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1)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대기실로 복귀했다.
대회 관계자가 서유림을 따로 불렀다.
“아시겠지만, 8강에 진출하면 그때부터는 조력자를 붙일 수 있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붙이실 건가요? 아니면 주최측에서 준비해둔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실 건가요?”
그렇게 앞뒤 다 자르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주최측이 준비한 조력자들의 실력은 어떤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리고 비용 문제도.
“주최측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면 비용이 드나요?”
“아닙니다. 무료죠. 반대로 개인적인 조력자를 붙이시면 대회에서 조력자에게 비용을 따로 드립니다.”
“주최측 조력자는 어떤 분들이······?”
대회 관계자가 바쁜 모양이다. 아니면 일일이 답변하기 귀찮았거나.
서유림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팜플렛을 보여준다.
거기에 조력자와 관련한 내용이 안내되어있었다.
“보시고 결정되시면 연락주세요. 16강전이 끝나기 전에 연락 주셔야 저희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일주일이나 시간이 남았군.
서유림이 팜플렛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하나같이 못 들어본 이름이었다. 나름대로 실력은 있겠지만, 그다지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리고 원래 스승은 여러 명을 두는 게 아니라고 했다. 서유림에게는 이미 스승이 있지 않은가?
서유림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강성체육관의 관장 송민호와 복성체육관의 관장 배복성.
하지만 송민호는 순식간에 이름이 지워졌다.
스승은 무슨 개뿔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서유림이 강성체육관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혼자 줄넘기하고, 혼자 근육 키우고, 혼자 거울 보며 자세 연습하고, 혼자 샌드백 때리는 것뿐이다.
물론 이따금 코치의 조언을 받긴 하지만, 딱 보면 알잖아. 이게 진심을 다해서 가르치는 건지, 아니면 의무방어전 하는 건지.
짜식들, 예쁜 여자들한테만 관심 주고 말이야. 차별대우가 웬만큼 심해야 말이지.
예쁜 여자들 가르칠 때는 30분씩 붙어 있다가 날 가르칠 때면 5분이면 땡이다.
그럴 때마다 말은 좋게 해준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감각이 있으시네요. 혼자서도 너무 잘해요. 가르칠 게 없네.”
내가 운전할 때조차도 웬만하면 욕은 잘 안 하는 성격인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마디 하고싶어졌다.
‘에라 이 XXX 같은 놈들아!’
반면 배복성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배복성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라서 이틀에 한 번, 그나마도 한 시간정도씩만 도움을 받지만, 그때만큼은 열과 성을 다했다.
만약 개인적인 조력자를 붙인다면 당연히 배복성 관장일 것이다.
물론 배복성이 시간을 내줘야 하겠지만.
체육관을 나섰다.
그런데 곧바로 채희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희라야!”
- 오늘 오빠 경기 봤어. 내가 그렇게 손 흔들며 소리쳤는데 눈길 한 번 안 주데.
“그랬어? 어디 앉아있었는데?”
- 로얄석에. 바로 코앞에 앉아있었는데.
“미안해. 못 봤어.”
- 호호, 아니야. 경기에 집중하는데 어떻게 봐? 근데 오늘 약속 있어? 혹시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야?
“병원은 무슨. 다친 곳도 없는데. 체육관 가서 운동이나 하려고.”
- 그럼 오늘 나랑 놀아주면 안 돼? 오빠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안 될 이유가 있나?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볼까?”
채희라는 욕정을 풀고 나면 남자의 가슴팍을 손끝으로 만지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가슴팍을 누비는 채희라의 손가락이 간질간질 느껴진다.
“오빠는 꿈이 격투기 선수야?”
“물론 아니지.”
서유림의 꿈은 훨씬 더 큰 곳에 있다.
하지만 정령의 힘을 얻었다고 해서 그 꿈을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힘이 강해졌다고 해서 누가 알아서 돈과 권력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력을 동원해서 강제로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격투기라는 징검다리였다.
“일단은 격투기로 돈 좀 벌어야지. 가능하다면 대중한테 인지도 높여서 연예계 쪽으로 진출하던가.”
