온한 것이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서유림 정도는 가볍게 짓밟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거야 나중에 붙어보면 알 일이고. 지금 따져야 할 건 그게 아니다.

서유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 올해 서른 살인데, 도상국씨는 몇 살이죠?”

“······에?”

평온하기만 하던 도상국의 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질문 내용이 너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왜? 내가 물어보면 안 될 말이라도 물어봤어? 여기는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이란다. 상대방 나이도 모르는데 그렇게 반말 찍찍 내뱉으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지.

“나보다 나이 많아요?”

“그건 아닌데······요.”

이제야 존댓말을 쓰네. 덕분에 불쾌지수가 조금 내려가긴 했다.

“내가 좀 어려보이는 건 알고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그렇게 반말 찍찍 내뱉으면 곤란하죠. 안 그래요? 도상국씨 몇 살이에요?”

“저······ 스물일곱 살입니다.”

“그럼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말 놓지 말고.”

서유림이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도상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한 것인지 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쩌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이나 따지는 놈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거 알아?

내가 굳이 나이를 들먹인 것은 동방예의지국 드립을 떠나서 내가 그만큼 여유로운 상황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즉, 네가 살인자건 뭐건, 네 분위기가 어떻건 난 아무 관심도 없고, 두려움은 더더욱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지.

아직도 눈치를 못 챘어?

그럼 좀 더 확실하게 가르쳐주지. 너를 향한 내 느낌말이야.

아무리 머리가 나쁘고 감이 떨어지는 놈이라도 이 정도면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존댓말 사용하기 싫으면 차라리 그렇게 입 다물고 있어라. 나도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놈과는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서유림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긴장감을 바짝 세웠다. 도상국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전혀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순한 양이 된다. 무안한지 습관처럼 코를 몇 번 만지고는 슬쩍 시선을 돌려서 TV를 본다.

그러다가 다시 서유림을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진짜······ 서른 살이세요?”

하긴, 내가 좀 어려보이긴 하지. 진짜 서른 살이라고 해도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럴 때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얼른 일어서서 캐비닛을 열고 지갑을 통째로 가져왔다. 운전면허증을 꺼내서 도상국에게 보여주었다.

“확인해봐.”

운전면허증을 확인한 도상국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서유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줄 알았어요.”

어라! 이놈 봐라! 착한 놈 코스프레 하는 거야? 아니면 지금까지 살인범 코스프레 했던 건가?

하나의 행동만 가지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 순진한 구석도 있는 것 같고.

아냐! 아무리 그래도 살인범이잖아. 그것도 여고생 강간살인범.

한마디로 인간 말종이다. 속지 말자. 절대로!

잠시 후 대회 관계자가 도상국을 개인대기실로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상국의 차례가 되었다.

서유림은 대기실 TV로 도상국의 경기를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두 선수가 케이지 안으로 입장하자 TV진행자의 멘트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강승찬 선수가 의외의 복병인 서유림 선수에게 패하여 탈락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누가 될까요?”

“저는 지금 입장하고 있는 이민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타격과 그래플링 모두 뛰어나서 무척 안정적이요.”

“도상국 선수도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감히 예상해 보건데 이번 대결의 승자가 이번 ‘주먹이 운다,’에서 최종 우승자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웃기고 있군.

왜 내 얘기는 한 마디도 없지?

아, 한 마디 하긴 했구나. 강승찬을 무너뜨린 의외의 복병.

근데 그게 전부야?

쯧쯧,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그러는 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민규는 몇 차례 경기를 지켜보면서 이미 파악을 완료했다. TV진행자의 말대로 타격과 그라운드 실력 모두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인상적인 실력은 못 되었다. 자신만의 주특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오히려 서유림이 조금 전에 쓰러뜨렸던 강승찬이 훨씬 강자일 것이다.

반면 도상국은 지금까지의 경기가 모두 무척 인상적이었다. 여고생 강간살인범이라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시선은 온통 도상국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었다.

서유림은 눈도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경기에 집중했다.

‘역시!’

도상국의 특징은 정해진 틀이 없다는 점이다.

프리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변칙공격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세에서 펀치와 킥, 엘보우가 뿜어졌다.

게다가 주먹과 킥의 파워도 대단했다. 상대가 가드로 막는데도 불구하고 그 충격 때문에 뒤로 밀리는 게 느껴졌다.

서브미션 방어력도 훌륭했다. 상대가 벌써 네 번이 넘는 테이크 다운을 시도했는데, 100% 방어해냈다.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발차기였다. 간결하면서도 파워가 넘쳤다. 아무래도 태권도를 오랫동안 수련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도상국의 발차기가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도상국의 발차기는 태권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특별함을 갖추고 있었다.

발차기는 펀치와 비교해서 그 위력이 훨씬 세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발차기보다는 펀치가 훨씬 많이 사용된다.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체력 소모는 둘째 치고, 워낙 동작이 커서 상대방이 쉽게 간파해버린다. 그러면 공격이 막히기 쉽고,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상국의 발차기는 달랐다. 동작이 무척 간결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의외성이 더욱 강력한 무기였다. 상대방이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발차기가 날아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도 예측하기 힘든 도상국의 발차기에 부담을 느끼고 계속 거리를 벌리며 뒷걸음질하기 바빴다.

하지만 결국은 미들킥 한 방으로 승부가 갈렸다. 도상국의 발차기가 옆구리에 꽂히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다.

도상국이 쫓아가서 주먹을 날리려다가 멈칫했다. 상대선수인 이민규가 경기를 포기한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다.

그대로 끝내도 될 것 같은데.

도상국이 펀치 날리는 것을 보류한 채 상대선수와 주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서 경기를 끝내달라는 식으로.

그때까지도 상대 선수는 반항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전의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TV 해설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주심이 빨리 끝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이제야 끝내는군요.”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도상국 선수 매너가 좋군요. 상대선수 부상을 눈치 채고 더는 공격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펀치를 뻗지 않고 주심을 바라보는 눈빛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경기였습니다.”

서유림도 마찬가지였다. 도상국이 달리 보이기까지 했다.

여고생을 강간하고 살인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절대로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심판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싸이코패스처럼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리는 게 도상국의 지금 이미지에 더욱 어울리는 행동일 것이다.

혹시 아무도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경기를 보면서 왠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아까 대기실에서 보여주었던 뜻밖의 행동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도상국이 그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진행자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도상국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더는 인터뷰를 진행하기 힘들 정도로 무뚝뚝했다.

‘어쨌건 실력은 좋군. 아무래도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것 같아.’

* * *

준결승전은 무척 싱거웠다. 서유림은 물론이고 도상국도 1라운드만에 상대를 가볍게 KO시켰다.

드디어 대망의 결승전만 남겨둔 것이다.

그제야 소위 전문가라는 자들이 뒷북을 치며 서유림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서유림 선수. 도상국 선수를 위협할 강력한 우승후보죠.”

저게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할 소리야? 어차피 서유림과 도상국 둘 중에 한 명이 우승자가 되는데, 우승후보라니.

그건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생도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

어쨌건 온통 시끌벅적했다. 다들 서유림과 관련한 자료를 찾고,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본들 나올 게 있을까?

“정말 놀랍군요. 평생 격투기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격투기 경력이 2달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실력을 갖출 수가 있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받은 전문가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해? 제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데이터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분석하란 말이야?

이건 한마디로 ‘그냥 이상한 일’이야.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군요.”

준결승전이 끝나자 곧바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결승전을 앞두고 각오를 이야기하는 사전인터뷰였다.

도상국도 서유림도 모두 얼굴이 깔끔했다. 조금 전에 경기를 마친 사람 같지가 않았다.

도상국이 대기실로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미 몇 차례 인터뷰를 해봤기 때문에 굳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유림도 도상국도 상대방을 자극하는데 취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리포터가 사정까지 했을까?

“이런 식으로 해서는 시청자들 관심을 못 끌어요. 우리 조금 자극적으로 나가보자고요. 저 친구들하고 저녁약속 있습니다. 제발 빨리 끝내죠.”

인터뷰는 그러고도 20분이 넘게 이어졌다. 리포터가 원하는 만큼의 센 도발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결국 리포터가 포기했다.

“좋습니다. 어쩔 수 없죠. 마지막으로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씀 한 마디씩 하시죠.”

도상국이 먼저였다. 리포터가 도상국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러자 도상국이 서유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튀어나온 답이었다.

“결승전에서 절 꺾어보세요. 그러면 형님이라고 불러드리죠.”

리포터가 조금은 뜻밖이라는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얼른 서유림에게 마이크를 옮겼다.

사실 서유림도 뜻밖이었다. 기선제압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나이니 형님이니 운운했던 것뿐인데, 그 말을 가슴에 깊이 담아두었단 말인가?

여고생 강간 살인범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제아무리 흉악법이라고 해도 좋게 오는 말을 나쁘게 받아칠 수도 없는 일. 서유림이 가볍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약속한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