사실 미래가 조금 불투명했다. 먹고 살 걱정이야 없지만, 욕심만큼 돈과 권력을 움켜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연예계인데, 짧은 시간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상태에서는 격투기가 최고였다.
그러자 채희라가 고개를 번쩍 들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와, 오빠도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했네! 나도 오빠가 연예계로 진출하면 어떨까 해서 물어본 건데. 오빠 정도 외모면 충분히 먹힐 거야.”
“내 외모로?”
순간 말도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전혀 엉뚱한 말도 아니었다.
사실 정령 아리안을 만나기 전에도 얼굴은 괜찮게 생긴 편에 속했다. 그래서 그토록 말라비틀어진 몸으로도 제법 예쁜 애인을 사귀기도 했었고.
그런데 정령 아리안을 만난 후로 외모가 환골탈태했다.
얼굴도 적당히 살이 붙으면서 더욱 미남형으로 바뀌었고, 몸은 세계 누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멋지게 변했다고 자신했다.
문득 거울이 보고 싶어졌다.
욕실로 들어가서 벽면에 붙은 전신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봐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제법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도 그렇지만 특히 몸이 좋았다.
힘이 느껴지는 가슴팍, 빨래판 같은 복근, 듬직한 광배근. 팔뚝도 허벅지도 종아리도 굵직굵직하면서도 잔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이렇게 내 몸을 감상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나르시시즘에 빠진 기분인걸.
채희라가 목욕가운으로 몸을 가린 채 욕실로 따라 들어왔다.
이런! 나는 팬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괜히 거기를 가리고 싶어지네. 그렇다고 손으로 가리자니 꼴이 우습고.
“와! 이렇게 보니까 정말 멋지다.”
채희라가 등 뒤에서 안아주었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온 손이 서유림의 가슴과 복근을 어루만졌다.
“오빠는 꼭 연예계로 진출해야 해. 마침 내가 그쪽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잘 알거든. 오빠가 인지도만 조금 높여놓으면 내가 연결해줄게.”
오! 이거 희소식인걸!
“어떤 사람인데?”
“그건 지금 말해주기 곤란해. 오빠가 먼저 인지도를 높여서 그분 눈에 들어야지. 그래야 나도 마음 편히 부탁할 수 있지.”
사실 그건 당연한 세상 이치였다.
세상 사는데 인맥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학연, 지연, 혈연을 중요시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인맥만 좋다고 무조건 성공하느냐?
그건 아니다. 인맥을 활용할 능력을 갖춘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서유림도 동창회에 가끔 나가면 종종 그런 말을 듣곤 한다.
[내 손이 닿을 곳까지만 스스로 올라와라. 그러면 이후부터는 내가 끌어올려주마.]
한마디로 최소한의 자격은 스스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 승진에서도 줄만 잘 탄다고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윗사람이 힘을 써주고 싶어도 명분이 있어야 힘을 써주는 것 아닌가?
서유림이 채희라를 바라보았다.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하면 되는 건가?”
“피이! 그깟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인지도가 생기나? 최소한 MAN FC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해줘야지.”
“그럼 미들급 챔피언 한번 먹으면 되는 거야? 아니면 MAN FC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거나.”
“사실 그 정도 스펙으로도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는 외모가 워낙 잘 받쳐주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봐. 챔피언 먹으면 내가 그분께 말씀드려볼게.”
서유림이 활짝 웃었다.
사실 자신감이 넘쳤다. MAN FC 미들급이 아니라 당장 UFC 미들급 챔피언과 붙는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서 자신감 넘친다고 누가 경기를 만들어주나? 챔피언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좋았어! 너 약속한 거다!”
“알았어, 약속!”
채희라가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다음날.
서유림이 퇴근 후 강성체육관에서 혼자 샌드백을 때리며 운동하고 있는데, 관장 송민호가 슬쩍 다가와서 샌드백을 잡아주었다.
“이야, 한 달 만에 폼이 많이 좋아졌네요. 서유림씨처럼 성장이 빠른 사람은 처음 봅니다. 우리 강성체육관 코치들 실력이 괜찮죠?”
이 양반이 저녁에 반주를 잘못 드셨나? 뭔 헛소리야? 강성체육관 코치들이 나한테 가르쳐준 게 뭐가 있다고?
게다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갑자기 왜 하는데?
한마디 확 쏴주려다가 참았다.
“아하하. 네.”
웃음소리가 너무 어색했나? 난 왜 이렇게 감정을 못 숨기지?
다행히 송민호의 눈치가 빵점이다. 내 웃음소리의 이상한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이번에 본선 진출에 성공하셨다면서요? 게다가 32강도 가볍게 통과하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서유림씨처럼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있어요.”
진짜 한마디 듣고 싶어 저러나?
그래서 용건이 뭔데? 대충 짐작은 간다만 일단은 내 귀로 직접 들어봐야겠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8강전부터는 조력자가 필요한 거 아시죠?”
역시 그거였군. 하긴, 뭔가 얻어먹을 게 없으면 당신 같은 사람이 나한테 관심을 둘 이유가 없겠지.
“예, 압니다.”
“근데 주최측에서 붙여주는 조력자는 실력이 형편없어요. 그다지 성의도 없고. 그것도 아세요.”
그런 거였어? 거기까지는 몰랐지. 정보를 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근데 왜 당신 말에 믿음이 안 가지?
“그런가요?”
“그렇다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실력 있으면 저처럼 개인 체육관 차리지 왜 그런 곳에서 월급쟁이 노릇 하겠어요?”
오! 이번 이야기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었어.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놈의 조언이라고 해도 참고할만한 부분은 참고해줘야지.
“그래서 말씀인데, 필요하시면 제가 조력자 해드리죠. 대회에서 따로 조력자 비용 나오니까 추가비용은 받지 않겠습니다.”
요놈 봐라. 은근슬쩍 숟가락 얹으려고 그러네!
게다가 뭐? 추가비용을 받아?
그 한 마디로 송민호가 나를 얼마나 띄엄띄엄 보는지 알 것 같다.
근데 아저씨, 나도 통박 좀 굴릴 줄 아는 놈이거든요. 게다가 정령 아리안 덕분에 잔머리까지 팽글팽글 잘 돌아가는 놈이거든요.
송민호가 조력자를 자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회에서 나오는 비용?
그따위 것에는 관심도 없겠지. 그깟 돈이 얼마나 된다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홍보효과다. 자신이 코치해준 선수가 어느 대회에서 입상했다 하면 그 자체로 큰 홍보효과가 나니까.
게다가 ‘주먹이 운다.’는 비록 케이블방송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시청률이 높게 나오는 인기프로그램이다.
그곳에서 내가 유니폼에 ‘강성체육관’ 이름 한 글자만 박고 출전해도 그 자체로 얼마나 큰 홍보효과가 나겠는가?
거기에 우승까지 해봐. 그건 대박이지. 그 홍보효과를 돈으로 따진다면 수천만 원, 아니 잘하면 수억 원도 쉽게 넘을 것이다.
그런데 추가비용을 운운해? 에라 이 날도둑놈아. 감히 누구를 등쳐먹으려고 해? 차라리 내가 너를 등쳐먹고 말지.
어떻게 등쳐먹느냐고? 간단해. 슬쩍 경쟁만 붙여놓아도 알아서 값이 오를 테니까.
“하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제안이 들어와서요. 조력자 해주겠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저것 봐, 저것 봐!
왜 돌 맞은 고양이처럼 어깨를 움찔해? 게다가 표정까지 갑자기 비굴해진다.
“하하,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제가 강성체육관에서 훈련한 게 며칠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강성체육관 이름은 유니폼에 넣어드려야죠.”
송민호의 얼굴이 다시 밝아진다. 얼마나 기쁜지 손까지 덥석 잡는다.
“아, 정말입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벌써 고마워하면 어떻게 해? 아직 말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사람 말은 무조건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야. 특히 한국말은.
“당연히 그래야죠. 합당한 비용만 내시면요.”
“······예?”